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27회 <사랑과 용서 2>
Symphony in C minor ‘Fate’

사랑과 용서 2

소년이 법대를 택한 것은 대장의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년은 대장의 무죄를 확신했었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은 조작된 음모 앞에 무력했다. 법은 진실의 편이고, 진실은 법으로 지켜져야 한다. 이것이 법치주의 국가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당위성이고 정의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장에게 적용된 법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정의가 아니었다. 정의가 아닌 것에 의해 정의가 재단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모순이 엄연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율배반이었다.

처음, 소년은 이러한 모순과 이율배반에 화가 났다. 분노가 솟구쳤다. 그러나 소년의 분노가 현실의 모순과 이율배반을 바로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소년을 우울하게 했다. 소년이 우울감에 빠질 때마다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굴복하지 마!”

대장의 말처럼 모순과 이율배반의 현실 앞에 굴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싸워야 할 일이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 방법은 정당하지 못한 법에 대항하여 정당한 법의 길을 찾는 것이다. 이보다 더 나은, 다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대장의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진작부터 법대에 진학하여 검사가 되겠다고 진로를 정해둔 안경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 안경이 가진 정의감이 소년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대장이 소년원에 간 이후 줄곧 전교 수석을 하던 안경은 누구나 선망하는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소년은 부산에 있는 B대학 법대를 택했다. 성적으로는 안경처럼 서울에 있는 다른 명문대학에 갈 수도 있었지만, 가난한 농사꾼인 부모님께 학비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대신 지방대학이지만 4년간 장학금이 보장된 B대학에 진학하여 경제적 어려움 없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조작된 음모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굴절되어 버린 대장의 미래가 소년이 법대를 지망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

B대학의 신입생 입학식이 있었던 3월 초, 토요일 오후, 시내에서 소녀를 만났다. 입학 선물로 백화점에서 소녀가 제법 비싼 파카 만년필 하나를 사 주었다. 그 만년필로 사법고시 답안지를 쓰면 더 많은 점수를 받을 거라고 소녀가 웃으면서 얘기했다. 함께 영화를 보고 저녁 시간에 맞추어 소녀네 집으로 갔다.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주방에서 저녁상을 차리는 동안, 소년은 소녀의 방에 있었다. 그 방은 소년에게 익숙했다. 작은 창문으로 비쳐드는 저녁 햇살, 한쪽 구석에 단정하게 개어놓은 이불, 옷걸이에 가지런하게 걸린 옷가지들, 그리고 함께 읽고 얘기를 나누었던 책꽂이에 꽂힌 많은 책들, 이 모든 것들에 소녀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 그 방은 소년을 아주 편안하게 했다.

문득 책상 서랍 틈새, 한쪽 모서리가 삐쭉 튀어나온 편지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편지를 살그머니 빼보았다. 겉봉에 대장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의 서랍을 몰래 열어보면 안 돼. 그러나 약한 경계심은 강한 호기심에 금방 지고 말았다. 서랍을 열어 보았다. 편지가 가득했다. 한결같은 봉투에 한결같은 이름이었다. 아! 날카로운 통증으로 소년은 아찔했다. 서랍 속 빽빽한 편지는 모두 대장이 소년원에서 보낸 것이었다.

내색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자마자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왔다. 가슴이 허허로웠다. 슬펐다. 이 세상의 적막 한가운데에 홀로 내버려진 기분이었다. 안경에게 전화를 했다. 안경은 아직 서울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안경과 처음으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고등학교 때, 가끔씩 선생님이나 부모님 몰래 술을 몇 잔 마신 적은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취하도록 마셔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휘청거렸다. 속이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대문이 바라보이는 전봇대 옆 담벼락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토했다.

대장 어머니의 방에 불은 켜져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아마 늦도록 소년을 기다리다 불을 켜 놓은 채 잠이 든 것 같았다. 대장 어머니가 깨지 않도록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방으로 숨어들었다.

사막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모래뿐이었다. 소년은 혼자 사막을 걷고 있었다. 내리쬐는 태양이 너무도 따가웠다. 발바닥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맨발이었다. 갈증이 났다. 아무 것도 손에 든 것이 없었다. 소년은 오직 사막 한가운데를 마냥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소년의 눈앞에 사막을 걸어가고 있는 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사막의 열기에 신기루처럼 어른거렸다. 그 사람에게 엎드려 한 방울 물이라도 구걸하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로 뛰어가려고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서가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이 하얗고 이마와 눈가에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노인이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그러나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소년은 그 노인에게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앞서가던 사람 역시 말이 없었다. 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났다. 그 사람은 바로 소년 자신이었다. 늙어버린 자신의 미래 모습이었다.

