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38회 <산의 울음, 산의 노래 2>
Symphony in C minor ‘Fate’

내일 새벽이면 떠나야 했다. 내일 새벽 여섯시, 부산역에서 입영열차를 타고 훈련소로 떠나야 했다. 앞으로 소년 앞에 닥칠 생활은 철저하게 자아가 배제된 시간일 것이다. 개인의 자율과 독자적인 판단은 배제되고 오직 규격화된 유기체의 복종만이 강요되는 시간일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소년은 다만 움츠리고 있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소년은 죽은 듯 엎드려 있을 것이다.

고향집에서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하고 오후 늦게 사상터미널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할 익숙한 거리와 풍경들을 기억 속에 넣어두고 싶었다. 남포동에서 소녀를 만나 자갈치시장과 광복동 상가,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함께 돌아다녔다.

저녁시간이 되어 용두산공원으로 올라가는 헌책방 골목 어귀 고갈비집으로 갔다. 그곳에 입영하는 소년을 위해 친하게 지냈던 도서관 친구 몇몇이 마련한 술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안경도 나와 있었다.

고등어 비린내가 배인 술집은 시국성토장 같았다. 젓가락 장단으로 상을 두드리며 노래도 불렀다. 분위기에 휩쓸려 울분을 토하며 너도나도 권하는 술을 마다 않고 마셨다. 소년은 점점 취해 갔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가 끝나 술집을 나와 모두 뿔뿔이 헤어지고 소녀와 단둘이 남았다.

두 사람도 이제 함께 집으로 가야했다. 휴학계를 내면서 자취방을 나와 버렸기 때문에 소년이 돌아갈 집은 없었다. 소녀의 집에 가서 자고 새벽 일찍 부산역으로 갈 예정이었다. 입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에 와서 아침밥 한 끼라도 먹고 가라는 소녀 어머니의 말이 있었던 것이다.

문득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두산공원에 올라가면 멀리서나마 바다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녀와 함께 용두산공원으로 걸어 올라갔다. 밤이 늦었고, 날씨도 싸늘해 공원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몇몇 남녀를 제외하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보안등이 드문드문 밝혀진 산책길 옆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눈앞에 서 있는 잎이 저버린 낙엽송 사이로 부산항 부두가 보이고 그 너머 어두운 밤하늘 저 멀리 검은 바다 수평선이 보였다. 엉덩이를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얼어붙은 철제의자의 냉기가 섬뜩했다. 소년은 감전이 된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일 아침 입영열차를 타고 떠나면 지금 이 순간이 소녀와 단둘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문득 울컥 서러움이 솟구치며 눈물이 맺혔다. 소년은 눈물어린 시선으로 저 멀리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두운 바다 위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의 불빛이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했다.

▲ 사진제공 임재수 사진작가(이하 같음)

― 너무 추워. 그만 집에 가. 엄마가 걱정할 것 같아.

소녀가 어깨를 떨면서 말했다. 소녀의 그 말이 아니었으면 소년은 욕망을 억제하고 소녀와 함께 집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가자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순간 어떤 반발심 같은 충동을 느꼈다. 술에 취한 몽롱한 의식 속에서 소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소녀를 안고 싶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하고만 있었던가. 얼마나 오래 동안이나 다만 바라보고만 있었던가. 집에 가자고 하는 소녀의 재촉이 끓어오르는 소년의 욕망에 불을 붙였다. 오늘 이 순간 안지 않으면 영원히 안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소녀의 나신을 보고 싶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나신의 품에 안겨 잠들고 싶었다. 소녀의 따뜻한 가슴에 머리를 묻고 내일을 약속하고 싶었다. 하얀 살결에 입술을 부비며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술기운과 격하게 달아오르는 욕망으로 소년은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저만치 공원 아래, 비탈진 계단 길 옆 골목 입구에 희미한 보안등 불빛에 비친 조그만 여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계단 길을 뛰듯이 내려갔다.

― 널 이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어. 오늘 밤은 너와 단둘이 있고 싶어.

소녀의 손을 끌고 여관 입구에 섰다.

― 싫어. 집으로 가. 이러면 안 돼.

