살인 교향곡, 연재 제53회 <빛은 저울로 달 수 없다>
Symphony in C minor ‘Fate’

빛은 저울로 달 수 없다

1년 후.

기영은 변호사사무실을 휴업하고, 미국 뉴욕에 와 있었다. 준하의 사건이 종결되고 얼마 있지 않아 마침 부산지방변호사협회와 미국 뉴욕 주 변호사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학술교류를 위한 3년 과정의 로스쿨 연구원 모집이 있었고, 여기에 기영이 자원을 했던 것이다.

기영이 여기에 자원을 한 것은 준하의 사건을 통하여 그때까지 그가 지녀온 가치관과 법률관을 다시 한 번 숙고해 봐야겠다는 나름대로의 인식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실정법의 단순한 적용보다는 인간정신의 탐구가 선행돼야 하겠다는 반성이었다.

준하의 사건에서 나타난 김인환의 권력을 이용한 고문과 인권유린도, 정해현의 권력을 향한 맹목적인 추종도, 그리고 그들에 대한 준하의 끈질긴 저항도, 어쩌면 모두 삶에 대한 집념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달랐다. 그 방향은 인간 내면의 고유한 인성과 가치에 기반을 둔 삶의 뿌리 쪽으로 향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각자 그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준하가 추구하는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위한 신성의 빛. 그것은 기영에게는 다소 생소했다. 그러나 변론요지서를 작성하고 있던 날, 기영을 찾아온 김경환 장로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는 보다 근원적인, 준하가 말하는 신성의 빛이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기 시작했다.

김경환 장로가 가고 난 뒤 문득 떠올랐던 생각, 범죄예방을 위한 형사정책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성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이론화시켜 교화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이를 범죄예방을 위한 방법적 교육프로그램으로 체계화시킬 수는 없을까.

신성의 원리에 입각한 범죄예방 교육프로그램의 이론체계화.

기영은 이를 위하여 이제까지 보아온 단순한 법률서가 아닌 서구의 인권사와 법철학, 나아가 심리학과 신학까지도 더 깊게 공부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마침 변호사협회에서 경제적 지원까지 하는 학술교류를 위한 연구원 모집은 그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막상 미국에 왔지만, 기영은 여전히 서툰 언어와 생경한 문화 차이에 적응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법원의 공소기각 결정이 있은 그날 오후, 준하는 석방되었다. 그때 기영은 교도소에 마중을 나가 준하를 잠깐 만났다.

준하는 기영과 소녀가 함께 걸어 나왔던 히말라야시다나무 아래에서 새삼 자유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듯 길게 심호흡을 한 후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기영이 묻지도 않았는데 바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일단은 미국으로 가겠지만, 그 다음은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여행은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지 않은 아주 긴 여행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때 준하가 미국의 어디로 간다고 목적지도 말하지 않았고, 그동안 당장 눈앞에 닥친 일도 벅차 어쩌면 미국에 있을지도 모르는 준하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한번 찾아가 볼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기영의 미국 주소지로 편지 한 통이 왔다.

편지는 의외로 준하가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발신지는 애리조나 주의 세도나였다. 준하의 편지를 보자, 새삼스레 미국에 오기까지의 지난날이 떠올랐다.

*

체포동의안의 집행으로 전격 구속된 정해현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최경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 주장했다. 자신은 결코 최경호와 박형기에게 살인을 지시하거나 교사한 적이 없다고 했다. 최경호의 죽음은 누군가의 음모, 조작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김용훈 검사는 최경호의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각도로 수사를 했다.

먼저 최경호의 노트북에 저장된 양심선언문에서, 죽음이 두려워 마약을 주사하고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먹었다는 부분과 관련하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최경호의 혈액감정을 한 결과 여기에 직접 언급된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그리고 필로폰 성분이 검출되었다.

이 양심선언문은 최경호가 호텔에서 면도날로 손목의 동맥을 절단하기 직전에 작성되어 저장되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선언문의 작성에 다른 누가 개입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 노트북에는 양심선언서 외에 최경호가 보좌관으로 있을 때 작성한 다른 많은 문서도 함께 저장되어 있었다.

검찰에 스스로 출석한 박영애는 이 노트북이 평소 최경호가 그녀의 아파트에서 사용하던 그의 것이라고 입증해 주었다. 박영애는 최경호가 보좌관에서 직위 해제된 이후 술만 마시면 양심선언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정해현에게 복수를 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했다. 마약에 취해 정해현의 위선과 가면 쓴 얼굴을 모조리 까발리고 자기도 죽을 것이라고 횡설수설했다고 했다.