그런데 소년의 뒤에서 또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다. 그 아이도 어디선가 본 듯 했다. 그 아이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하였지만 역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도 말이 없었다. 아, 그 아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그 아이는 바로 어릴 적 소년 자신의 과거 모습이었다.

태양은 뜨거웠다. 온몸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목이 타는 듯 했다. 사막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래의 자신이 가야 할지, 과거의 소년이 가야 할지, 아니면 현재의 소년 자신이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미래의 늙은 노인이 자기인지, 과거의 어린 아이가 자기인지, 아니면 현재의 소년이 자기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혼재된 사막 한가운데 서서 소년은 내리쬐는 태양 아래 숨을 헐떡였다. 너무 갈증이 나서 가슴이 타올랐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아! 물, 물…….

눈을 떴다. 꿈이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가슴이 쓰렸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3월 초순, 아직도 새벽바람은 차가웠다. 수돗가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어 입에 물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멀리서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까만 하늘이었다. 사이렌 소리가 어둠에 잠긴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소년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웠다. 모든 사물이 깨어나고 있었지만, 소년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잠 속으로 깊이,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

*

입학식이 있었던 며칠 후, 카터 미국 대통령의 미군 철수 발표가 있었다. 그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는 절정으로 치달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그해 4월, 대장이 돌아왔다. 1년 6개월 동안의 소년원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것이었다. 대장이 없는 동안 대장 어머니를 모시고 지켜야한다는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장의 집에서 B대학까지 통학하기 위해서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소년은 B대학 근처에 새로 자취방을 구해 이사를 했다.

그해 봄, 소년의 대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소년은 여름 방학 동안 내내 시골 고향집에 머물러 있었다. 방학이 되기 전부터 학내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 서서히 발아하고 있었다. 학내는 뒤숭숭했다. 소년은 방학이 되자마자,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다.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동안, 시간은 정지해 있었다. 아니,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소년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았다.

대학 첫 번째 여름 방학도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금요일, 막차로 곰팡내 나는 자취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거의 한 달 동안이나 비워둔 자취방은 군데군데 얼룩이 지고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토요일, 점심시간에 맞추어 어머니가 대장 어머니에게 드리라고 싸준 몇 가지 농산물과 반찬거리를 들고 대장 집으로 갔다. 대문을 들어서자, 의외로 거기에 소녀가 와 있었다.

소녀는 청바지와 하얀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얀 티셔츠 안에 엷게 비치는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이 볼록했다. 여고 3학년, 사복을 입은 소녀는 이제 어엿한 숙녀로 보였다. 소년이 대학에 진학한 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소녀는 어느새 성숙한 여자티를 내고 있었다.

― 오빠, 마침 잘 왔어.
소녀가 먼저 반갑게 말했다.
― 네가 여기 어쩐 일이니?
― 어쩐 일이긴? 오늘 오빠 합격자 발표 날이잖아. 점심 먹고 함께 발표 보러 가.

아! 그랬구나. 소년은 깜빡 잊고 있었다. 대장에게 미안했다. 대장이 8월초에 치른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자 발표 날이었다. 세 사람은 함께 점심을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발표 장소인 D중학교로 갔다.

학교에 도착하자, 오후 두시에 예정된 합격자명단이 이미 운동장 입구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게시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소녀가 다람쥐처럼 허리를 꼬부리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게시판 앞까지 나아간 소녀가 손을 번쩍 들어 흔들고, 사람들 사이를 다시 빠져나와 활짝 웃었다. 합격이었다.

― 축하해.

소년이 대장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악동의 계략에 빠져 퇴학을 당했던 대장이 소년원을 출소한 후 혼자 공부하여 검정고시에 합격한 것이었다. 대장보다도 소녀가 더 기뻐했다. 대장의 합격을 누구보다 더 기뻐해야 할 소년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대장의 합격이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질투심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대장이 합격함으로써 소녀는 점점 더 멀어져갈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 그것은 소녀의 책상 서랍에 빼곡하게 들어찬 대장의 편지를 본 이후부터였다.

