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46회 <위기의 순간>
Symphony in C minor ‘Fate’

제발, 엘리베이터가 층층마다 자주 멈추기라도 해야 할 텐데. 방금 올라갈 때는 느림보 유람선이라고 투덜대던 기영이었다. 기영은 있는 힘을 다해 계단을 뛰어 내려오면서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

같은 대상을 두고서도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마음이 이렇게 다르구나.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가볍구나. 겨우 10층까지밖에 내려오지 않았는데, 숨이 가빠오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안 돼. 힘을 내. 손나영의 생명이 걸려있어.

4층, 3층, 다리가 풀렸다. 안 돼. 멈추면 안 돼. 놈들을 잡아야 해. 2층, 1층, 숨이 턱에 찼다. 안 돼. 절대 멈추면 안 돼. 지하 1층,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엘리베이터 숫자를 바라보았다. 손나영이 탄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것일까. 기영은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빼곡하게 들어선 차들 사이에 저만치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 둘이 여자의 양 팔을 끼고 있었다. 등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릿결로 보아 여자의 뒷모습은 틀림없는 손나영이었다.
 

세 사람이 주차된 검은 승용차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시동이 걸리는 소리와 동시에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주차장에서 손나영을 구출하기란 틀린 일이다. 검정색그랜저 8508, 놈들이 탄 차의 번호를 확인한 기영은 다시 1층 계단을 향하여 뛰었다.

평소 운동이라도 좀 열심히 할 걸. 다리가 풀어져 무릎이 곧 꺾여버릴 것만 같았다. 숨도 금방 턱까지 차올랐다. 1층, 제발 차가 아직 빠져나가지 않았기를……. 도로변에 세워 둔 차는 그대로 있을까. 혹시 불법주차라고 견인차가 와서 끌고 가 버린 것은 아닐까.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다. 기영은 로비를 가로 질러 도로로 뛰어나왔다.

놈들이 탄 차가 주차장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면 도로변에 세워둔 기영의 차로 주차장 출구를 막아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지하주차장 출구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검정색그랜저 한 대가 막 빠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8508, 놈들이 탄 차였다. 기영은 빌딩 앞 도로변에 주차시켜 둔 제 차로 뛰어갔다.

기영이 차에 올라 시동을 켜는 사이 놈들의 차는 좌회전 깜빡이등을 켜고 이미 도로 1차선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놓치면 안 된다. 기영은 깜빡이등도 켜지 않은 채 1차선으로 진입하였다. 놈들의 차 뒤에 이미 다른 차가 한 대 따르고 있었다. 기영은 그 차 뒤로 바짝 다가붙었다.

혹시 미행을 눈치 챈다면 차 안에서 손나영을 해칠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놈들의 차를 세워 손나영을 구출하는 방법이 없을까. 어느 새 놈들의 차는 옛 시청 앞 넓은 광장교차로 근처로 접어들어 있었다. 교차로 건너편에 새청사로 이전해버리고 이제는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우중충한 옛 시청 건물이 커다란 공룡처럼 어둠 속에 길게 누워 있었다.

놈들의 차가 우회전 깜빡이등을 넣고 2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하고 있었다. 기영도 2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하여 이번에는 그 차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차안에 있는 손나영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앞차는 짙은 선팅이 되어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다. 마주보는 광장교차로 신호등에 적색 신호등이 들어왔다.

앞차가 멈췄다. 기영도 따라 멈췄다. 신호를 받지 않고 바로 우회전하여 영도다리 쪽으로 가지 않고 좌회전 깜빡이등을 켜고 멈춰 선 것으로 보아 놈들은 왼쪽 부산역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사고를 내자. 신호가 바뀌고 출발하면 교차로 중간 지점에서 저 차를 들이받아 버리자. 그러면 차가 뒤엉키며 놈들이 도망하지 못할 것이다. 일부러 교통차고를 내고 교통경찰이 오면 그때 도움을 요청하자.
 

기영은 속으로 준비를 하고 안전벨트를 점검했다. 용훈에게 알려 도움을 구해야 한다. 기영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폴더를 열고 용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 어디야?
용훈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 옛 시청 앞 교차론데, 놈들을 뒤쫓고 있어. 검정색그랜저, 8508, 놈들의 차야.

그때 황색 신호등이 들어왔다. 앞차의 브레이크 램프가 꺼졌다. 푸른 신호등, 앞차가 출발했다. 기영도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 순간, 놈들의 차가 갑자기 우회전을 하며 영도다리 쪽으로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앗!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태였다.

― 놈들이 영도다리를 건너고 있어.