마린시티호텔 영업부에 근무하는 신경민은 그날 저녁 10시경 무렵 최경호가 술에 취한 모습으로 혼자 호텔 프런트에 와서 마침 비어있는 804호실에 입실했다고 진술했다. 박광우라는 이름으로 체크인을 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최경호인지 당시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고 했다.

호텔 현장에서 발견된 망치와 면장갑에 묻은 혈흔이 김인환의 혈액과 동일하다는 감정결과가 나왔고, 욕실 바닥에서 발견된 주사기에 나 있는 지문감식에서도 최경호 본인의 지문 외에 타인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욕조 바닥에서 발견된 휴대전화에서도 희미하나마 최경호의 지문이 채취되었다. 이 휴대전화도 최경호가 평소 사용하던 것이라고 박영애가 확인해 주었다.

호텔 현장에서 발견된 망치의 머리 표면적은 김인환의 부검에서 발견된 후두부 함몰 3cm 골절 상흔과 일치했고, 현장 응접탁자 위에 놓여있던 사진 속에서 박형기가 손에 들고 있는 칼은 홍익문화연구소 옥외 연못에서 발견된 바로 그 칼이었다.

무엇보다 정해현의 살인지시를 밝혀주는 결정적 증거는 녹음테이프에 수록된 음성 분석결과가 정해현 자신의 음성으로 확인된 것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술에 취하여 횡설수설하고 있는 최경호의 음성이, 그가 직접 김인환을 살해하였다는 양심선언서의 자백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방송국에 보내진 음성메시지와 녹음기에 수록된 음성이 최경호 본인의 음성인가에 대해서는, 최경호 본인이 사망한 뒤라 음성을 분석할 비교자료가 없었고, 설사 비교자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록된 음성이 술에 취한 음성인데다 짧은 몇 마디뿐이었기 때문에 분석이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김용훈 검사는 최경호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자살로 결론지었다.

광복동과 남포동을 무대로 활동하는 조직폭력배를 거느리고 마약공급과 인신매매, 윤락행위를 일삼던 송철준과 정해현의 오랜 유착관계도 밝혀졌다. 특히 정해현이 부일물산(주)라는 상호로 위장한 남포동 소재의 비밀접객업소에서 환락의 성접대 파티를 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는 ‘애리’라는 유흥업소 종업원의 제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해현은 지역구 유지들의 연명탄원서에도 불구하고 살인교사죄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해현이 선고를 받고 수감된 교도소 독방은 공교롭게도 고 홍한일 박사가 수감되었던 바로 그 방이었다고 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다음 날 새벽, 정해현은 홍한일 박사가 목을 매단 그 창틀에 수의를 찢어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해현이 목을 매단 그날 밤, 교도소에는 유령이 나타났다는 괴담이 돌았다. 당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많은 재소자들은 그 유령이 고 홍한일 박사의 유령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 유령을 직접 보았다는 당직교도관은 그것이 고 김인환의 유령이었다고 했다.

*

사건 발생 시점 직전, 박형기가 휴대전화로 마린시티호텔 804호로 전화를 한 사실이 통화기록에서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로써 박형기가 주도적으로 범행을 실행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박형기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항소심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 그날 밤, 박형기는 억울하다고 고함을 지르며 감방 벽에 머리를 찧어 자해를 해 정신착란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 후 박형기가 어느 정신병원에 있는지, 어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지 기영은 확인해 보지 않았다.

*

준하의 재판을 통하여 김인환의 인권유린 행위가 보도된 이후, 검찰의 밀실수사와 고문을 통한 인권유린 행위의 근절을 위한 검찰의 구체적인 수사지침과 방안이 발표되었다.

이와 더불어 준하와 손나영에게 고문을 한 고문기술자가 누구였나에 대한 검찰 내부의 자체 수사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인환의 변호사사무실 사무장이었던 오경록이 아파트 발코니에서 뛰어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의외의 사건이었다.

미망인의 말에 의하면, 그날 밤 투신하기 직전 오경록은 무엇인가 헛것을 본 듯 놀라 발코니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 오지 마, 당신이 여기에 왜 왔어? 그건 당신이 시킨 일이잖아. 내가 하지 않았어. 고문은 당신이 시킨 일이잖아. 당신이 시켰잖아…….

