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29회 <무간 스님 2>
Symphony in C minor ‘Fate’

시를 읽고 난 스님은 한지를 접어 손에 쥐고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스님 앞에 놓인 찻잔은 반쯤 비워진 채로 식어 있었다. 소녀가 조심스럽게 다시 차를 따랐다. 찻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을 적신 스님이 말했다.

― 그 양반이 여태껏 정신을 못 차렸던 것이구나. 이런 글 나부랭이나 써서 남긴 걸 보니.
―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대장이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 이 글 속에 네 아버지의 생각이 모두 들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또 무엇을 알겠다는 것이냐?

대장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스님이 다시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 대학에 입학하였다고?
― 예.
― 정치외교학과라고 하였느냐?
― 예.
― 무엇 때문에 정치외교학과를 택하였느냐?
― 아버지가 품었던 이상을 깨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 그 정치라는 것으로 네 아비가 품었던 세상을 보려고 하느냐?

무간 스님의 물음에 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님은 대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문 밖에서 다시 바람소리가 들리고 풍경이 울었다. 문풍지가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무간 스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네 아버지는 빨치산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고. 네 아버지는 일제식민지 때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당시로서는 꽤 많이 공부를 한 지식인이었다. 해방 후 전쟁이 나고 낙동강전투에서 후퇴하면서 토벌군에 쫓긴 우리는 지리산에 들어가 결사항전하기로 작정하고 어두운 밤 어느 절로 숨어들었다. 바로 옛날 이곳에 있던 절이었다.

그때 네 아버지는 다리에 심한 총상을 입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토벌군이 절에 들이닥치고, 우리는 절에 불을 지르고 다시 후퇴해야만 했다. 그때 도주하면서 당시 지휘관은 나에게 짐만 되는 네 아버지를 사살하라고 했다. 나는 걸을 수도 없는 네 아버지를 업고, 저 아래쪽 계곡으로 내려가 네 아버지의 가슴을 겨냥해 눈을 감고 총을 쏘았다.

그때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젊음을 바친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인간이 배제된, 단지 이념을 위한 이념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그것은 인민을 위한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었다는 것을.

내가 쏜 총알이 네 아버지의 가슴을 뚫었지만, 다행히 심장을 비켜나 있었다. 나는 네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다. 네 아버지를 다시 업고 후퇴하는 빨치산으로부터 도망쳤다. 그 후 우리는 전향을 했고, 나는 출가를 했다. 이 암자는 나와 네 아버지가 세운 것이다.

풍경소리가 다시 울렸다. 긴 한숨 같은 대장의 숨소리 탓이었을까. 바람에 호롱불이 일렁거렸다. 호롱불에 비친 대장의 뺨이 눈물에 번들거렸다. 소년은 대장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대장 아버지는 어처구니없게도 노루사냥을 나온 양코 놈들이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는가.

―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말을 아느냐?
한동안 말을 멈추고 대장의 눈물을 바라보던 스님이 자상한 어조로 나직하게 말했다.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라는 뜻이라고 배웠습니다.
대장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 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겠지. 그렇게 배웠을 테니까. 그러나 그 말에는 오류가 있다. 원래 사람(人)을 말하는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人)을 말할 때는 사람 인(人)자 하나만으로 족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人)을 말할 때, 생각 없이 인간(人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人)은 사람(人)으로 족한 것이지, 여기에 ‘사이’를 말하는 간(間)자는 필요 없는 사족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人)을 인간(人間)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사람(人)과 사람(人)과의 사이,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우주질서는 사이(間), 관계(間)로 이루어진다. 식물과 동물과의 관계, 동물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우주의 인과법칙은 모든 것이 사이, 관계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말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라는 뜻이 아닌 ‘널리 사람(人)과 사람(人)과의 사이(間), 관계(間)를 이롭게 하라’라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의 ‘간(間)’자는 사람(人間)을 뜻하는 주어로서의 인간(人間)이 아닌,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 관계를 말하는 목적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네 말과 같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명분으로 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갔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한때 신봉했던 공산주의라는 이념도 그 근저에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 간(間)자의 의미하나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이, 관계가 조화로울 때 세상은 평화로웠다. 너의 아버지는 애초에 단순히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뜻을 가졌던 빨갱이였지만, 내가 그 가슴에 박았던 총알 하나로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를 지니고 있었던가를 깨우친 사람이었다.