소녀가 손을 뿌리치며 애원했다. 그러나 소년은 더 완강했다. 오히려 꽁무니를 빼는 소녀의 손목을 더욱 세게 부여잡고 여관 출입문을 밀고 들어섰다. 소년이 여관의 작은 네모난 창구로부터 방 열쇠를 건네받았다. 2층 방문 앞에 섰을 때, 소녀가 다시 한 번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럴수록 소년은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방안으로 들어서, 방문 옆 벽에 붙은 전등스위치를 올리자마자 소년은 격렬하게 소녀를 껴안았다. 안긴 채로 뒷걸음을 치는 소녀를 벽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이며 가쁜 호흡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 이러지 마, 오빠. 제발, 부탁이야.

소녀가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하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점퍼를 서둘러 벗어 구석으로 던지고는 소녀의 코트 지퍼를 단숨에 아래로 내려 옷자락을 열어 제켰다. 소년이 코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소녀를 끌어안고 등을 더듬다가 털스웨터 위로 봉긋 솟아오른 유방을 움켜쥐었다.

― 안 돼. 오빠! 아파, 제발!

소녀가 가슴을 세차게 밀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소녀의 가냘픈 힘이 소년의 거친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자제력을 상실한 소년은 더욱 거칠어졌다. 소녀의 스웨터가 가슴 위로 치켜 올라가고, 하얗게 드러난 슈미즈 안 브래지어 위로 소년이 얼굴을 파묻었다.

― 안 돼. 제발! 오빠. 싫어. 이러면 싫어.

소녀는 완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소년은 그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이미 이성을 잃은 소년의 귀에 소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소녀의 젖가슴 맨살을 더듬었다. 후크가 채워진 채로 짧은 슈미즈와 함께 브래지어를 위로 밀어 올렸다.

하얗게 드러난 동그란 유방과 빨간 유두가 소년의 욕정을 더욱 부채질했다. 젖가슴을 두 손에 한꺼번에 모아 쥐고 입술로 더듬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너도 알잖아. 미치도록 널 사랑해.

소년이 다시 소녀의 상체를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고 빠르게 말했다. 소녀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몸이 느슨해졌다.

― 좋아. 오빠. 내가 벗을게.

소녀가 호흡을 가다듬고는 소년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 말이 차분했다. 그때서야 소년은 꽉 껴안고 있던 소녀의 몸을 풀었다. 소녀가 가슴 위로 치켜 올라간 브래지어와 스웨터를 내렸다. 그리고는 먼저 코트를 벗어 벽걸이에 걸었다.

코트를 벗어 걸고 천천히 돌아선 소녀가 벽에 기대서서 잠시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표정이 싸늘했다. 소녀가 등을 벽에 기댄 채로 여전히 소년에게로 눈길을 향하고서 옆걸음으로 전등스위치가 있는 벽 쪽으로 천천히 몇 걸음을 옮겼다.

방문 입구 벽에 다다른 소녀가 멈춰 서서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손을 옆으로 뻗어 전등스위치 위에 올려놓았다. 소녀가 다시 한 번 소년을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 보았다. 그러나 드디어 결심한 듯 입술을 꼭 다물고 벽에 붙은 스위치를 내렸다.

일순 방안이 어둠 속에 잠겼다. 동쪽으로 작은 창문이 나 있었다. 커튼은 열려있었다. 창문 밖 너머 멀리 부산항 부두가 보였다.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는 많은 배들이 검은 바다 수면 위에 불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여관 앞 보안등 불빛이 방안으로 엷게 비쳐들고 있었다.

그때서야 소년은 팽팽한 긴장감이 풀어지며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소년은 스르르 무너지듯 몸을 내려 주저앉았다. 다시 벽을 보고 돌아선 소녀가 스웨터를 목 위로 천천히 끌어올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 행동이 아주 차분했다.

