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33회 <겨울 환상곡 2>
Symphony in C minor ‘Fate’

겨울로 접어들면서 학내 분위기는 점점 더 뒤숭숭해져 갔다. 총학생회 간부로 정보망 구실을 하던 감초는 중간고사 이후로 거의 한달 째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교에 등교하다가 하숙집 입구 골목에서 잠복하고 있던 형사에게 붙들려 연행되어 갔다는 말이 돌았다. 민주화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 미리 몸을 숨겼다는 다른 소문도 들렸다.

이러한 확인되지 않는 풍문과 함께 불안한 공기가 저녁안개처럼 교내에 번져갔다.

강의실, 유신독재를 미화하는 늙은 어용 교수의 윤리강의를 단지 학점을 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야하는 졸음에 겨운 운동권 학생들의 하품소리에서도,

구내식당, 한여름 소나기에 멋모르고 밖으로 기어 나와 빗물웅덩이에 빠져 죽은 지렁이처럼 퉁퉁 불어터진 자장면과 우동면발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가난한 학생들의 목구멍에서도,

교정 산책길, 영양실조에 걸린 사창가 어린 창녀의 노란 얼굴빛 같이 빛바랜 은행잎이 날리는 나무벤치에 앉아 남몰래 키스하는 캠퍼스커플의 입술에서도,

도서관, 청운의 꿈을 품고 칸막이 책상에 하루 종일 고개를 처박고 앉아 공부에 매진하는 고시생들이 넘기는 책장소리에서도,

학사주점, 소주와 막걸리, 내뿜는 담배연기로 쾌쾌한 이 주점에서 동전까지 탈탈 털어 술을 마시고 속이 뒤틀려 왝왝 내지르는 술 취한 학생들의 구토소리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학교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그림자와 그 숨소리에서도,

독재타도, 유신철폐라는 금지된 언어가 툭툭 튀어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동향을 감시하는 보이지 않는 정보기관의 눈과 귀가 교정을 불안하고 음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소년은 이런 모든 것들에 짜증이 났다. 민주화에 대한 학생들의 열망에 공감하면서도 턱없이 울분을 터뜨리는 일부 과격학생들의 선동도 싫었다. 살쾡이처럼 웅크려 실눈을 뜨고 먹이를 포획하려는 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눈과 귀는 더 역겨웠다.

학내뿐만 아니라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세계도 점차 거대한 대립구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이 싫었다. 거대한 수레바퀴에 매달린 채 왜소하게 자신을 매몰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학교도서관에 있으면 공부는커녕 질식할 것만 같았다.

소년은 겨울 방학이 되자마자 도망치듯이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집 황토벽 골방이 있던 외양간 아래채는 지난여름 폭우 때 내려앉아버렸다. 소년은 부득이 무간암으로 올라왔다.
 

겨울은 춥고 길고 질겼다. 소년은 겨울 내내 무간암에 엎드려 있었다. 암자를 감싸고도는 차가운 겨울바람과, 그 바람에 흔들리는 메마른 하늘과, 그 메마름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락대며 뒹구는 낙엽과, 그러한 모든 것들의 쇠락을 무심히 흘려보내는 계곡물소리만이 소년을 지키고 있었다.

춥고, 질긴 겨울 속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책과 하나가 되는 일이었다. 소년은 책 속에서 잠들고 책 속에서 잠이 깼다.

*

열흘 전에 내린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또 폭설이 내렸다. 며칠 동안이나 살을 에는 강추위가 이어졌다. 암자를 둘러싼 산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얀 눈에 갇혀버린 듯 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밖으로 나오기가 무서울 정도로 성깔을 부리고 있던 추운 날씨는 오후가 되자 제풀에 지쳤는지 다소 누그러졌다.

보살할머니가 차려주는 점심공양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소년은 아궁이 여잉 숯불 위에 얹어둔 주전자 물로 차를 끊였다. 찻잔에서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고 소녀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책 속에 매몰되어 있는 동안에 잊고 있었던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이 되살아났다. 학교도서관에서 공부한다면 매주 토요일에는 만났을 것이다. 소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찻잔 속에 보고 싶은 소녀의 얼굴이 담겨 하얗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책을 펼치고 앉았으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소녀의 얼굴은 책갈피 위에서도 어른거렸다. 소년은 책을 덮고 방에서 나와 암자 옆 계곡 등산로를 천천히 걸어 올랐다. 등산로에는 초행자라면 그곳이 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발목이 푹푹 빠졌다. 폭설 탓에 산을 찾는 등산객이 없어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숲 속 눈길을 천천히 걸어 올랐다.