기영은 깜짝 놀라 소리치며 엉겁결에 휴대전화를 조수석에 던지고 맹렬하게 가속페달을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우회전 깜빡이등을 넣을 겨를도 없었다. 끼이익, 3차선에서 막 출발한 차가 급정거를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추돌사고를 면하며 기영은 교차로를 벗어났다. 그러나 앞차는 이미 영도다리 쪽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들 사이에 섞여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놈들이 미행을 눈치 챈 것 같았다. 교차로 중간에서 추돌사고를 내겠다는 기영의 의도는 빗나가고 말았다. 오직 앞차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영도다리를 지나 몇 번이나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을까?

차는 어느 새 번잡한 시내 도로를 벗어나 차량통행이 뜸한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도로변을 따라 늘어선 소나무 숲 사이 오른쪽 아래로 검은 바다가 보였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쯤인지 전연 알 수 없었다. 생전 처음 와 보는 영도의 지리는 아예 까막눈이고 이미 자정이 지난 깜깜한 밤중인데다 오로지 놓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앞차의 꽁무니만을 쫓다보니 주위의 지형지물을 전혀 보지 않고 온 탓이었다.

기영을 따돌렸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속도를 줄인 것일까? 갑자기 앞차가 느긋하게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용훈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기영은 조수석에 던진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휴대전화는 조수석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 손이 닿지 않았다. 다행이 폴더는 그대로 열려 있었다. 용훈이 전화를 끊지 않았다면 전화는 그대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요행이라도 바라자. 기영은 조수석 아래 휴대전화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 영도로 들어왔는데, 어디인지는 모르겠어. 해안절벽 2차선 도로야. 도로변을 따라 소나무 숲이 보여.

순간 앞차가 다시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기영은 덩달아 가속페달을 밟았다. 꼬불꼬불한 2차선 해안절벽 도로라 까딱 잘못하다가는 차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판이었다. 도로를 벗어나면 끝도 모를 절벽아래 바다가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다. 너무 긴장한 탓에 오직 앞만 바라보았다.

기영은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번갈아 급하게 밟아가며 최대한 속도를 더해 따라붙었다. 위태로운 추격전에 이마와 손에서 저절로 땀이 났다. 그러나 결국 앞차는 꼬부라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말았다.
 

아아, 결국 놓치고 마는가! 소나무와 관목 숲이 우거진 해안절벽 도로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도로였다. 뒤에서도, 맞은편에서 오는 차도 없었다. 이렇게 어둡고 인적이 드문 도로에서 손나영 같은 연약한 여자 하나를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린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큰일이다. 이미 녀석들은 손나영을 해쳤는지도 모른다.

기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바심에 심장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제법 경사가 급한 오르막 도로였다. 왼쪽으로 꺾어지는 오르막 산굽이도로를 막 도는 순간, 기영은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검은 물체를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급제동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타이어 타는 고무냄새가 확 풍겼다. 검은 형체 앞에서 차가 가까스로 멈췄다고 느낀 순간, 쾅, 순식간에 운전석 창문이 부서져 내렸다. 기영은 반사적으로 팔로 얼굴을 감쌌다.

― 이 개자식! 내려!

기영이 운전석에서 머리를 드는 순간, 자루달린 망치를 든 한 녀석이 부서진 창문가에서 망치로 위협하며 소리쳤다.

― 야, 이 개새끼야! 내리라는 말 안 들려?

녀석이 이번에는 망치로 운전석 옆문을 내려찍으며 소리쳤다. 엉겁결에 팔로 얼굴을 감쌌지만 깨진 유리파편에 맞은 얼굴이 따끔거리며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찌그러진 운전석 문이 열리고 놈이 팔을 뻗어 기영의 멱살을 잡고 끌었다.

망치를 들고 있는 폭력배 녀석들에게 반항을 해봤자 소용없는 일. 이미 늦었다. 그래, 그때도 그랬었지. 그때 그 골목길에서도 소년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었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도 두렵지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영은 놈의 멱살잡이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그때서야 기영은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기영이 급정거를 하게 한 검은 물체는 이제까지 그가 쫓고 있던 바로 그 차였다.

앞서 간 놈들은 모퉁이를 도는 산굽이도로 중앙에 일부러 차를 정차해 두고 기영이 급정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퉁이를 막 돌면서 기영이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은 순간, 상황은 이미 종료되고 만 것이었다.

기영을 끌어내린 놈이 망치를 내려놓고 기영의 목을 뒤에서 감아 오른쪽 옆구리에 잭나이프를 들이대었다. 주걱턱, 그때 골목에서 소년에게 린치를 가했던 바로 그 놈이었다. 저만치 또 한 녀석이 손나영의 입을 틀어막고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마른 남자, 아, 그 해골, 그때 사창가에서 겪었던 수모가 새삼 떠올랐다. 해골이 주걱턱이 바닥에 내려놓은 망치를 주워들고 기영에게 걸어왔다.