운동장을 함께 걸어 나오면서 대장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다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시외버스를 탔다. 완행버스는 해운대를 벗어나 동해안 국도를 따라 쉬엄쉬엄 느리게 달렸다. 기장, 일광을 지나 멀지 않은 바닷가에 옹기종기 작은 집들이 보이는 곳에서 버스를 내렸다.

세 사람은 바닷가로 이어지는 들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들길 언덕배기에 철 이른 들국화 몇 송이가 해풍에 하늘거렸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 드러난 소녀의 하얀 목덜미가 눈부셨다. 소녀가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코에 대고 향기를 맡으며 맑게 웃었다.

그러나 대장은 말이 없었다. 대장이 평소에도 필요한 말 이외에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소년원을 출소한 이후, 대장은 더욱 과묵해져 있었다. 그 변화의 원인이 대장보다 먼저 대학생이 되어버린 소년을 의식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 사람은 해안가 소나무 숲 그늘아래 앉았다. 물가에는 근처 해변마을 몇몇 꼬마들이 자갈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새까맣게 그을려 있는 꼬마들의 등짝에서 8월 늦은 햇살이 반짝거렸다. 소녀가 일어나 물가로 내려갔다. 소녀는 금방 꼬마들과 하나가 되었다. 꼬마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소녀의 모습은 아이들처럼 천진했다.

대장이 일어섰다. 티셔츠를 훌렁 벗은 대장이 바지를 입은 채로 바다로 뛰어들어 먼 바다를 향하여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대장은 넘실거리는 파도에 잠겼다가 다시 솟아났다 하면서 계속 먼 바다로 나아갔다. 소녀가 대장을 발견하고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 오빠, 위험해. 그만 돌아와.

그러나 대장은 계속 나아갔다. 비늘처럼 반짝이는 은빛바다 물결 위에 떠있는 대장의 모습은 이제 작은 점이 되었다. 일렁거리는 물결에 잠겼다가 다시 솟았다가 하는 대장의 모습은 마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소년은 알 수 있었다. 대장은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냥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몸을 뉘고 바다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굳이 헤엄을 치지 않아도 뭍으로 밀려드는 파도가 대장을 싣고 돌아왔다. 대장이 물이 뚝뚝 흐르는 바지를 입은 채로 작은 바위 위에 앉았다.

― 사람 놀라게 오빠는 왜 그래?

짐짓 화난 목소리로 소녀가 투정을 부렸다.

― 바다에 누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소녀의 투정에는 아랑곳없이 대장이 먼 수평선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대장의 표정이 진지하여 소년도 소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장이 말을 이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에 빠지면 당연히 가라앉는다고 생각해. 그래서 사람들은 물에 가라앉지 않으려고 마구 허우적거리지. 그러나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물은 더욱 깊은 곳으로 사람을 끌어 당겨. 마치 물속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모든 것을 물에 맡겨 버리고 몸과 마음을 놓아 버리면 물은 오히려 부력으로 몸을 떠받쳐 줘. 끌어당기는 자석의 극이 바뀌어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그대로 물 위에 떠있을 수가 있어. 그것도 아주 편안하게 말이야.

무슨 얘기를 하려고? 소녀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대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이 이젠 정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 소년원에 갇혀 있을 때, 나는 물에 빠져 있었어. 그것도 엄청나게 큰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지. 그때 내 마음 속에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어. 나를 이렇게 만든 악동자식과 그 검사에 대한 복수심이었지. 나는 복수심이라는 증오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어.

그래, 소년도 그 분노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소년도 그랬는데, 정작 대장 자신은 오죽 했을까.

― 그런 복수심에 불타고 있을 때, 한 소녀로부터 편지가 왔어. 그 편지 속에 용서라는 단어가 있었어. 용서해야 한다고. 나를 그와 같은 고통에 빠뜨린 것은 용서를 배우기 위한 시작이라고. 그런 시련은 내 의지를 더욱 높은 곳으로 인도하려는 하느님의 은총이니, 그 뜻에 그냥 따르라고. 괴로워하지 말라고. 내가 괴로워하는 만큼 하느님은 나에게서 계속 멀어진다고.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깊은 바다로 빠져 들듯이,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의 심성은 더욱 피폐해진다고…….

