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50회 <거인의 초상>
Symphony in C minor ‘Fate’

거인의 초상

박형기는 유지연의 통장으로 받은 돈 10억 원 중 5억 원을 최경호의 내연녀인 박영애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용훈은 여전히 준하가 범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준하의 개인적인 복수심이 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용훈의 이러한 확신은 어디에서 나올까? 최경호와 박영애가 아직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오후에 다시 속개된 공판.

― 검사는 피고인 김준하에 대한 신문을 하십시오.
곽 판사의 북소리가 묵직하게 기영의 가슴에 닿았다.

이제 공판은 준하에 대한 마지막 신문만을 남겨놓고 있다. 준하는 이 마지막 신문에 어떤 태도를 보일까? 용훈의 마지막 꽹과리는 어떤 소리를 낼까? 꽹과리 소리가 어떻게 울리던 징소리에 용서를 실어야 한다. 징소리에 사랑을 실어야 한다. 용서와 사랑을 실은 징소리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려야 한다.
 

김용훈 검사(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피고인은 고 홍한일 박사를 아는가요?
답 : 예.
문 : 피고인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답 : 저의 부모님께서 나의 육체적 생명을 주셨다면, 홍 박사님은 나의 정신적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제가 가장 존경했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입니다.

문 : 피고인은 전회 공판에서 있었던 증인 손나영의 증언을 들었지요?
답 : 예.
문 : 손나영이 M룸살롱에서 있었던 홍한일 박사의 사건을 피고인에게 모두 얘기하였다고 증언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인가요?
답 : 예. 이 법정에서 증언한 것보다 더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문 : 또한 손나영이 김인환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도 피고인에게 모두 얘기했다는데, 그것도 사실인가요?
답 : 예, 그것도 이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보다 더욱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문 : 피고인은 고 홍한일 박사의 죽음이 손나영이 말한 M룸살롱 마약 사건과 김인환의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답 : 생각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박사님의 죽음은 김인환이 사건을 조작하여 만든 무형의 살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 피고인은 김인환의 사건 조작 때문에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고 소년원에 수감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답 : 생각이 아니라, 그것은 사실입니다.
문 : 피고인은 김인환의 사건 조작 때문에 대학을 제적당하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답 : 그것 또한 생각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곽 판사 : 본 법정의 심리는 피고인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나타난 피고인의 행위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추구합니다. 검사는 피고인의 생각을 묻는 신문을 지양하고 사실관계에 대하여 신문을 해 주십시오.
징소리를 울려 제지하여야 할 꽹과리 소리를 북소리가 미리 울려 제지시킨다.

그런데 준하는 용훈의 의도를 모르는 것인가. 결정적인 살인 동기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용훈의 의도를 정말 모른단 말인가. 알 것이다.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준하는 용훈의 의도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고 있다. 오히려 용훈의 의도보다 더 나아가고 있다. 징소리를 울려 경각심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북소리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꽹과리 소리는 더욱 흥이 난다.

문 : 그렇다면 김인환의 사건 조작은 피고인의 꿈과 이상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신 홍한일 박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되지요?
답 : 나의 꿈과 이상은 김인환의 사건 조작과 같은 일로 흔들릴 만치 가볍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을 더욱 견고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의 죽음은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워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고통이 뼛속까지 사무쳐 원통했습니다.

문 : 그 뼛속까지 사무친 원통이 피고인의 복수심을 유발하지 않았나요?
답 : 그렇습니다.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20××. ×. ×. 24:00경 상피고인 박형기와 함께 김인환이 투숙하고 있던 마린시티호텔 804호에 침입하여 김인환을 살해하였나요?
답 : 그 부분에 대하여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 이상입니다.

흥겨운 꽹과리 소리가 멈췄다. 징을 울려 장단을 맞춰야 할 차례. 징소리는 여운이 길다.
 

박기영(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손나영은, 피고인이 ‘홍익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문 : 손나영은, 피고인이 ‘홍익하는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문 : 손나영은, 피고인이 ‘홍익하는 사람은 항상 그 속에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문 : 손나영은, 피고인이 ‘홍익하는 사람은 신령스러운 사람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문 : 손나영은, 피고인이 ‘홍익하는 사람은 신성의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문 : 손나영은, 피고인이 ‘용서하지 못하면, 언제나 증오와 복수심에서 살게 되고, 자애로운 신성의 빛도 없어진다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용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문 : 피고인은 홍익하는 사람입니까?
답 : 홍익하는 사람이 되고자 몸과 마음을 다하여 수행하였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수행할 것입니다.
― 이상입니다.

― 피고인 박형기의 변호인은 신문해 주십시오.