등산로를 따라 잠시 올라가면 계곡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고, 두 계곡 사이 구릉지에 마당바위라고 불리는 제법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눈 때문에 더 이상은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소년은 바위 위에 서서 하얗게 펼쳐진 겨울 숲 전경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에 눈이 얼어붙어 가지마다 하얀 눈꽃이 피어나 햇살에 반짝였다. 가까운 계곡 비탈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키 큰 낙엽송 나뭇가지 사이에 새둥지 하나가 보였다. 새는 벌써 떠나버린 빈 둥지였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둥지 나뭇가지 사이에는 차가운 겨울바람만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빈 둥지를 보자 문득 가슴을 파고드는 지독한 상실감이 밀려들며 소녀가 보고 싶은 마음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소년은 그 바위 위에 서서 눈 덮인 하얀 겨울 숲을 바라보며 소녀를 위한 「겨울 숲 연가」를 머릿속에 그렸다.

*

산에서 내려왔을 때 시간은 아직 이른 오후였다. 소년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툇마루에 앉아 맑은 겨울하늘을 투시하는 따뜻한 햇살에 몸을 내맡겼다. 암자에서 키우는 고양이 한 쌍도 양지바른 마루기둥 아래에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 게으르고 졸린 눈으로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발목이 빠지는 눈길을 걸은 탓인지 조금 피곤했다. 나른했다. 겨울날 오후, 나른함이 소년을 평화롭게 했다. 방에 들어가 잠깐 낮잠이라도 자두는 것이 밤공부를 위해 더 좋을 것 같았다.

소년은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멀리 암자로 올라오는 눈길 위에 예닐곱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맨 앞에서 올라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혹시? 소년은 마루에 서서 등산객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일행들의 모습이 점차 뚜렷하게 보였다. 제일 앞장선 사람은 분명 대장과 소녀였다.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그리운 소녀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달려 내려가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대장과 소녀의 뒤를 따라 다섯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두 명은 언젠가 게시판 앞에서 만나 학사주점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적이 있는 사학과 여학생과 턱이 뾰족한 세모꼴 남학생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셋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소녀를 포함하여 여학생이 셋이었다.
 

소년은 마루에서 내려와 뜰을 가로질러 암자 마당으로 올라오는 돌계단 위에 서서 기다렸다.
― 어서 와. 어쩐 일이야?
계단 아래까지 당도한 대장 일행을 보고 소년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 집에 들렀더니, 여기에 있다고 하더라.
제일 앞장선 대장이 고개를 들어 소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오빠.
대장 뒤를 따르고 있던 소녀가 밝게 웃으며 챙이 달린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하얀 눈빛에 반사된 소녀의 얼굴은 맑고 희고 싱그러웠다. 추위에 발갛게 상기된 볼이 귀여웠다. 대장 일행이 요사 마루에 각자 지고 온 배낭을 끌러 놓으면서 두런거리는 소리에 보살할머니도 나왔다.

―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대장과 소녀가 동시에 말했다.
― 그래, 어서 오너라.
― 스님께서도 안녕하시죠? 지금 계세요?
소녀가 명랑하게 말했다.

― 출타하신 지 여러 날이 지났어.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돌아오실 것 같아. 그런데 어쩐 일이야?
소년이 대신 말했다.
― 홍익회 동계수련회를 여기에서 하려고. 스님 법문도 듣고. 2박 3일인데,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은데, 어쩌지?

대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속에서의 겨울 해는 짧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다시 추워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에 보살할머니의 손길이 바빠졌다. 대장과 함께 온 일행이 소년의 옆방에 짐을 풀었다.

요사에서 비어있는 방은 그 방뿐이었다. 남녀학생이 섞인 일곱 사람이 한 방에서 잘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장과 남학생 세 사람은 소년의 방에서 자기로 하고, 소녀와 여학생들이 하나 남은 요사 방에서 자기로 했다.

