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54회(마지막회) <영혼 교향곡>
Symphony in C minor ‘Fate’

영혼 교향곡

기영은 미국에 있는 동안 대륙횡단 여행을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않았던 준하의 편지를 받고 드디어 그것을 실행하기로 했다. 미국 동부 뉴욕에서 서부 애리조나까지 광대한 미대륙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중고 밴 자동차 한대를 렌트하여 미 동부 뉴욕을 출발하여 서부개척사의 이민들처럼 대륙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오직 지도 한 장에 의존하여 이 도시 저 도시 이 마을 저 마을을 풍찬노숙을 하며 기웃대고 누비다가 천신만고 끝에 한 달여 만에 준하가 있다는 미 남서부 애리조나주에 도착했다.

애리조나의 사막은 광활했다. 끝없는 지평선에는 오직 모래와 돌과 바위산과 초원지대만 펼쳐져 있었다. 그 옛날 서부영화 속의 애리조나카우보이도 인디언들도 보이지 않았다. 들판의 들소 떼도 하늘의 독수리도 보이지 않았다. 황량하고 삭막했다. 차갑고 건조한 모래바람까지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준하가 편지를 보낸 애리조나주의 세도나(SEDONA)는 이러한 사막의 해발 1,300m 고지에 위치한 인구가 2만 명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도시라고 했다. 그러나 이 세도나는 미국의 12대 관광지 중의 하나로서,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내뿜는 볼텍스(Vortex) 스물한 곳 중 다섯 곳이 이 세도나에 몰려 있다고 했다.

세도나의 강력한 이 에너지장은 근처의 다른 볼텍스에서 나오는 에너지장과 합쳐져 세도나 전 지역을 덮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볼텍스에서 내뿜는 강력한 자기장이 세계의 그 어떤 곳보다도 가장 왕성한 지기地氣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계적인 기氣수련장이 이곳에 몰려 있으며, 명상가, 심령학자, 심리학자, 예술가 등 초자연적인 힘을 믿는 사람들에겐 이곳 세도나는 영산靈山으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미 서부가 개척되기 이전, 나바호, 아파치, 수, 라코타, 카이오와족 등 인디언의 여러 부족들은 이곳 세도나를 신성한 지역으로 여겼다고 했다. 이 도시는 도시 전체가 레드록(Redrock)이라고 불리는 붉은 암석지대인데, 이러한 붉은 암석들의 형상이 신비롭기 그지없고, 또 이 암석지대에서 강력한 지기地氣를 내뿜고 있어 해탈을 염원하는 명상가들의 성지라고 했다.

지질학적으로 세도나는 무려 3억년 동안 바다였는데, 약 3백만 년 전에 콜로라도 고원(Colorado Plateau)이 융기할 때 해저퇴적암이 솟아올라 비와 바람과 눈에 깎이고 닳아 지금의 붉은 바위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내뿜는 강력한 지기地氣 때문에 예로부터 아메리카원주민 인디언들은 이 세도나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어머니 지구의 에너지가 나오는 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벨락, 에어포트 메사, 대성당 바위, 보인튼 캐년이 세도나에서 가장 잘 알려진 4대 볼텍스이다.

기영이 세도나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준하가 보낸 편지 겉봉에 적힌 주소지는 레드록이라고 불리는 붉은 바위산 산기슭에 있는 작은 목조 가옥이었다. 기영이 문을 두드리자, 황색 천연염색 개량한복을 입은 한인韓人 할머니 한 분이 나와 기영을 맞았다.