강성모 변호사(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피고인은 홍익하는 사람입니까?
답 : 그 질문에는 조금 전에 대답하였습니다.
문 : 그러면 홍익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입니까?
답 : 진정으로 홍익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입니다.
문 : 홍익하는 사람은 거짓된 말을 하지 않지요?
답 : 거짓말은 홍익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문 : 본 변호인은 피고인이 진정으로 홍익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홍익하는 사람의 정신과 양심으로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고인은 박형기에게 홍익문화연구소 사무처장직을 제의할 때, 정말 박형기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고자하는 순수한 목적에서 제안을 하였습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고인은 유지연과 박형기의 교제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없습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고인은 손나영의 본 법정증언에 대하여 어떠한 사전지시나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없습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고인은 신경민과 전연 모르는 사이입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고인은 신경민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습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고인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일련의 메시지를 언론에 제보하는 메시지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정말 알지 못합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이 일어나기 직전, 밤 23:00경에 박형기의 집에 간 적이 없습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이 일어난 날 밤, 박형기와 함께 마린시티호텔 804호실에 간 적이 없습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위 호텔에서 피살된 김인환은 피고인에 의해 직접 살해된 것이 아닙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박형기가 김인환의 살해에 직접 가담하거나 이를 방조한 사실이 있습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 피고인이 본 변호인의 신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은 만약 피고인이 대답을 하면 홍익하는 사람의 정신과 양심에 반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답 :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 이상입니다.

― 재판장으로서 피고인 김준하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고자 합니다. 피고인은 자신이 진정한 홍익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습니까?
― 아닙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홍익하는 참사람이 되기 위하여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바칠 것입니다.
― 검사나 변호인은 더 이상 제출할 증거가 있는가요? 그러면 이상으로 모든 증거절차를 마치겠습니다. 검사는 구형해 주십시오.

이제 굿판을 걷어야 할 때, 마지막 꽹과리와 징소리를 울려야 한다. 준하가 바랐던 꽹과리 소리였을까? 징소리는 또 어떻고? 그가 원하는 소리였던, 아니었던 간에 징소리가 굿판을 망쳐놓지 않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자.

용훈은 과연 어떤 구형을 할까. 용훈이 어떤 구형을 하더라도 가장 절친한 친구를 처벌해야 하는 그의 고통을 이해하자. 용훈이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김용훈 검사의 구형

― 구형하기 전에 먼저 이 사건 공판 과정에서 드러난 고 김인환 검사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하여 재판장님과 여기 이 법정에 계신 방청객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재판을 애정으로 지켜봐 주신 모든 국민들께 같은 검사의 입장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진심어린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자칫 묻혀 질 뻔했던 오도된 권력에 의한 불법행위가 같은 검찰의 적법절차에 의하여 시정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검찰의 명예를 위하여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저희 검찰은 이를 계기로 더욱 자성하여 적법절차에 의한 인권보장을 위하여 더욱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구형하겠습니다.

먼저 피고인 박형기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피고인 박형기는 이 사건 범행 현장에 상피고인 김준하와 함께 있었다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다만, 범행 현장에 있었지만 피고인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고, 김준하의 범행을 예상하지도 못했다고 하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미국으로 도주를 기도하였던 점, 체포된 당일 피고인과 내연관계에 있는 유지연의 통장에 10억 원이라는 거액이 입금되었고, 이 돈은 피고인이 범행 대가로 받은 도피자금으로 보이는 점, 피고인이 김준하와 홍익문화연구소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는 점, 범행 도구로 사용된 칼이 같은 연구소 옥외 연못에서 발견된 점 등 여러 증거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이 김준하와 함께 처음부터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한 사실은 분명합니다.

또한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에 대하여 무죄를 항변하고 있을 뿐 개전의 정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에 대하여는 중형으로 처단함이 마땅합니다. 다만,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을 실행할 당시 가담 정도를 살펴볼 때, 같은 공동정범이지만 피고인의 가담 정도는 오히려 종범의 성격이 강하다 할 것이므로 본 검사는 이를 참작합니다. 이에 본 검사는 피고인 박형기에 대하여 징역 15년을 구형합니다.

다음으로 피고인 김준하에 대하여 봅니다.
먼저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에 대하여는 같은 공범인 상피고인 박형기가 자백하고 있고, 범행에 사용된 범행 도구가 피고인이 근무하는 홍익문화연구소 옥외 연못에서 발견된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 할 것입니다.

또한 피고인의 과거가 이 사건의 피해자인 고 김인환의 권력을 이용한 불법행위에 의하여 유린되었던 점, 특히 피고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고 홍한일 박사의 죽음은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을 실행하였다는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따라서 피고인이 유죄라는 점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은 고 홍한일 박사의 사건이 있었던 시점부터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로써 이미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피고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공범으로 여겨지는 누군가의 메시지를 통하여 검찰과 심지어 이 사건을 심리중인 법원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또한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은 지극히 사적인 보복살인이라는 점에서 그 죄질의 불량성은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은 피해자의 목이 절단될 정도로 깊은 자상을 입힌 그 수법이 매우 잔인하고 가혹한 방법에 의한 살인입니다.

그런데도 피고인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홍익하는 사람이라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궤변하며 이 사건 범행을 은폐하려 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법정에 계신 방청객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웃고, 울며,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나라는 법치주의 국가입니다. 이러한 법치국가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보복이 허용될 수 없습니다.