보살할머니가 저녁공양을 준비하는 동안, 소년은 방 두 군데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시래기 된장국과 동치미, 말린 고구마 줄기와 무말랭이, 고사리를 삶아 무친 나물반찬으로 공양을 마치고 나니,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대장 일행은 회의를 한다면서 여학생들이 묵을 방으로 들어갔다. 대장이 함께 가도 된다고 하였으나,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장의 가입권유를 거절하여 회원도 아닌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대장 일행이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암자의 뜰에 서서 눈 덮인 저녁 산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빛을 받은 산은 점차 짙어오는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났다. 소년은 빛나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낮에 느꼈던 상실감이 새삼스레 솟아났다. 낮에 산에 올라 하얀 겨울 숲을 바라보며 소녀를 위한 연가를 머릿속에 그리던 감정에 다시 사로잡혔다. 그러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손조차 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 가슴이 쓰렸다. 허전했다.

어두워지자 골짜기바람이 더욱 차가워졌다. 소년은 방으로 들어와 호롱불 심지를 다듬어 불을 밝히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옆방에서 들리는 대장 일행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을 들고 군불을 지펴 놓은 아궁이로 갔다. 아궁이에는 참나무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아궁이 앞에 놓인 앉은뱅이 돌 위에 앉아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등을 기댄 채 번져나는 열기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녀와 함께 보냈던 지난날의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가 지워지곤 했다. 소년은 낮에 산에 올라 머릿속에 그렸던 「겨울 숲 연가」를 책표지 갈피 여백에 적어나갔다.

연한 향기로 피는 조그만 찻잔 속에
보고픈 너의 얼굴이 담겨 있고
겨울나무 숲에서 네 목소리 들려와
나는 찻잔을 들고 겨울 숲으로 갔다.

겨울나무 가지에 낙엽은 져버리고
새들도 벌써 숲을 떠난 지 오래
새들이 머물렀던 조그만 둥지 속엔
바람만이 홀로 숲을 지키고 있었다.

겨울 숲 하얀 겨울 숲
너의 입술 따스한 너의 입술
외로운 바람이 불어와
너의 눈에 한조각 눈꽃이 지네

겨울바람에 지는 하얀 눈꽃
찻잔은 네 입술처럼 따뜻하고
잔속에 담긴 너의 눈동자는
하얀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장작개비가 타면서 내는 열기가 온 몸을 어루만지듯 감쌌다. 포근하고 나른했다. 감기는 눈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소년은 이내 책을 무릎 위에 펼쳐든 채로 장작더미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오빠, 여기 있었네.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일렁거리는 붉은 장작불 너울 속에 소녀의 얼굴이 타오르고 있었다.
― 어, 언제 왔니?
소년이 장작더미에 기댄 등을 바로 세우면서 말했다.

― 응, 방금. 그런데 오빠, 많이 피곤해 보인다. 공부가 힘든가 봐.
소녀가 소년 옆에 쪼그려 앉아 손을 아궁이 가까이로 내밀어 불을 쬐며 말했다. 소녀는 낮에 입고 있던 등산복 상의대신 밝은 연두색 털스웨터만 입고 있었다. 찰싹 달라붙은 털스웨터를 밀치며 솟아난 가슴이 봉긋했다.

장작불에 비친 소녀의 귓불이 빨갛게 익어 고혹적으로 보였다. 소년의 머릿속이 선정적인 빨간 색깔로 물드는 것 같았다. 방금 책표지 갈피에 쓴 연가처럼 소녀의 따뜻한 입술을 입속에 넣고 어스러지도록 껴안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 회의는 마쳤니?
소년은 충동을 감추려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 응, 회의는 모두 마치고, 그냥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어. 문득 오빠 생각이 나서 오빠 방에 가보니 없어서……. 보살할머니 방에도 가보고, 찾아다녔어.
― 홍익회 활동은 어때? 재미있니?

― 재미있다기보다는 참 느낄 점이 많아. 배울 점도 많고. 매주 토요일 오후에 홍익고등학교에 가서 박사님의 지도를 받아 단전호흡 명상수련을 하는데, 수련을 하고 나면 내 영혼이 한층 맑아진다는 느낌이 들어.

― 홍익고등학교? 박사님?
― 응, 그때 무간 스님께서 오빠에게 반드시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시라고 하신 홍한일 박사님, 바로 그분이셔. 바로 그 홍한일 박사님께서 매주 토요일 홍익고등학교 부설 명상센터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역사 강의와 단전호흡 명상수련을 지도하셔. 우리 홍익회 회원들은 모두 그 수련에 참가해. 박사님은 이 시대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평가받는 신실증주의 사학이론을 정립하신 사학계의 원로이셔.