할머니는 꽤 나이가 들어보였지만 밝고 자상한 표정에 피부가 맑고 깨끗했다. 기영이 찾아 온 용건을 말하자, 할머니는 준하가 집 뒤에 있는 붉은 바위산으로 저녁 수행을 하러 갔으니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기영은 준하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강력한 자기장을 내뿜고 있다는 붉은 바위산이 어떤 곳인지 직접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기영은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준하가 수행을 하고 있다는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동안에 어두워지는 저녁 바위산에서 하얀 달이 둥실 솟았다. 너무 맑아 푸른 기운이 감도는 하얀 달빛이 흐르는 숲 속 오솔길을 이십여 분 정도 올라가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붉은 암봉(redrock)이 나타났다. 붉은 바위 봉우리는 달빛을 받아 더욱 신비로운 형상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법 가파른 레드록 소로를 한참 나아갔을 때 할머니가 가르쳐 준 바위산 동굴이 보였다. 기영은 그 동굴을 향하여 걸었다. 그때 동굴 속에서 하얀 수련도복을 입은 사람이 나왔다. 준하였다. 기영이 어릴 적부터 보아 왔던 대장의 모습이었다. 준하가 나온 동굴 앞에는 꽤 넓은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기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 수행이 끝나지 않았다면 불쑥 나타나는 것이 준하의 수행을 방해하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수행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기영은 준하의 모습이 잘 보이는 바위에 멀찌감치 앉아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산 아래 마을에서 비치는 불빛이 하늘의 별처럼 수를 놓고 있었다.

기영은 시선을 다시 준하에게로 돌렸다. 준하가 동굴 앞 평평한 바위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머리 위에서 합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추운 무간암에서의 이른 새벽, 계곡 얼음물에 몸을 적신 대장이 바위에서 원을 그리던 동작이었다.

머리 위에서 합장을 한 대장의 손이 달빛을 아래로 당겨 가슴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가 되고, 이어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반절을 했다. 허리를 다시 일으킨 대장의 두 팔이 시리도록 하얀 빛을 투사하는 달을 끌어안을 듯 활짝 벌어졌다.

대장의 손끝에서 달빛은 둥근 원을 그렸다가 무한대로 흩어졌다. 대장의 허리가 꺾어질 듯 뒤로 휘었다가 달빛에 이끌려 포물선을 그렸다. 발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머리 위에서 달빛을 휘저었다가 튕기듯 솟아오르기도 했다.

달빛이 대장의 손끝에서, 손바닥에서, 발끝에서, 머리에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하얀 빛의 강물을 이루고 있었다. 무수한 달빛 포물선이 대장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 모습은 우아했다. 아름다웠다. 지극한 조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붉은 바위산과 푸르도록 시린 하얀 달빛 속에서 추는 대장의 기무氣舞는 신비로웠다.

기영은 대장의 몸이 엮어내는 하나하나의 동작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홀리듯 빨려 들어간 기영은 어느새 어릴 적의 그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대장이 추는 단무丹舞에 빠져들고 말았다. 소년은 신비롭게 펼쳐지는 대장의 춤과 달빛에 흠씬 젖어 들었다.

이윽고 대장이 천천히 동작을 멈추고, 이어 머리 위로 뻗쳐 합장을 한 손을 가슴으로 내리면서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마지막 춤동작을 마무리 지은 대장이 가벼운 깃털이 내려앉듯 사뿐하게 바위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소년도 자기도 모르게 대장을 따라 바위 위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대장이 막대기 하나를 들고 끝을 입술로 가져갔다. 막대기 끝에서 소리가 떨려났다. 대금소리였다. 대장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대금이었다. 대금소리는 눈을 감고 정좌를 한 소년의 귀로 물이 스미듯 들어와 시냇물이 되어 머리를 적시고 굽이치는 강물이 되어 가슴속으로 흘렀다.

대금소리는 폐 속에서 하얀 입김으로 내쉬는 숨이 되어 시리도록 하얀 달빛을 타고 무한대의 우주로 흘러갔다. 대금소리가 다시 달빛이 되어 소년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축복처럼 내려앉았다. 대금소리가 멈췄다.

순간 소년의 머리 위 정수리에 시리도록 하얀 달빛덩어리 하나가 내려앉았다. 아니, 그것은 달빛이 아니었다. 달빛보다도 더 밝고 투명한 순수한 빛의 결정체였다. 그 빛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와 머릿속을 환히 밝혔다.

그 빛은 너무도 밝아 오히려 푸르게 빛났다. 머릿속을 밝힌 빛이 눈, 코, 인중을 지나 아래로 흘러내리더니 황금빛 응결체가 되어 가슴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 응결체에서 발하는 황금빛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가슴속이 더 없이 시원해지며 의식적으로 숨을 쉬지 않아도 저절로 호흡이 이루어졌다.