너의 아버지는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 관계를 이롭게 하겠다’고 전향한 홍익인弘益人이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모든 우주질서가 조화롭게 움직이는 원리를 탐구했던 조화인調和人이었다. 우주에서 생멸하는 지극한 생명의 본질을 깨치고자 수행했던 조화인造化人이었다.

호롱불이 어둠을 태우고 있었다. 밤이 제 육신을 태워 호롱불을 밝히면서 어둠의 심연을 뚫고 있었다. 바람은 잦아든 모양이었다. 낙엽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깊은 적막 속에서 흐르는 물소리만 들려왔다. 적막한 물소리를 걷어내며 대장이 말했다.

― 아버지의 길을 가겠습니다.
― 아버지의 어떤 길을 가고자 하느냐?
― 아버지가 가고자 했던 홍익의 길을 가겠습니다.
― 홍익의 길이 어떤 길인지 아느냐?
―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가고자 한다고 하여 무턱대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네 의지가 가고 싶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네 의지 이전에 네 몸이 먼저 깨달아야 한다. 단배공은 하늘을 공경하고 땅에 감사하며 사람을 사랑한다는 홍익정신을 육체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아버지가 너에게 그 절을 시킨 것은 네 몸이 먼저 그것을 깨닫도록 한 것이다. 단배공은 몸을 굽히고 또 굽히고, 낮추고 또 낮추어, 드디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선도수행법이다. 단배공의 오체투지를 통하여 우주만물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네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추는 묵언하심黙言下心의 정신을 깨치도록 한 것이다.

스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스님이 다시 눈을 떠 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보아하니, 네 놈이 몇 번은 죽고, 또 몇 사람은 죽여야 제대로 된 홍익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지금 네 속에는 분노와 복수심이 일렁거리고 있다. 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분노와 복수심을 버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홍익의 길은 결코 찾을 수 없다.

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네 관념 속의 분노와 복수심이 정의正義를 이끌어 내거나 촉발시킬 수는 있겠지. 그러나 분노와 복수심이 정의 그 자체가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분노와 복수심이 용서와 화해로 정화될 때 비로소 자비심과 사랑이 싹튼다. 참된 정의를 완성하는 것은 분노와 복수심이 아니라 자비심이고, 사랑이다.

네 아버지가 가고자 했던 홍익의 길이 바로 그렇다. 홍익의 길은 용서하는 마음이다. 자비로운 마음이다. 이 세상의 온갖 하찮은 미물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런 이치를 네 몸이 먼저 깨치도록 네 아버지는 네가 어릴 때부터 그 힘든 단배공을 시켰던 것이다. 항상 명심해라.

대장은 말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스님이 몸소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 입술을 적신 후 타이르듯 조용하게 다시 말했다.

― 그리고 네가 사표師表로 삼아 반드시 스승으로 모셔야 할 분이 계시다. 홍익재단을 설립하신 홍한일 박사님이시다. 네 아버지와 함께 일본에서 동문수학하신 분으로 나보다도 네 아버지를 더 잘 알고 계신 분이다. 내 오늘 밤 추천서를 써놓을 테니 내일 산을 내려가면서 가져가거라. 꼭 찾아뵙도록 하여라. 밤이 늦었다. 그만 나가 보거라.

방을 나오자 추위가 살을 에는 듯 했다. 봄은 오고 있었지만, 산 속의 밤은 아직 매서웠다. 소년은 순식간에 전신을 감싸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대장은 추위조차 잊어버린 듯 요사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대장은 마치 얼음인형이 되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암자의 뜰에 서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장이 고개를 들어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았다. 별이 대장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꼬리를 물고 내리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별을 바라보고 있던 대장이 암자의 뜰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어두운 산길을 더듬듯 헤쳐가고 있었다.