*

정해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며칠 뒤, 기영과 손나영의 목숨을 앗아갈 뻔 했던 송철준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해현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끝까지 자백하지 않았다. 그 범행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한 것이라고 우겼다.

유지연의 통장에 입금시킨 돈에 대하여도 그는 자백하지 않았다. 그 돈은 정해현과 관계없는 자신의 돈이라고 했다. 고 홍한일 박사에게 강제로 마약을 주입한 행위에 대해서도 자백하지 않았고, 손나영에 대한 마약과 성추행 및 폭력행위에 대해서도 시인하지 않았다.

송철준이 체포된 직후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 유흥업소를 무대로 하여 활동하던 조직폭력배 ‘유신파’ 일당은 일망타진되었다. 이 수사 또한 김용훈 검사가 주도하였다. 송철준은 살인미수, 인신매매, 마약공급, 윤락행위방지법 등 경합범으로 20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

미국으로 오기 일주일 전, 기영은 용훈을 만나 저녁을 함께 하면서 술을 마셨다. 송도 해변의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 횟집이었다. 그때 용훈은 후회하고 있었다. 최경호의 시신이 발견된 그날, 호텔 현장에서 발견된 최경호의 양심선언문과 증거를 믿고 준하의 공소를 취소한 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것이었다.

용훈은 여전히 준하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최경호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정해현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최경호의 시신이 발견된 현장의 증거들이 퍼즐조각처럼 너무나 정교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완벽한 범행이더라도 범인의 작은 실수는 있게 마련인데, 그 실수를 찾아내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어느 누구에게도 수석을 빼앗겨 본 적이 없는데, 준하에게는 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졌다고 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범행도구로 이용당했다고 했다. 그것은 변호사인 기영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냐고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지고서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이 참 묘하다고 했다. 그러나 범인에게 지는 검사는 검사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했다. 더구나 범인에게 이용당한 것은 검사로서 씻을 수 없는 수치라고 했다.

그리고 정해현의 비밀비즈니스 룸에서 성접대를 받은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는 윗선에서 막혀버렸다고 했다. 청와대까지 나서 그에게 전보발령을 내고 말았다고 했다. 그것이 더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용훈은 술기운 때문인지 사표를 쓸 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 기영은 발끈했다.

― 이기고 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너같이 직업적 양심과 법의식에 투철한 곧은 검사가 있어야 해. 김인환 같은 검사가 지금도 있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어. 너는 이번 사건에서 어떤 권력의 외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김인환과 정해현의 범죄를 밝혀내지 않았니. 김인환의 경우, 네가 몸담고 있는 검찰조직의 가장 치명적인 치부가 될 수 있는데도 말이야.

저기 등대를 봐. 혼자서 외롭게 밤바다를 지키고 있어. 법에 대한 너의 양심과 직업의식은 저 등대와 같아. 이번 사건에서 너는 저 등대처럼 외롭게 고군분투했어. 절친한 친구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까지 직업적 양심에 충실했어. 너 자신을 자책하지 마. 과소평가 하지도 말고. 이것이 너에 대한 내 평가야.

너 기억해? 고등학교 때, 준하가 김인환의 조작으로 소년원에 가고, 정해현이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 둘이 다짐했던 말을……. 역사는 변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어른이 되면 밝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나는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너도 나도 법대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니. 그때 우리의 말대로 역사는 변하고 있잖아. 더 밝은 세상을 위해 너는 검찰에 남아야 해. 너 같이 명석하고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 수사 권력의 중심에 있어야 해. 그래야 그 권력이 부패하지 않아.

그리고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실정법 이전에 보편적 정의와 양심이라는 게 있어. 어쩌면 이번 사건에서 준하는 우리가 법으로 하지 못하는 보편적 정의와 양심을 실현했는지도 몰라. 사표 내지마.

참, 그리고 준하가 네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더라. 네가 공소취소를 해 준 것에 고마운 게 아니라, 네가 사적인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네 본분에 충실해 준 것에 말이야. 친구에게 사형을 구형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어. 친구로서 정말 애썼다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절대 사표 내지 마.

기영은 술기운과 홧김에 장황하게 열변을 토했고, 용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그리고 며칠 후, 기영은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곽형일 판사의 방에 잠시 들렀다. 그때 만약 판결을 내렸다면 김준하에게는 어떤 선고가 내려졌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곽 판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 법관은 오직 판결로 말할 뿐입니다…….