가슴에 자리 잡은 황금빛 결정체에서 투사되는 빛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며 뱃속에 들어있는 모든 장기들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아래로 내려 갈수록 붉은색으로 변했다. 붉은색 빛의 기둥이 소년의 아랫배 단전 깊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기둥이 장작불이 되더니 단전에서 붉은 용광로가 되어 끓어올랐다.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 한 순간, 갑자기 모든 감각이 소멸되어 버린 듯 용광로의 불길도 가슴속의 황금빛 결정체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다만 지극한 평화로움만이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그 평화로움 속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투명한 관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관은 유리보다 더 단단한 수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차가운 수정 얼음관은 너무도 단단하여 어떠한 물체로도 부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 그런데 그 관속에 발가벗은 어린아이 하나가 웅크린 채 모로 누워있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냉동상태로 차가운 수정 얼음관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만 그 아이의 정수리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촛불 같은 빛이 그나마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아이가 불쌍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누워있는 그 아이가 너무 애처로웠다. 소년은 속으로 안타깝게 외쳤다.

(― 누가 저 아이를 좀 도와주세요! 얼음관 속에 갇혀있는 저 아이를 좀 구해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를 깨우기 위해 관을 잡고 흔들기라도 하면, 그 바람에 미약한 정수리의 촛불이 훅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촛불이 꺼져버리면 그 아이의 숨도 끊어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관은 너무 단단하여 어떤 물체로도 부술 수도 없을 것 같지만, 행여 그것을 부수고자 조그만 충격이라도 가하면, 그 순간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생명의 촛불은 여지없이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가 너무 불쌍했다. 너무 애처로워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저 아이를 구해주세요.)

그런데 저 불쌍한 아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소년은 수정 얼음관에 갇혀 있는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 소년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 아이는 바로 소년 자신이었다. 그 아이는 이제까지 한 번도 돌보지 않은 소년 자신의 어린 영혼이었다.

(― 아! 안 돼! 누가 좀 도와주세요. 얼음관에 갇힌 나를 좀 구해주세요. 차가운 수정 얼음관에 갇혀 내 영혼이 죽어가고 있어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아! 나는 내 영혼이 저렇게 차가운 얼음관에 갇혀 고통 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오고 있었구나! 내 영혼이 저렇게 고통 받고 있는데도 이제까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 하늘과 땅과 이 우주의 만물을 창조한 절대자이시여! 앞으로는 그 어떤 순간이 닥치더라도 내 영혼을 돌보겠나이다. 저 불쌍한 내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 이 순간, 저 미약한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당신의 고결한 숨결을 저 아이에게 불어넣어 주십시오.)

걷잡을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아! 기도가, 갈구가 이루어지는가! 아이의 정수리에서 금방 꺼져버릴 것 같던 생명의 불꽃이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 영혼을 주관하는 창조주이시여! 저 아이에게 힘을 주십시오. 차가운 저 수정관을 깨치고 나올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이의 숨결을 타고 하얀 달빛이 뿜어져 나왔다. 차가운 수정 얼음관이 내부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정수리에서 점점 자라난 신성의 밝은 빛이 차가운 수정 얼음관을 안에서부터 녹여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웅크려 있던 아이의 작은 손에 달린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발가락도 꼼지락거렸다. 아이가 누운 채로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차가운 수정 얼음관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아이가 팔을 들어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순간, 그렇게 단단하던 수정 얼음관이 순식간에 부서져 내렸다. 아이가 일어나 몸에 묻은 물기와 수정 얼음조각을 툭툭 털어내었다. 아이는 마치 아주 편안한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 눈물은 기도와 갈구를 들어주신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 하늘과 땅과 이 우주의 만물을 창조한 절대자이시여! 이제부터는 내 영혼을 돌보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내 영혼을 돌보지 않는 시간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이제까지 소년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가슴 벅찬 환희와 감격의 눈물이었다.