― 그래, 나도 언젠가 신문에서 박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
― 토요일 박사님께서 지도하는 단전호흡 명상수련을 하면 이제까지는 성당에 다니면서도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오던 하느님의 실체를 더욱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어.

― 단전호흡? 성당에서는 그런 것들을 미신으로 터부시하지 않아?
― 아니야.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 인도의 요가나 불교의 참선이 인간정신을 일깨워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행방법이듯이, 단전호흡도 참된 자아발견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우리 선인들의 고유한 정신수련법이야.

단전호흡을 통한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나의 본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스스로의 내가 누군지 더욱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돼. 참된 나를 발견하는 순간, 본래부터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신성神性을 발견하게 돼. 이때 나는 하느님과 더욱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더욱 맑은 영혼으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어.

― 신성? 하느님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고?

― 응, 정말이야. 단전호흡은 종교와 배타적인 것이 아니야. 나는 단전호흡 명상수련을 통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어.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하느님께서 항상 나의 영혼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느낄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돼.

그것이 내게 평화를 주고, 안식을 주고, 인간의 영혼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용기와 신념을 줘.

나직하게 말했지만, 소녀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소녀가 말하는 평화, 안식, 영혼, 희생, 용기라는 말이 참 편안하게 들렸다. 소녀가 계속 말했다.

― 단전호흡 명상수련은 내 몸을 통하여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이야. 어떠한 종교와도 배치되지 않아. 그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신성을 일깨워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통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어. 오빠도 개학하면 함께 가서 박사님의 강의를 듣고 명상수련을 한번 받아 봐. 공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오빠? 많이 수척해 보이고, 힘들게 보여. 어디 아픈 것 아니야?

― 그렇게 보여? 걱정하지 마. 아프지 않아. 그것보다도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안하고 두려워.
― 무엇이? 뭐가 두렵다는 거야? 시험에 자신이 없어서?
― 아니, 시험이야 열심히 공부하면 되겠지. 그것보다는 어느 날 문득…….
― 어느 날 문득……?

이제까지 소년은 단 한 번도 소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제대로 내색도 못하고, 그 마음을 그대로 가슴속에 담아둔다는 것이 괴롭고 불안했다.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을 하고 싶었다. 
 

― 응, 어느 날 문득 네가 내 곁에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 오빠도 참, 오빠, 정말 많이 지쳤나보다. 걱정하지 마. 나는 언제나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소녀가 한손을 내밀어 소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소녀의 손은 따뜻했다. 편안했다. 소년의 마음속에 항상 응어리로 맺혀있던 불안이 그 말 한마디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고마워.
소년의 음성이 떨렸다. 소년이 다른 손으로 소녀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 오빤, 새삼스럽게. 난 언제나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오빠도 내가 힘들 때 좀 도와줘.
소녀도 또 한손을 내밀어 두 손으로 소년의 손을 감싸듯 꼭 잡고 말했다. 소년은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도 붉게 타올랐다. 소년의 가슴도 뜨겁게 타올랐다. 순간, 소년이 소녀를 와락 껴안았다. 갑자기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소년 자신조차 예기치 못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소녀가 반사적으로 소년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러나 소년은 더욱 세차게 소녀를 껴안았다. 벅찬 가슴이 소용돌이쳤다. 가슴에 닿는 소녀의 봉긋한 가슴이 뭉클했다. 머리카락에서 아카시아향내가 진하게 풍겼다. 그 향기가 소년의 머리를 현혹시켰다. 향기로웠다.

입술을 입술로 더듬었다. 소녀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두 손바닥으로 소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얼굴을 꼭 감쌌다. 입술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하고 매끄러웠다. 벅찬 감동이었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황홀했다. 이 순간, 시간이 영원히 멈춰 버렸으면…….

아궁이에서 장작개비가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골짜기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바람 속에서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대장이었다. 대장의 목소리가 소년의 귀를 울렸다. 소년은 영원했던 꿈에서 깨어났다. 포옹을 풀었다.

소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장작불빛을 받아 발갛게 익은 손가락 사이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소년은 당황했다. 예고하지 않은 첫 키스에 부끄러워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한 입술에 화가 난 것일까? 둘 다 아닌 것 같았다. 소녀가 왜 우는지, 소년은 그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눈물은 소년이 느낀 벅찬 감동과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소년이 느낀 황홀하고 영원했던 순간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눈물을 훔치며 부엌을 나갔다. 열린 부엌 여닫이문으로 차가운 골짜기바람이 휙 몰아쳐 들어왔다.