― 이게 누구신가? 그래, 박기영 변호사라고 하셨나? 그래, 잘됐어. 계집 혼자 황천으로 보내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황천길 동무를 만들어 주게 되어 다행이야.

기영은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무덤에서 막 튀어나온 뼈 같은 이 해골, 아, 이 자를 여기에서 다시 만나다니! 그러나 침착하자.

― 원하는 게 뭐야? 아직도 정해현의 똘마니노릇이나 하고 있군. 이러고도 네놈들이 무사할 줄 알아?

약을 올리자. 시간을 끌어야 한다. 어쩌면 용훈의 연락을 받고 경찰이 추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 뭐라고? 똘마니라고? 하하, 이 새끼가 저 세상으로 갈 것 같으니까 미리 정신이 살짝 노는 것 같군. 곧 황천길로 갈 새끼가 주둥이는 살아서…….

해골이 들고 있는 망치로 기영의 아랫배를 힘껏 쳐올렸다. 기영이 고통을 못 이겨 허리를 폭삭 꺾자 목에 닿아있던 주걱턱의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해치우고 가야 합니다.
주걱턱이 무릎을 꿇은 기영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 그렇지. 잘난 변호사님, 여어가 어딘지나 아시능감요? 하하, 여어가 바로 그 유명한 태종대 자살바위라는데요. 쪼깨만 기다려주셔잉. 곧 이 자살바위에서 사뿐하게 밀어 황천으로 보내드릴게. 

태종대 자살바위? 기영도 그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태종대 바다전망대 중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다는 절경 중의 절경, 해안에서 가장 높은 바위절벽 전망대, 이곳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사람이 많아 속칭 ‘자살바위’라고도 이름 붙여진 곳.

해골이 기영의 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비록 운전석 창문은 깨져 내렸지만 여전히 시동은 걸려 있었다. 차가 조심조심 움직여 도로 가장자리에 설치된 가드레일을 찌그러뜨리고는 멈췄다.

해골의 말대로 이곳이 태종대 자살바위라면 저 가드레일만 벗어나면 차는 까마득한 바위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형체조차 제대로 남지 않을 것이다. 해골이 다시 차에서 내렸다. 해골이 뒤쪽에서 손나영의 목을 겨누고 있는 놈에게 손짓을 했다.

놈이 갑자기 손나영의 뒷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손나영이 비명소리조차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놈이 쓰러지는 손나영을 옆구리에 궤 차듯 안고 와 기영의 차 조수석에 태웠다.

놈이 이번에는 기영에게 다가와 기영의 아랫배를 주먹으로 힘껏 내질렀다. 극심한 통증에 기영은 다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놈이 다시 발길질로 기영의 가슴팍을 힘껏 내질렀다.

명치끝에서 불길이 확 치솟으며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의식조차 가물가물해졌다. 안 돼! 정신 차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 그날 그 골목길에서도 그랬다. 일어나 대들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놈이 축 늘어진 기영을 운전석에 태우고 있었다. 놈들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기영과 손나영을 기영의 차에 태워 바위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이른바 자살바위로 이름난 곳에서 자살로 가장하려는 것이다. 아니면 교통사고로 위장하려는 것이리라.

― 변호사님, 내일 신문에 틀림없이 요렇게 날겁니다. 박기영 변호사, 내연여와 함께 태종대 자살바위에서 의문의 투신. 하하하!

해골의 목소리가 절벽아래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섞여 꿈결처럼 몽롱하게 들렸다. 뒤에서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쿵, 차가 앞쪽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아, 이대로 죽는 것인가. 찔끔, 눈물이 솟았다. 허망했다.

허허허, 해골의 말처럼, 박기영 변호사, 내연여와 태종대 자살바위에서 심야에 차로 투신, 내일 석간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제목이 될지도 모르겠다. 삼류소설 같은 생각이 얼핏 들면서 눈물대신 허허허, 웃음이 터졌다.

― 어머, 변호사님? 악!

언제 깨어났는지 옆에서 손나영이 소리쳤다. 내려진 조수석 창문으로 해골의 주먹이 날아와 손나영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질렀다. 손나영이 짧은 비명과 함께 다시 털썩 기절하고 말았다. 기영은 체념한 상태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직 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 야, 뒷바퀴가 가드레일에 걸렸어. 차를 뒤로 빼 다시 한 번 들이받아.