*

소년은 가만히 눈을 떴다. 눈물 속에 비친 세도나의 하늘은 여전히 푸른 기운이 감도는 시린 달빛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달빛은 산을 올라올 때 느꼈던 그 달빛이 아니었다. 이제 그 달빛은 신성의 빛이 내리는 찬란한 은총이었다.

소년은 정수리 백회혈을 타고 내리는 은은하고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언제 다가왔는지, 소년의 뒤에서 대장이 무릎을 꿇고 서서 소년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고 있었다. 손바닥이 정수리에 직접 닫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대장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대장의 손이 머리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소년의 어깨 위에 머물렀다. 어깨를 타고 들어온 하얀 빛이 가슴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소년이 눈물에 얼룩진 얼굴로 대장을 돌아보았다.

― 빛을 보았어. 신성의 밝은 빛을 보았어. 어린 내 영혼을 보았어.
― 그래. 이제 너도 신성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어. 네 마음의 눈으로 본 그것이 우리 영혼 속의 참된 자아야. 아무나 체험할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야.

준하의 목소리는 낮고 깊고 길게 울렸다. 달빛은 여전히 맑고 푸른 기운으로 붉은 바위를 적셨다. 산 아래로 보이는 마을도 달빛에 흠씬 젖어 있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기운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지극한 조화가 언어를 지워버린 듯 두 사람은 말없이 붉은 바위산에 앉아 있었다.

벌써 두 시간은 더 지난 것 같았다. 격렬한 감동의 순간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기영의 가슴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기영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준하가 먼저 말했다.

― 먼 길을 와 줬구나.
― 왜 그랬어? 이렇게 밝은 신성의 빛 속에 사는 네가 왜 그랬어?

준하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기영의 입에서 갑자기 안타까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울음이 배어들었다. 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르고 시린 달빛만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한동안 산 아래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던 준하가 드디어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손나영을 통해 박사님의 죽음의 진상을 알았을 때, 비록 그녀에게는 용서하라고, 그들에게 연민을 가지라고 말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복수심에 사로잡힌 내 마음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어. 눈을 감기만하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그래서 무간암을 찾았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스무 하루 동안 단식을 하며 하늘에 기도했어.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는 내 생명을 아예 거두어 달라고. 그런데도 하늘이 나의 생명을 거두지 않는다면 복수가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겠다고. 그런데 하늘은 내 생명을 거두지 않았어. 나는 그때 결심했어.

― 그래서 최경호와 박형기를 도구로 삼았니? 유철주를 포섭했어? 신경민은 또 어떻게 끌어 들였어? 손나영을 나에게 보냈어? 유지연을 박형기의 여자로 만들었니? 박영애를 최경호의 여자로 만들었어? 심지어 검사와 변호사, 용훈이와 나까지 이용하고……. 너 정말 나쁜 친구구나!

기영의 목소리가 종내에는 울먹이는 소리로 변했다. 홍한일 박사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이미 예상했지만, 그러나 정작 믿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라도 부정하고 싶었다. 강성모 변호사의 추리와 용훈의 판단이 틀리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 변명하지 않겠어.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어. 내일 나는 이곳 세도나를 떠나. 떠나기 전에 와 줘서 정말 고마워.
― 뭐라고? 또 어디로 갈 건데?

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준하가 무겁게 입을 열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낮은 여음으로 세도나의 붉은 바위산에 메아리처럼 길게 울렸다.

― 또 다른 참회의 땅을 찾아가야지.

달빛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도나는 그 달빛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달빛 속을 걸어 함께 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오면서 기영의 가슴에 언젠가 무간 스님이 했던 말이 맥놀이 종소리처럼 울렸다.

(― 보아하니, 네 놈이 몇 번은 죽고, 몇 사람은 죽여야 제대로 된 홍익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지금 네 속에는 분노와 복수심이 일렁거리고 있다. 네 속에 숨어있는 분노와 복수심을 버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홍익의 길은 찾을 수가 없다.)