소년은 소녀를 잡지 못했다. 기나긴 겨울 동안 하얀 눈 속에 고립되어 갇힌 채 지독한 그리움에 젖어 방금 책표지 갈피에 쓴 「겨울 숲 연가」는 오직 소년 혼자만의 상상 속 「겨울 환상곡」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목탁소리가 들렸다. 새벽 4시, 보살할머니가 암자의 경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청아한 목탁소리로 어둠에 잠긴 물상들의 영혼을 깨우고 있었다. 보살할머니의 목탁소리는 새벽 예불과 함께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는 규칙적인 도량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시간에 목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목탁소리는 시간을 맞추어 놓은 자명종이었다. 무간암에서 생활하게 된 이후, 소년은 언제나 이 목탁소리에 잠을 깨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오늘은 선 듯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함께 자고 있는 대장과 일행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때 대장도 잠을 깼는지 몸을 뒤척였다. 소년은 그대로 잠든 체했다. 대장이 조용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방문이 열리자 한기가 훅 끼쳤다. 밖은 추울 텐데, 이 춥고 어두운 새벽에 대장은 뭘 하러 나가는 걸까? 소년은 궁금했다. 소년도 일어나 벽에 걸어놓은 두터운 점퍼를 입고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추웠다. 순식간에 온 몸으로 오싹 한기가 스며들었다.

대장은 눈 덮인 암자 마당을 가로질러 계곡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물가에 다다른 대장이 옷을 차례차례 벗고 차가운 계곡 물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살을 에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년은 암자 마당가에서 이만치 떨어져 서서 대장을 지켜보았다. 하얀 눈밭이어서 별빛 아래서도 주위가 훤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장이 물속에서 나왔다. 가져간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고 바지를 입었다.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대장이 계곡 언저리 눈이 쌓여 있는 넓은 바위 위에 올라섰다.

대장이 커다랗게 원을 그리면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손바닥을 마주치고는 다시 손을 내려 가슴 앞에서 합장을 한 채로 허리를 숙여 반절을 했다. 다시 허리를 세운 대장이 무릎을 약간 구부린 자세로 서서 천천히 팔을 벌렸다가 가슴 앞에까지 다시 오므리고, 다시 벌려 두 손을 수평으로 펴서 아래위로 너울거렸다. 그 동작은 흡사 한 마리의 학이 천천히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동작이 끝나는 순간, 다시 동작이 크게 바뀌면서 허리가 휠 듯이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두 다리를 수평으로 벌려 가랑이가 바닥에 닿기도 했다. 하얀 눈이 쌓인 바위 위에서,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듯이 너울대며 하나하나 이어지는 동작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은 아주 정갈하고 경건하게 느껴졌다.

그 몸짓은 부드럽고 우아했다. 별빛이 내리는 하얀 눈밭 바위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동작은 소년을 신비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그 동작에 따라 최면에 걸린 듯, 소년의 몸에도 어느새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고등학교 때 대장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가끔씩 마당에서 시범을 보여주곤 하던 단무丹舞였다. 대장의 춤은 그때보다 훨씬 정교해지고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 오빠, 일찍 일어났네.
대장의 춤에 취해 있던 소년은 언뜻 정신을 차리고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였다. 두툼한 등산복에다 목도리로 목을 칭칭 감은 소녀가 벙어리장갑 낀 손을 호호 불면서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어젯밤 부엌에서의 일은 밤새 잊어버린 듯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쉬잇! 소년이 소리를 내지 말라는 표시로 손가락을 모로 세워 입술에 댔다. 그리고는 저 아래 계곡 바위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대장의 모습을 손으로 가리켰다.

소녀가 대장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대장의 춤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는 눈 덮인 하얀 산 위로 무수한 별이 쏟아져 내렸다. 너울거리는 날갯짓 춤에 따라 별빛도 일렁거렸다. 그 춤이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소녀는 마치 숨이 멎어버린 듯 꼼짝 않고 서서 대장의 춤을 바라보았다. 보살할머니의 새벽 목탁소리처럼, 그 춤도 억눌리고 상처받은 모든 생명의 영혼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 춤이 어둠 속에 갇혀있는 영혼들의 슬픔과 고통을 정화시키는 것 같았다.

별빛이 희미하게 스러지고 있었다.
대장의 춤 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새로운 또 하나의 우주가 열리고 있었다.

― 연재 제34회 <민중의 노래 1>은 2019. 6. 10.(월) 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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