대장이 잠시 말을 끊고 먼 바다를 응시했다. 대장의 눈에 얼핏 눈물이 어리는 것 같았다. 소년과 소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대장이 눈가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훔치고 말을 이었다.

― 처음에는 그 소녀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 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어. 그러나 소녀의 편지가 계속하여 말해주었어. 용서해야 한다고. 어떤 편지에는 다른 아무 말도 없이 용서라는 단어만 빼곡하게 쓴 편지를 받기도 했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어.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는 용서할 수 있겠다는 자각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용서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바뀌었어.

대장이 다시 말을 끊고 침을 꿀꺽 삼켰다. 대장이 다시 한 번 눈가의 물기를 닦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 내 마음 속 분노는 소녀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어. 결국 소녀의 편지가 증오의 바다로 끌려들어가는 나를 건져내 주었어. 그 소녀가 내게 용기를 줬어. 복수하는 마음보다는 용서하는 마음이 더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내 마음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왜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느냐고. 매일매일 기도한다고 했어. 내가 아름다운 마음을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해달라고. 나의 아름다운 심성이 깨어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한다고 했어.

대장의 목소리가 울먹이며 결국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대장이 말을 하는 동안 소녀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랬다. 눈이 내렸던 그날, 대장의 면회를 하고 나오는 길에서였다.

그때 소녀는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했었다. 대장이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언제나 기도하고 있다고 했었다. 복수하는 마음보다는 용서하는 마음이 더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했었다. 대장은 소녀가 보낸 편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녀의 서랍 속에서 보았던 대장의 편지는 그것에 대한 답장이었을 것이다.

― 그래서 모두 용서했니?

소년도 목소리가 잠겨 물었다.

― 그런데 소년원에서 나오자마자 복수심이 되살아났어. 용서할 수 없었어. 용서해야 한다는 소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내 감정이 허락하지 않았어. 너에게 굴복하지 말라고 했듯이, 그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굴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 오빠, 그래서 복수를 했어요? 아니면 앞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것예요?

소녀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대장을 바라보며 울먹이는 음성으로 물었다.

― 복수하려고 했지. 출소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뭔 줄 알아? 악동자식과 따까리를 찾는 일이었어.

어느 듯 해가 기울고 있었다. 소녀와 함께 어울려 놀던 꼬마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작은 목선 한 척이 해안으로 다가왔다. 배 위에서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그물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은빛 비늘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햇살을 받아 뱃전에서 파닥였다.

― 그 자식들을 어떻게 찾았는데? 악동자식과 따까리는 입시학원에 다니며 재수한다고 들었는데…….

소년이 말했다.

― 그래, 맞아. 따까리가 여전히 강아지처럼 악동자식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고 있었어.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자식들이 다닌다는 입시학원을 찾아갔지. 그러나 둘 다 공부는 뒷전이고 사창가와 당구장을 전전하면서 양아치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 같았어. 학원을 마치고 당구장에 들렀다가 나오는 두 녀석을 뒤따라갔어. 죽지 않을 만치 두들겨 패 주려고. 으슥한 골목에서 두 놈을 불러 세웠지.

― 그래서요? 오빠!
소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이 소녀의 눈을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

―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자식들이 나를 보자마자 벌벌 떨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어.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불더라. 모든 일은 그 검사가 시킨 일이라고 했어. 따까리가 자해를 한 것도 그 검사가 미리 시나리오를 그렇게 꾸몄다는 거야. 물론 그 검사는 악동 아버지로부터 돈을 받고 한 일이고. 그러면서 용서해 달라는 거야. 녀석들의 입에서 용서라는 말을 듣자, 죽지 않을 만치 패 주기로 했던 마음도 이상하게 가라앉아 버리데. 녀석들이 오히려 불쌍하게 보이더라. 그때 소녀가 편지에서 했던 용서라는 말이 다시 생각났어. 용서란 무엇인가. 연민인가.

잠시 말을 멈춘 대장이 다시 먼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리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그런 순간 정작 복수해야 할 대상은 녀석들이 아니라 돈을 받고 사건을 조작한 그 검사라는 생각이 들었어. 권력을 가진 자가 제 사익을 위해 아무 죄도 없는 한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이렇게도 쉬운 것이구나. 녀석들을 두들겨 패 준다고 해서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겠구나. 그래서 그 녀석들을 용서하기로 했어. 용서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참 편안해지더라. 증오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비로소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 몸과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렸던 거야. 그래서 그 바다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었어.