기영은 곧바로 떠나기로 했다. 준하의 말대로 또 다른 참회의 땅을 찾아가는 외롭고 슬픈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고고한 달빛에 젖은 세도나의 바위산 도로를 운전하여 내려오면서 기영은 가슴이 울컥했다.

어쩌면 준하와 함께 있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미 대륙을 횡단하여 이곳 세도나까지 왔었다. 그러나 없었다. 준하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 볼 수 없었던 말이 그때서야 울음소리가 되어 눈물로 번져났다.

(― 그 소녀는 어디에 있니?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했던 그 소녀는 지금 어디에 있니?)

OUTRO

다시 2년 후, 미국 뉴욕.

기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아발견과 신성의 원리에 입각한 교화수단으로서의 교육프로그램의 체계화. 기영이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세도나에서 느낀 그 신성의 빛이 이제까지 기영의 관념 속에만 머물고 있던 생각을 구체화시켰다.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창조에너지가 봇물처럼 흘러넘쳤다. 기영의 연구 성과도 차츰 결실을 맺어가기 시작했고, 매일의 일상에서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3년간의 유학 기간도 거의 끝나고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기영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준하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를 읽는 동안 기영은 가슴이 저려왔다. 꽤 긴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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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

그날 밤, 네가 떠난 후, 나는 네가 신성의 빛을 보았던 그 붉은 바위산으로 다시 올라갔다. 천고의 풍화를 간직한 그 바위산은 깊은 적막의 눈빛으로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산 아래 도시는 여전히 달빛에 흠씬 젖어 있었다. 하늘에는 그 달빛보다 더욱 푸르고 시린 달빛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푸르고 시린 달빛 강물보다도 그곳 세도나의 붉은 바위산에서 내가 흘린 참회의 눈물이 더 많을 것이다. 그곳 세도나에서 보낸 1년 동안, 나는 그 메마른 사막을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과 붉은 바위산에 내리는 푸른 달빛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새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는 내가 유일하게 신성의 빛을 잃어버렸던 시기였음을.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모든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고, 그 생명을 주관할 권리는 오직 하늘에게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때,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던 그 행위를 하늘은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그날, 네게 말한 것처럼, 그 다음날 나는 그곳 세도나를 떠났다. 세도나의 그 많은 눈물로써도 다 씻어내지 못한 피로 얼룩진 내 영혼을 정화하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었다. 그동안 아마존의 무더운 원시림과 남극해의 얼어붙은 빙하와 시베리아의 동토와 세찬 강풍이 몰아치는 히말라야의 고봉설산까지, 고행 순례하는 수도승처럼 이 지구의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새로운 참회의 땅을 찾았다.

아프리카! 부족과 인종간의 갈등과 종교분쟁으로 지금도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는 이 지구의 검은 대륙, 차마 신조차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를 포기하였다는 가열한 천형天刑의 땅,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안타까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척박한 재해의 땅!

나는 이 검은 대륙의 버려진 오지奧地에서 병들고, 굶주리고, 억눌리고, 핍박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신성을 밝히는 작은 손거울이라도 되고자 한다. 그래야만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한 그 시원始原의, 생명生命의, 신성神性의 빛 앞에 나아갔을 때, 그나마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 내 생애 마지막 참회의 땅에서, 친구 준하 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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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찍은 지 오래 돼, 그래서 색이 좀 바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그것은 메마른 사막 위, 곧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천막촌을 배경으로 소총을 든 흑인 민병대원과 젖가슴까지 드러낸 거의 나체에 가까운 흑인 원주민여자들, 그리고 앞줄에 마르고 야윈 앳된 흑인 소년소녀들이 함께 서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그 사진 중앙에 주인공처럼 서 있는 한 동양인여자!
피부색도 다르고 복장도 달라 금방 눈에 띄었다.
흰자위만 가득하게 보이는 깡마른 큰 눈 얼굴과 영양실조로 배가 볼록하고 팔다리갈비뼈만 앙상하게 남은 새까만 흑인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여자!
그녀는 회색 수녀복에 같은 색 수건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기영은 가슴으로 서늘한 찬바람이 쓸어내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단체사진이라 얼굴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그 수녀는 분명 소녀였다. 곧고 가지런한 이빨에 맑고 청순한 그 웃음은 지금까지 기영의 가슴 속에 여전히 어린 소녀로 남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햇볕에 약간 그을린 얼굴이 더 순결하고 아름다웠다.