소년은 벽에 기대앉아 소녀가 옷을 벗는 행동을 뒤에서 바라보았다. 하얗게 모습을 드러내는 잘록한 허리와 미끈한 등이 실루엣처럼 어른거렸다. 창문으로 스며든 보안등 불빛이 나신이 된 소녀의 상체를 하얗게 비추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스커트도 천천히 벗어 내렸다. 허리를 굽혀 팬티스타킹을 발목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토록 갈망하던 소녀의 나신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부셨다. 황홀했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아주 정갈하고 맑은 신비로운 기운이 방안을 감싸고도는 것 같았다. 소년의 가슴에서 뛰는 심장소리가 귀에까지 쿵쿵 울렸다.

잘록한 허리 곡선 아래로 하얀 팬티에 쌓인 둔부가 안개처럼 아련했다. 길고 가녀린 희고 매끈한 다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유방을 감싸고 있는 브래지어 끈이 투명하리만치 하얗게 빛나는 소녀의 어깨와 등에 걸려 있었다.

소녀가 조용히 몸을 돌려 방바닥에 깔려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베개를 베고 몸을 반듯이 뉘었다. 그 행동이 너무 거리낌이 없어, 오히려 소년이 잠시 당황했다.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눈을 꼭 감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비친 소녀의 동그란 얼굴은 하얀 석고로 조각을 빚어 놓은 것 같았다. 조각 같은 하얀 얼굴에 상서로운 푸른 기운이 엷게 어려 있었다. 소년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심장박동이 머리까지 쿵쿵 울렸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소녀가 바로 눈앞에 누워 있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소녀가 드디어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년도 옷을 모두 벗고 소녀의 곁에 누웠다.

이불 속 소녀의 가슴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얇은 브래지어 속에 감추어진 유방이 봉긋했다.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오뚝 튀어나온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쥐고 맨살 유방 위에 가만히 손바닥을 얹었다. 콩콩, 뛰는 심장고동이 손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그 박동은 소년의 가슴에서 울리는 세찬 심장박동과는 달랐다. 소년보다는 훨씬 느리고 아주 정상적이었다. 소녀의 등을 살짝 들어 올려 등 뒤 후크를 풀고 브래지어를 걷어 내었다. 그래도 소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허리를 둘러 안고 소녀의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갰다. 그러나 입술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입술을 열고 있었지만, 소년의 혀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입술을 세게 빨아도 소녀의 입술은 냉랭하기만 했다.

소년은 이번에는 소녀의 귓불과 목을 부드럽게 핥았다. 다시 입술을 아래로 움직여 봉긋하게 솟은 유방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고 애무하며 유두를 입속에 넣고 굴렸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움직여 소녀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감싸고 있는 얇고 부드러운 팬티를 다리 아래로 끌어내렸다. 소녀가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소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정물이 되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소년의 손길을 거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철저하게 자신을 방임한 태도였다. 소극적인 수용의 태도도, 적극적인 거부의 태세도 아닌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루던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는 냉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미세한 동작하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듯 했다. 숨조차 멎어버린 듯 했다. 마치 생명이 없는 목각인형이 되어 버린 듯 했다.

순간 소년은 맥이 탁 풀렸다. 스스로 옷을 벗겠다고 했을 때, 뒤돌아서서 스스로 옷을 벗을 때, 소녀가 자신을 받아들이고자 결심을 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때서야 소년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년의 머릿속에 찌르르, 전기가 흐르며 쿵, 하고 강한 충격이 왔다. 소녀는 분명 소년을 거부하고 있었다. 소녀는 저항의 몸부림이 술에 취한 소년의 욕망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항보다는 자신을 놓아버린 방임의 태도로써 더 강한 거부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일순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버린 소년의 완력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전혀 반응이 없는, 생명을 정지시켜버린 무생물의 상태로써 소년의 이성을 일깨우고 있었다.

소년은 몸을 일으켜 앉아 소녀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감은 채로 있는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 귓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간 소년도 울고 싶었다. 체한 듯 심장을 꽉 조이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충격에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듯 울음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소년도 몸이 굳어졌다. 술이 깨는 듯 온몸을 태우고 있던 욕정도 수그러들었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머리가 점점 맑아 오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누워 있던 소녀가 눈을 감은 채로 울먹이며 말했다.

― 오빠, 미안해. 오빠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는 줄은 알아. 나도 오빠를 좋아해. 사랑해. 하지만…….