그 길은 무간 스님이 대장 아버지를 사살하기 위하여 업고 내려갔던 길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년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대장을 바라보았다. 별빛에 점차 익숙해진 소년의 눈에 계곡으로 내려가 흐르는 물가 바위 위에 서있는 대장의 모습이 검은 실루엣으로 들어왔다.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한층 더 크게 들려왔다. 바위 위에 선 대장이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계곡물에 천천히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때 소년은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들을 수 있었다. 살을 에는 차가운 물속에서 절여 나오는 대장의 울음소리를. 그 소리는 이를 악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슬픔을 겨워내는 신음소리 같기도 했다.

― 오빠!
소녀가 두 팔로 가슴을 감싸 안은 채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 오빠는 스님께서 말씀하신 사이(間)를 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사이와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해?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가운 물속에서 신음처럼 절여나는 대장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 그것은 관심이야. 아까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이야. 사랑보다 사이와 사이를 이롭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나는 오빠가 소년원에 갔을 때, 오빠가 복수심으로 인해 사랑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싶어 겁이 났어. 두려웠어. 그래서 매일 기도하고, 편지를 썼어. 오빠의 가슴 속에 사랑이 메마르지 않도록 말이야.

소녀의 말은 평화롭게 들렸다. 따뜻했다. 소년의 가슴 속에 연민이 되어 있는 대장의 불행을 씻어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말하고 서있는 소녀의 눈이 젖어 있는 듯, 별은 소녀의 눈에도 쏟아지고 있었다.

*

B대학 신입생 입학식이 있었다. 아직 개강은 하지 않았지만, 소년은 대장과 소녀의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학교로 갔다. 입학식에 참가하는 신입생과 가족, 친구 등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하필 악동과 따까리가 소년의 눈에 띄었다는 것은 반드시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전 10시에 있는 입학식에 맞추어 학교 정문을 들어서고 있을 때,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낯익었다. 분명 악동과 따까리였다. 둘을 보는 순간, 소년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대상이 소년 자신이든, 아니면 대장이든 분명 또 다른 불행을 예고하는 징조 같았다. 소녀와 대장의 입학으로 밝게 개어있던 소년의 마음이 어두운 구름으로 덮이고 있었다.

소녀 어머니도 입학식에 나와 있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교정 잔디밭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소년이 소녀가 다닐 문과대학과 대장이 다닐 법정대학 건물 등 학교 안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그러나 소년의 마음은 어두웠다. 교문에서 보았던 악동과 따까리의 얼굴이 소년의 가슴 한구석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녁에 학교 앞 학사주점에서 대장과 소녀를 다시 만났다. 주점 안은 자욱한 담배연기와 소주와 탁주냄새가 범벅이 되어 왁자지껄했다. 소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소년 일행이 앉은 탁자 위에 탁주와 사이다, 노가리 몇 마리, 파전 한 접시가 놓여졌다. 소년이 대장의 잔에 술을 따르고, 대장이 소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소녀의 잔에는 사이다가 채워졌다. 세 사람이 함께 잔을 들었다. 소년이 말했다.

― 입학 축하해.
― 뭘 또 그래. 새삼스럽긴.
대장이 말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 오빠는 이곳에 자주 왔나 봐.
처음 와 보는 주점 분위기가 어색한지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소년에게 말했다.

― 아냐. 가끔씩 친구들과 왔어. 그런데 오늘 악동과 따까리를 봤어. 그 자식들도 오늘 입학한 것은 아닐까?
소년이 악동을 보고 난 뒤부터 내내 마음에 걸려 있던 말을 꺼냈다.