조수석 옆에 서 있다가 손나영의 머리를 내지른 해골이 허리를 굽혀 차 밑에 깔린 가드레일을 살펴보고 뒤로 손짓하며 말했다. 헤드라이트가 뒤로 잠시 멀어져 갔다. 다시 한 번 들이받으면 속절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헤드라이트가 환하게 덮쳐오고 있었다.

쾅! 차가 충돌하는 소리가 났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아, 부질없는 생명이여!
이렇게 속절없이 떠날 것을!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기영이 타고 있는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탕탕탕,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총소린가? 감겨진 눈꺼풀 위로 환한 빛이 비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다닥,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 요란하게 차문을 여닫는 소리, 부아앙, 맹렬한 급발진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탕, 탕, 다시 한 번 총소리가 울렸다.
― 꼼짝 마. 경찰이다. 야, 거기 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최 경위, 그만둬. 인명구조가 먼저야!
엘리베이터 앞에서 계단을 앞서 뛰어 내려가며 외치던 형사. 박경일 경위라고 했었지.
― 앗! 변호사님, 위험합니다. 절대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계세요. 차 앞바퀴가 허공에 떠 있어요.

곧이어 들리는 박경일의 다급한 목소리에 기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바퀴가 허공에 떠 있다고? 그렇다면 기영과 손나영이 몸을 조금만 앞쪽으로 기울여도 차는 가드레일을 벗어나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조수석에 앉은 손나영이 그대로 기절해 있는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손나영이 놀라 비명이라도 지르는 순간 자칫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 쏠릴 수도 있을 터였다.

― 트렁크에 와이어가 있을 거야.
― 지금 찾고 있어.
최수환 경위라고 했었지.
― 우선 와이어로 차를 고정시켜 놓고 구조요청 해.
― 벌써 했어.

타타타타, 어디선가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둡던 하늘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뒤이어 구급차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견인차의 어지러운 불빛이 난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영이 탄 차가 뒤쪽으로 조금씩 끌려 나갔다.

― 변호사님, 괜찮으십니까?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박경일이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 기영은 발을 내딛었다.
아아! 살았구나. 이렇게 고마운 땅의 축복이라니!
 

기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손나영을 후려쳐 차에 실었던 녀석을 정복경찰 둘이 수갑을 채워 양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기영의 차 뒤에는 앞범퍼가 완전히 부서지고 보닛이 찌그러져 솟아올라간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기영이 들었던 충격소리는 놈들이 기영의 차를 들이받은 것이 아니었다. 놈들의 차가 후진을 하여 기영의 차를 막 들이받을 찰나에 때마침 달려온 박경일의 차가 그 차를 그대로 들이받아 버린 모양이었다.

기영이 들었던 후다닥, 하는 발자국 소리와 급발진 소리는 해골과 주걱턱이 급히 놈들의 차에 올라 도주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한 놈은 미처 차를 타지 못하고 최수환에게 체포된 모양이었다.

― 늦어서 미안해.
언제 왔는지, 용훈이 기영의 어깨를 툭 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손나영 씨 신병은 우리가 인수한다.

용훈이 119요원에 의해 구급차로 옮겨지고 있는 손나영을 가리키고는 돌아섰다. 그때, 그 짧은 순간, 기영은 보았다. 매정하리만치 사무적으로 말하는 용훈의 두터운 안경너머에서 글썽이는 눈물을. 그리고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내쉬는 안도의 한숨소리를.

― 변호사님, 걸을 수 있겠습니까? 구급차로 가시죠?
기영을 부축하고 있던 박경일이 말했다.
― 아니, 괜찮습니다.
― 그럼 경찰차로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그보다 담배 한 대만 주세요.

벌써 몇 년 전에 담배를 끊었지만, 팽팽한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 어이, 최 경위. 담배 하나 줘.
현장을 수습하고 있던 최수환이 다가와 담배 한 대를 빼어 불을 붙여 주었다.

기영은 담배연기를 깊이 한번 빨아들이고는 한숨을 쉬듯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방금 전 떨어질 뻔했던 가드레일이 부서진 도로 가장자리로 가 절벽 아래를 굽어보았다.

하늘을 밝히고 있던 헬리콥터가 떠나버린 절벽아래 바다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어둠 속 바다의 심연에서 들리는 것처럼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 어이, 박 경위. 네 고물차, 이제는 폐차시켜야겠다. 변호사님께 차 값 좀 보태달라고 해.

현장을 수습하고 있던 최수환이 농을 섞어 말했다. 기영은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폐 속으로 깊게 빨아들였던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이미 구급차를 타고 떠난 줄로 알았던 손나영이 기영을 불렀다.

― 변호사님, 연아를 만나보세요. 연아가 변호사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어요.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45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연재 제47회 <진실을 위한 용기>은 2019. 9. 9.(월) 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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