그때 곽 판사의 입가에 흘렀던 그 웃음의 의미는 아직도 알 수 없다.

*

법원의 공소기각 결정이 있은 그날, 준하는 교도소에서 출감했다. 일주일 후, 준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침 그날이 홍한일 박사의 기일이라 묘소에 참배를 하러 가는데 꼭 한번 와달라는 것이었다.

홍한일 박사의 묘소는 홍익문화연구소 뒤편 추일봉 중턱에 있었다. 고인이 설립하여 평생을 가꾼 홍익고등학교의 전경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가족 묘지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홍익고등학교를 대마도가 보이는 산중턱에 세웠던 고인의 평소 유지를 받들었다고 했다.

기영이 홍익문화연구소를 찾아가니, 사무실 여직원이 준하는 이미 홍한일 박사의 묘소로 먼저 올라갔다고 했다. 산길을 걸어올라 묘소에 도착했을 때, 준하와 함께 온 일행들이 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기영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릴 뻔했다. 거기에는 준하가 더불어 손나영, 유지연, 신경민, 그리고 기영이 어디에서 본 듯한 낯익은 남자와 처음 보는 여자 한 사람이 있었다. 이미 참배를 마치고, 묘소 앞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 변호사님, 어서 오세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등골의 식은땀을 느끼며 서 있는데, 손나영이 다가와 기영에게 인사했다. 아, 그랬구나! 준하의 살풀이춤에는 이 사람들이 함께 장단을 맞추고 있었구나. 그런데 신경민 저 친구가 여기에 왜 있을까? 그리고 저 낯익은 남자는 누구더라? 준하가 남자를 먼저 소개했다.

― KNB방송국의 유철주 부장님이야. 아마 TV에서 봤겠지…….
― ……?
― 제 성급한 보도 때문에 박사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야 박사님께서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죄책감에 스스로 이렇게나마 위로하고 있습니다.
유철주 부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안녕하세요? 박사님은 저에게는 부모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신경민이 말했다.
― 박사님과 아주 가까웠던 지인의 늦둥이 외아들인데, 저 애가 어렸을 때 부모가 모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 그래서 박사님께서 거두어 친자식처럼 키워주셨어.
준하가 옆에서 말했다.

― 제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준하의 말이 끝나자, 손나영이 유철주 곁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 박영애라고 합니다. 저는 변호사님을 잘 알고 있어요.

여자가 인사를 했다. 박영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아, 그래, 그 여자다. 유지연은 박영애 명의의 통장으로 돈 5억 원을 이체했다고 했다. 그리고 최경호는 박영애 명의의 통장에서 돈 1,000만 원을 찾아 신경민에게 주었다.

― 두 분께서 단둘이 말씀 나누세요. 저희들은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박영애와 나란히 앉은 유철주가 일어서며 말했다. 유철주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 산을 내려갔다. 산을 내려가는 박영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준하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 배우를 꿈꾸는 청순한 소녀였지. 최경호와 박형기에게 속아 성폭행을 당하고 2년 동안이나 윤락가를 전전했어. 마약범으로 몰려 손나영과 같은 감방에 수감되어 있었어. 손나영처럼 심한 고문도 받았고. 유철주 부장의 첫사랑이라고 했어. 유지연은 증인으로 나왔으니까, 잘 알고 있겠지. 유지연도 같은 인신매매와 성폭력의 피해자야.

그런데, 박영애는 최경호의 여자였고, 유지연은 박형기의 여자였다. 기영은 다시 등줄기가 섬뜩해 왔다. 법정에서의 강성모 변호사의 추리가 맞지 않은가.

일행들이 먼저 산을 내려간 뒤에 준하는 다시 홍 박사의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준하가 다시 한 번 무덤에 큰절을 했다.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고 있는 준하의 어깨가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절을 마치고 일어선 준하가 문득 기영의 양복 깃에 꽂혀있는 저울문양의 변호사배지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리고 기영의 두 손을 마주잡고 엄숙하게 말했다.

― 빛은 저울로 달 수 없어.

그렇다. 빛이란 준하가 추구하는 신성의 빛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저울이란 실정법 내지는 그 법에 의한 재판을 상징하는 말이다. 결국 준하의 이 말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고유한 신성의 빛은 인간이 만든 실정법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이젠 누구도 그를 심판하지 못한다고 한 자신의 공언이 실현됐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인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 준하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미국의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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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제54회(마지막회) <영혼 교향곡>은 2019. 10. 28.(월) 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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