사진 뒤에는 ‘아프리카의 어느 전쟁난민촌에서, 19××년 7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기영은 가슴을 관통하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눈물 한 방울이 사진 속 소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어른거리는 눈물 속에서, 단발머리 하얀 풀꽃 소녀가 물결주름을 걷고 나타났다. 소녀는 코스모스 핀 붉은 노을 강둑에 수줍은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소년은 자전거를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억새꽃 만발한 신작로 고갯마루 능선에서, 소녀가 까만 교복스커트를 펄럭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환하게 웃음 띤 얼굴로 코스모스 꺾어든 손을 흔들며 그 봄날 우체국 앞 아지랑이처럼 너울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 사진에 대해 준하도, 그 소녀도 아무 말이 없었다.

*

그 후 2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영은 준하와 그 소녀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기영은 알 수 있다. 대장과 소녀가 그 가열한 분쟁의 땅에서 지금도 함께 써 나가고 있을 순수한 영혼의 일기를. 또 들을 수 있다. 대장과 소녀가 지금도 함께 연주하고 있을 숭고한 희생과 봉사, 그 아름다운 참회의 영혼 교향곡을.

결국 그때 준하가 작곡하여 연주 지휘한 운명의 살인 교향곡은 그들의 신성에서 우러난 생명의 영혼 교향곡이 탄생하기 위한 성스러운 진통이었다. 하늘이 그들의 신성을 완성하여 그 참뜻을 구현하도록 이 땅 위에 베풀어 놓은 경건한 축복이었다.
 

◇ 

서쪽 지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스러지고 있었다.
빛나는 갈기의 얼룩말은 고개를 늘어뜨리고
눈물에 잠긴 눈을 내려 깔았다.
발아래에는 끝까지 따라와 방금까지 함께 서 있던
마지막 일행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검은 구름이 대지를 덮었다.
찰나의 섬광, 지평선을 가르고 천둥이 울렸다.
또 하나의 섬광, 하늘을 갈랐다.
더 큰 뇌성, 지축을 흔들었다.
우두둑, 굵은 소나기가
메마른 대지 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이 비가 조금만 더 일찍 내렸더라면,
일행 모두가 쓰러지진 않았을 터.
그러나 이제 그는 혼자였다.
고개를 젖히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을 벌리기만 해도 빗물이 입안에 고여
그는 이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입술을 미소로 닫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었다.
스스로 호흡을 멈추었다.
호흡을 하지 않는 데도 가슴은 더없이 시원했다.
귀에, 그가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아니,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어머니의 자궁 속 탯줄을 타고 울리던
노랫소리가 들렸다.

*

하늘이시여!
우리들이 숨 쉴 수 있는
무한한 공기를 주신 것은
당신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땅이시여!
우리들이 걷고, 뛰놀고, 달릴 수 있는
더 넓은 초원을 주신 것은
당신의 풍요로운 축복입니다.

종족들이여!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대들이 나를 위해 정성을 베풀어 주신 것은
우리들의 소중한 나눔입니다.

하늘과 땅과 종족들의 사랑 속에 태어난
내 생명이여!
이제 원래 그대가 존재했던
시원始原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나의 소중한 생명이 숨 쉬고 자랐던
내 생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돌아가더라도,
이렇게 아름다웠던 나의 생의 얘기는
이 땅 위에 소중히 기억될 것입니다.

*

노랫소리가 멈췄다.
빗줄기는 여전히 그의 등줄기 위에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호흡이 멎었지만,
그 몸은 비가 내리는 초원 위에
석상처럼 굳어진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 초원 위에는
또 다시 이름 모를 풀과 꽃과 나무들이
새로운 생명의 축복 속에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종족이 나타나
생의 환희를 즐길 것이다.

-끝-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제1회부터 마지막 54회 연재까지 전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지금까지 <살인 교향곡>을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저의 신성에서 우러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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