대장이 갑자기 소녀와 소년을 그윽한 표정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년과 소녀도 대장을 바라보며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장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 그것은 여기 있는 예쁜 소녀의 덕분이야. 그동안 어머니를 지켜준 친구와 용서를 가르쳐 준 예쁜 소녀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너는 법대에 갔으니, 훗날 사법고시에 합격해도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그 검사와 같은 사람은 되어서는 안 돼. 너는 법의 정의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올바른 법률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래.

소년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제까지 보고 겪은 대장의 성격으로 보아 대장은 결코 악동을 용서하지 않을 줄로 알았다. 그리고 소년 또한 악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장은 악동을 용서했다고 했다.

소녀가 보낸 편지가 대장을 변화시킨 것일까. 소녀가 대장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랑이 대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닐까. 소년의 눈길은 먼 수평선을 향하고 있었다. 그 바다너머로 소년의 안타까운 마음이 흘러가고 있었다.

― 오빠, 오빠는 그 검사라는 사람까지 용서해야 해. 오빠는 할 수 있어. 용서에는 조건이나 방법이 있을 수 없어. 그 대상에 차이가 있을 수도 없어. 용서는 용서일 뿐이야. 순수한 사랑에 조건이 없듯이, 순수한 용서에도 조건이 있으면 안 돼. 누구는 용서하고 누구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그런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야. 조건이 있는 용서는 참된 용서가 아니냐. 오빠, 용서할 수 있는 거지?

눈물에 잠긴 눈으로 대장을 바라보고 하는 소녀의 말은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었다.

― 아직은 모르겠어. 그러나 노력해 보겠어.

대장은 소녀가 그 검사까지도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는 말에는 아직 동의하지 않은 것 같았다.

― 대학은 어떻게 할 거니?

소년이 대장에게 물었다. 대장이 검정고시를 합격했으니, 대학에 진학해야 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 대학? 가야지. 정치외교학과를 마음에 두고 있어. 그 검사와 같이 권력을 오용하는 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올바른 정치가가 되고 싶어.

그날, 바다에서 돌아온 소년은 많은 생각을 했다. 소년보다 어린 소녀가 용서를 말하고 있었다. 소년이 악동이 저지른 해악에 분노하고, 대장에게 누명을 씌운 부조리에 절망하고 있을 때, 소녀는 대장의 마음속에 용서하는 마음이 자라나기를 갈구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용서하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하는 소녀의 신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성당에 나가 매일 기도하는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보다 소녀의 내면에 있는 순수한 영혼에서 저절로 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소녀의 가식 없는 참모습은 처음부터 그런 신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소녀가 진심으로 대장의 불행을 안타깝게 여겨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정작 자신은 소녀의 마음을 가로 챈 대장에 대한 시기심으로 괴로워했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 대장이 소년원에 있는 동안, 이제는 소녀의 마음을 독차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위했던 적도 있었다.

대장의 불행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패배감과 열등감에 젖어 시기하는 이중인격자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소년은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서글펐다. 참담하기까지 했다.

가을은 서러움보다 더 깊은 참회를 삭이며 깊어가고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만큼이나 소년의 마음도 고독해 지고 있었다. 대학입시를 앞 둔 소녀가 한가하게 소년을 만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더 초조했다. 항상 소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대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소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소년은 날마다 소녀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일어나면 언제나 혼자였다. 그러한 지독한 그리움이, 외로움이, 상실감이 소년의 머릿속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럴 때면 소년은 소녀가 준 하모니카를 불었다. 곰팡내 나는 자취방 벽에 기대앉아 작은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하늘과 별을 바라보며 하모니카를 불었다. 문득 펼쳐든 성경 시편에 소년의 그리움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그댄 내 마음 사로잡아
새벽빛처럼 솟아오르는
단 한번 그대 눈빛만으로
내 영혼 그대의 목걸이 된다
그대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그대의 사랑은
별빛보다 더 아름답도다.
(아가 4-9, 10 / 6-10 차용, 변형)

그해 가을, 소년이 부는 하모니카 소리는 외롭고, 애잔하고, 슬펐다.

― 연재 제28회 <무간 스님 1>은 2019. 4. 29.(월) 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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