사적 복수심에 의한 보복살해는 적법절차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법치국가의 가장 치명적인 해악입니다. 물론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은 법치국가에서의 오도된 권력의 횡포가 일부 원인이 된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적법절차를 통하여 피고인 본인의 억울함이나 고 홍한일 박사의 누명을 시정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피고인은 이러한 적법절차를 무시하고 사적인 복수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수를 위하여 오래 전부터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이 사건 범행을 계획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 사건 피고인의 범행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심에 기인하고 있으며 그 수법 또한 매우 잔인하고 가혹합니다.

그런데도 피고인은 전혀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홍익하는 사람이라는 추상적인 궤변으로 오히려 법정을 모독하고 있고, 지금도 공범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통하여 추가 범행을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피고인에 대하여는 법이 정하는 최고의 중형으로서 처단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에 본 검사는 어떠한 경우라도 허용될 수 없는 사적인 보복살인으로 법치국가 이념의 근간을 해치고자 하는 피고인에게…….

용훈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겨 놓고 있다. 우리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맡은 역할은 그의 말대로 최고의 악역이다. 용훈의 이 고통을 준하는 알고 있을 것이다.

기영은 준하와 용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하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용훈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 보았다. 두터운 안경 너머에 고인 눈물을 감추고자 함이리라. 용훈의 입에서 마지막 한 마디가 떨려 나왔다.

― ……사형을 구형합니다.

― 피고인 박형기의 변호인은 변론해 주십시오.

강성모 변호사의 최후 변론

― 피고인 박형기가 이 사건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는 이제까지의 공판 과정에서 입증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설사 피고인의 혐의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 사건 행위는 적극적 가담자가 아니라 소극적 방조자 내지는 종범의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참조하시어 피고인에게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 피고인 박형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없습니까?

박형기의 최후 진술

― 재판장님,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호텔에 따라갔다가 사건에 연루되었을 뿐입니다.

― 피고인 김준하의 변호인은 변론해 주십시오.

박기영 변호사의 최후 변론

― 이 사건에서의 직접적인 증거는 상피고인 박형기의 자백과 범행에 사용된 도구입니다. 그러나 박형기가 체포된 당일 내연관계에 있는 유지연의 통장에 10억 원이 입금되었는데도 이 돈의 성격을 부인하고 있는 점 등 이제까지의 공판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정황들을 살펴볼 때 박형기의 진술의 신빙성은 마땅히 배척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상피고인 박형기의 자백이 피고인 김준하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만약 피고인 김준하가 범인이라면 범행에 사용된 도구를 자기가 현재 근무하는 연구소 옥외 연못에 은닉할 정도로 허술하게 증거를 인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사건에는 진범으로 추정되는 최경호의 머리카락이 피살자의 사체에서 발견되었고, 박형기가 유지연의 계좌를 통해 받은 돈 10억 원 중 5억 원이 최경호와 내연관계에 있는 박영애의 통장으로 이체되었다는 점 등 오히려 피고인의 범행이 아니라는 증거가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그러나 설사 피고인의 죄책이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이 사건이 발생한 동기가 불법권력에 의하여 유발된 점, 피고인은 오히려 이러한 불법권력에 의한 희생자인 점, 특히 피고인의 행위는 이 시대의 양심으로 존경받고 있던 고 홍한일 박사의 죽음이라는 공분에 의한 것이지, 피고인 개인의 사적인 복수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시어 피고인에게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기타 상세한 증거관계와 정상참작사유에 대하여는 별도의 변론요지서를 제출하겠습니다.

― 피고인 김준하, 이제 공판은 모두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요?
 

김준하의 최후 진술

― 먼저 지금까지 재판을 공정하게 진행해 주신 재판장님 이하 배석판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불법권력이 아닌 적법절차로서 맡은 바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주신 김용훈 검사님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변호를 위하여 정성을 기울여 주신 박기영 변호사님과 지금 이 법정의 방청석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저를 아껴주고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제 영혼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는 돌아갑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나 숨 쉬고 살아왔던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제 기억 속에 각인되어 제 영혼과 함께 할 것입니다. 돌아가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고. 내가 태어나 살아온 내 생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판은 끝났다. 준하는 자리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반듯하게 앉은 모습이 영원히 깨지지 않을 거대한 석상처럼 보였다. 여유롭고 당당한 그 모습은 위대한 거인의 초상 같았다. 고개를 숙여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는 박형기와는 대조적이었다. 그것도 잠시, 재판장이 일어서고, 우르르 법정을 빠져나가는 방청석은 술렁거렸다.

기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보내는 것인가.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구치려 했다. 안 돼. 그럴 수는 없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자.

기영은 소송서류가 든 가방손잡이를 단단히 거머쥐고 속으로 외치며 일어섰다. 흐르는 눈물을 가슴 속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없었다. 준하를 그토록 사랑했던 그 소녀는 없었다. 아니, 기영이 그토록 사랑했던,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던 그 소녀는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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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제51회 <변론요지서>은 2019. 10. 7.(월) 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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