― 나와 같은 과에 들어왔더라. 둘 다.
대장이 다시 소년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뭐라고? 그 자식들이 너와 같은 과라고? 오늘 그 자식들을 만났어?
― 뭘 그리 놀래? 이젠 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술이나 마셔. 괜히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지 말고.

― 그 자식들이 또 무슨 짓을 할까 걱정돼서 그래.
― 걔들도 이젠 철이 좀 들었겠지. 지난번에 잘못했다고 싹싹 빌던 놈들이 뭘 어쩌려고. 걱정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오히려 잘 됐지 뭐. 같은 동창이라.

술집에서 대장과 함께 마시는 술은 처음이었다. 대장과 함께 주고받는 술잔의 속도에 따라 소년은 조금씩 취해 가고 있었다.

― 야, 이게 누구야? 이 샌님이 여기를 다 오고.
법학과 동기 하나가 테이블 옆을 지나다가 소년을 발견하고 끼어들었다. 그는 이미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학내 일에 사사건건 개입한다고 하여 ‘감초’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였다. 항상 선한 얼굴로 농담을 잘하는 친구라 소년 또한 싫어하지 않았다.

― 어럽쇼. 이 친구 좀 봐라? 내가 모르는 애인도 숨겨두고 있었네. 안녕하세요?
감초가 소년 옆에 앉은 소녀를 보고 넉살좋게 말했다.
― 야, 애인은 무슨 애인.
소년이 멋쩍어 하며 말했다. 그러나 감초의 애인이라는 말이 밉살스럽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녀가 애인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 한 잔 할래?
소년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마시고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 당연하지.
비어 있는 대장 옆자리가 마치 제 자리인 듯 감초가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 누구하고 왔니?
― 저쪽에 있어.
소년이 묻자, 감초가 주점 안쪽 한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담배연기 자욱한 구석진 자리에 소년과 같은 법학과 학생 몇몇의 모습이 보였다.

― 야, 이렇게 예쁜 애인 소개도 안 시켜 줄래?
술잔을 비운 감초가 소년에게 잔을 따르면서 대뜸 성화를 부렸다. 감초는 맞은 편 자리에 소년과 나란히 앉아있는 소녀를 아예 소년의 애인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 이번에 국문학과에 입학한 동생이야. 그리고 이쪽은 고등학교 동창인데, 이번에 정외과에 입학했어.
― 처음 뵙겠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주점 분위기에 익숙해진 소녀가 감초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 제가요.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제가 말이에요. 아직 애인이 없거든요. 국문학과 친구 중에서 제 애인 한 사람 소개시켜 주세요.
감초가 대장의 인사말은 아예 듣지도 않고 익살스럽게 소녀에게 말했다. 감초는 소녀 앞에서 짐짓 두 손을 모아 애걸복걸하는 형상을 짓고 있었다. 감초의 익살스런 모습에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 야, 이 자식아. 주접 그만 떨어.
예기치 않은 감초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대장과의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감초까지 덩달아 권하는 술을 마신 소년은 점점 더 취해가고 있었다.

취한 소년의 눈에 악동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불길했다. 악동이 대장과 같은 과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더욱 불길하게 느껴졌다. 악동의 얼굴 위에 대장의 얼굴이 겹쳐지곤 했다. 소년원을 출소한 후, 대장은 악동을 제일 먼저 찾아갔다고 했다. 대장의 발아래 무릎을 꿇은 악동이 분에 못 이겨 씩씩대는 모습이 떠올랐다.

악동이 대장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같은 과에 입학한 악동이 대장을 그대로 둘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동이 분명 또 다른 음모를 꾸밀 것만 같았다. 그것이 언제인가는 모르겠지만, 대장과 악동의 악연은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대장에게 또다시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불안했다. 두려웠다. 소년은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자 더욱 술을 마셨다.

그해 봄, 소년은 불길한 징조에 취해가고 있었다.

― 제2악장 끝, 제3악장에서 계속됩니다.
― 제3악장, 연재 제30회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 1 >는 2019. 5. 13.(월) 에 게재됩니다.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29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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