소녀가 망설이는 듯, 아니면 숨을 고르는 듯 말을 멈췄다. 소년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전신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소녀가 이불 속에서 몸을 뒤집고 엎드려 흐느꼈다. 그 소리가 한동안 어두운 방안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소녀가 울음을 멈추고 조용히 일어나 손을 더듬어 소년이 벗겨놓은 브래지어와 팬티를 찾아 입었다. 바닥에 벗어놓았던 스웨터도 다시 껴입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소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미안해, 오빠. 그 사람을 지켜줘야 해. 그 사람을…….

소년은 아까부터 대장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교도소 면회실 창살 속의 담담한 눈빛이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를 용서해도 단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는 대장의 목소리가 새삼 소년의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대장의 담담했던 그 음성이 소년의 이성을 다시 일깨웠다.

― 오빠는 내가 없어도 되잖아. 오빠는 내가 없어도 오빠가 의지할 아버지와 어머니, 식구들이 있잖아.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그 사람에게 나라도 없으면,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하잖아. 그 사람에게 나라도 없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어. 그 사람이 어떻게 숨을 쉴 수 있겠어.

나는 그 사람을 지키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어. 나는 그 사람과 함께 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어. 나는 그 사람의 신념과 그 사람이 가진 진실을 함께 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어. 오빠가 진정으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줘. 하느님께 약속한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오빠가 나를 지켜 줘. 부탁이야, 오빠.

그 사람, 그 사람, 그 사람, 그 사람이라고? 소년은 쥐어짜듯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잠겨 있던 소년의 목에서 갑자기 다그치듯 안타까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바보야.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건 동정이야. 그건 단순한 희생에 불과해. 사랑과 희생을 혼돈하지 마. 그건 단순한 연민에 불과해.

소년의 다그치는 말에도, 소녀는 여전히 울먹이며, 그러나 차분하게 말했다.

― 아니야. 오빠가 틀렸어. 연민 없는 사랑이 어디 있어? 희생 없는 사랑이 어디 있어? 연민 없는 사랑은 단순한 욕망에 불과해. 희생 없는 사랑은 단순한 이기심일 뿐이야. 더 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그 대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야.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의 신념과 영혼을 위하여 기꺼이 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어. 나는 그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어.

소년에게는 소녀의 그 말이 허황했다. 아니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세뇌하듯 마음을 반대편으로 한사코 떠밀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이 아니라면 목 놓아 울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다시 목이 메어 아무런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소년은 이제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울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벗어놓은 옷을 챙겨 입었다. 여전히 목이 잠겨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진작 몰랐을까. 왜, 진작 확인해보지 않았는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때 무간암 아궁이 앞에서라도 물어보았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소녀도 팬티스타킹을 신고, 다시 스커트를 입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엎드려 입속말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하느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의 영혼을 구원해…….

소녀의 목소리가 종내에는 흐느낌으로 바뀌고 있었다. 소년은 벽에 기대 앉아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보았다. 꿇어앉아 방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이 아득하게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난생 처음 보는 낯선 여자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넋을 잃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소년의 감은 눈에 어릴 적 고향의 풍경이 떠올랐다. 빨간 벽돌집 우체국 앞에서 단발머리 어린 해맑은 소녀가 버들피리를 불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강가에서 하얀 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버들피리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붉게 물든 노을아래 새하얀 교복 상의를 입은 소녀가 코스모스를 꺾어들고 꽃향기를 맡으며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억새가 황금빛으로 물든 강변 언덕 위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너풀너풀 소녀의 까만 스커트 교복 자락이 하얗게 피어나 굽이치는 억새꽃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배낭을 짊어진 소녀가 비에 젖어 오들오들 떨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산안개 속으로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풀꽃 한 송이, 비를 맞으며 외롭게 걸어가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내렸다. 땀을 뻘뻘 흘리는 소녀가 뒤돌아보며 밝은 웃음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한없이 펼쳐진 구름바다 저 끝으로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 아득히 먼 구름바다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대장이 포효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위대 군중 앞에서 주먹을 흔들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소녀가 달려가고 있었다. 달려가 대장의 품에 안겨 격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래,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때, 조용히 물어났어야 했다. 아! 나는 이렇게까지 머저리인가. 왜, 이렇게까지 미련했는가. 소년의 눈에서 투박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녀는 여전히 엎드려 일어날 줄 몰랐다. 울먹이는 소리로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창밖 부산항 부두 쪽에서 부우웅,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멀리서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새벽 4시가 된 모양이었다.

소년은 손등으로 눈물을 문지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바닥에 벗어놓은 점퍼를 껴입고 혼자서 여관을 나왔다. 거리는 아직 어둠에 잠긴 채 텅 비어 있었다.

한겨울 새벽 4시, 매서운 추위가 할퀴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제 술은 완전히 깨어 머릿속이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가슴 속에서 슬픔과 분노도 함께 타버리고, 이제 마지막 남아있던 소녀에 대한 사랑마저 다 타버린 모양이었다. 갑자기 허허로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부산역에서는 소년을 훈련소로 태우고 갈 입영열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기차를 탄 순간부터 소년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며, 자신의 모든 감각마저 폐쇄시켜 버릴 것이다.

그 기차가 도착하는 곳에는 깊은 침묵과 절대적 고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속으로 철저하게 침잠할 것이다. 그 속에서 죽은 듯 엎드려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스스로를 적막에 가둘 것이다.

소년은 여관 앞 골목 계단을 내려와 차도로 나와 부산역을 향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생각조차 끊어져 있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처음에는 환청처럼 들렸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느새 소녀도 소년을 뒤따라 여관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 오빠! 몸조심해야 해. 미안해. 용서해.

그러나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부산역을 향하여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오빠! 몸조심해야 해. 용서해. 사랑해.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더 크게 외치는 울음 섞인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 새벽하늘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 메아리를 따라 다시 대장의 묵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 나하고 약속해. 군대에 있는 3년 동안 너의 지난 과거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겠다고 약속해. 너는 군대에서 용서하는 방법을 찾고, 나는 이곳 교도소 안에서 용서하는 방법을 찾을 거야.)

두 목소리가 한데 어울려 소년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가 가슴에서 소용돌이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이 머릿속으로 몰아쳐 천둥처럼 뇌를 울렸다. 순간 소년의 가슴 한복판에서 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꽉 막혀있던 가슴이 활짝 열렸다. 소년은 달리면서 속으로 외쳤다.

(― 그래, 용서하자. 아니, 용서보다 더 큰 사랑, 그래, 용서를 넘어 더 크게 사랑하자. 나의 분노는, 나의 슬픔은, 나의 절망은, 대장의 그것보다는 더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래, 먼저 나를 사랑하자. 소녀를 앗아간 대장도 사랑하자. 대장을 선택한 소녀도 사랑하자.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 머릿속에 하얀 재만 남을지라도 그래도 사랑하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

순간,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소년은 눈물을 뿌리며 부산역을 향하여 어두운 거리를 달려 나갔다. 눈물어린 소년의 눈에 대장과 소녀와 함께 올랐던 지리산의 거대한 능선들이 붉은 태양 속에서 나타났다.

그래,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산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산이 되어 버리자. 그 산이 울고 있었다. 산의 울음소리가 소년의 가슴에서 천둥이 되었다. 그 천둥소리가 소년의 가슴에서 노래가 되었다.

그날 새벽, 소년의 가슴을 울렸던 산의 울음!
그 아픈 산의 노래!

산처럼 깊은 가슴으로
너를 사랑하여
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는 산속에서 뛰노는 사슴이 되고
너는 산속에서 노래하는 새가 되리라
우리 사랑은
우리 사랑은
어둠 속에서 더 밝고
침묵 속에서 더욱 깊어져
시련 속에서 보석처럼 아름다워라
우리 사랑은
우리 사랑은
슬픔 속에서 더 굳고
아픔 속에서 더욱 자라나
눈물 속에서 꽃으로 피어나리라
우리 사랑은
우리 사랑은


― 제3악장 끝, 제4악장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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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제39회 <사건의 원인>은 2019. 7. 15.(월) 에 게재됩니다.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38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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