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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교향곡, 연재 제26회 <사랑과 용서 1>
김영미안  |  anteaj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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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5  06: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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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교향곡, 연재 제26회 <사랑과 용서 1>
Symphony in C minor ‘Fate’

   
 
사랑과 용서 1


준하가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말한 징은 준비해야 했다. 준하는 그의 말대로 하늘이 마련한 굿판에서 생명을 걸고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몰랐다. 준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말대로 최선을 다해 징을 울리는 일 뿐이다. 준하로부터 사실을 기대하지는 말자. 그의 생명은 하늘의 뜻일 테니까.

두 번째 공판일

곽 판사 : 공판을 속개하겠습니다. 피고인 김준하의 변호인은 상피고인 박형기에 대하여 반대 신문해 주십시오.

박기영(피고인 박형기에게)

문 : 당시 마린시티 호텔 804호에서 김준하가 사용한 도구는 샴페인병과 칼이었지요?
답 :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문 : 분명하게 대답해 주세요. 당시 김준하가 사용한 것은 샴페인병과 칼, 이 두 가지뿐이었고,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는 않았지요?
답 : 예, 샴페인병과 칼을 사용하였습니다.

문 : 당시 김준하가 칼로 피살자의 목을 찌를 때나, 또는 찌르고 난 이후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이물질을 피살자의 목에 집어넣는다거나 하는 특별한 행동을 한 일이 있었나요?
답 : 그것은 정확하게 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문 : 당시 현장에서 김준하가 한 말까지도 기억하는 피고인이 김준하가 위와 같은 특별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고 하는가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당시 김준하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다른 이물질을 피살자의 목에 집어넣는다거나, 또는 그와 유사한 특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요?
답 : 예,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문 : 당시 마린시티 호텔 804호실을 먼저 떠난 사람은 누구였나요?
답 : 김준하가 먼저 나갔습니다.
문 : 피고인이 마지막으로 그 방을 떠났다는 말인가요?
답 : 예.

문 :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피고인이 마지막으로 그 방을 떠날 때까지, 김준하가 다른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피살자의 목에 집어넣는다거나 하는 특별한 행동은 분명히 하지 않았지요?
답 : 예.
― 이상입니다.

곽 판사 : 검사는 피고인 김준하에 대하여 신문해 주십시오.

   
▲사진제공 임재수 사진작가(이하 같음)

드디어 꽹과리 소리가 울린다.

김용훈 검사(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피고인은 지난 번 공판에서 상피고인 박형기가 하는 진술을 들었지요?

긴장 속에 빠지는 기영.
드디어 준하가 입을 열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묵비권을 행사할 것인가.

답 : 예.
문 : 피고인은 박형기의 진술을 인정하는 가요?
답 : 그 부분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무너지는 기영.
공판에서도 여전히 진술을 거부하겠다는 말인가.

문 : 피고인은 19××. 11. 피고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학생들과 싸움을 하여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있지요?
답 : 예.
문 : 그 당시 피해를 입은 학생의 진술은 피고인이 칼로 그 학생의 배를 찔렀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나요?
답 : 아닙니다.

문 : 당시 피고인의 진술은 그 학생이 스스로 자신의 배를 찔러 자해를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피고인의 당시 진술이 사실이라는 말인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피고인은 당시 그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이 사건 피고인의 범행에서 피살된 김인환이라는 사실을 아는가요?

― 이의 있습니다.
갑자기 울리는 징소리.

기영이 용훈의 신문을 낚아챈다.
― 피고인은 이 사건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검사는 ‘이 사건 피고인의 범행에서 피살된 김인환’이라고 하여, 김인환을 살해한 범인이 피고인이라고 단정하는 유도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곽 판사 : 변호인의 이의를 받아들입니다. 검사는 피고인이 유죄라는 예단을 갖게 하는 신문은 자제하여 주십시오.

문 : 정정하겠습니다. 피고인은 당시 사건을 수사한 담당검사가 김인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답 : 예.
문 : 피고인은 이 사건으로 소년원에 가게 되어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했지요?
답 : 예.
문 : 지금까지의 진술을 종합하면, 피고인은 그때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인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렇다면 피고인은 당시 피고인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이 김인환이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요?
답 :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사건을 조작하여 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문 : 어떻게 조작했단 말인가요?
답 : 당시 그 싸움을 뒤에서 사주한 학생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돈을 받고 사건을 조작했던 것입니다.
문 : 당시 피고인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답 : 그때 거짓자백을 강요하면서 그 검사가 스스로 말했습니다.

문 : 검사가 스스로 말했다고요? 검사가 어떤 말을 했다는 말인가요.?
답 : 나는 그 검사에게 그 학생이 스스로 자해를 한 것이라고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검사는 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끝까지 부인하자, 그 검사는 고문을 했습니다.
문 : 고문이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어떤 고문을 했나요?

답 : 처음에는 철자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틀었습니다. 그 철자에 손가락 피부가 다 벗겨지고 뼈가 드러났습니다. 그래도 내가 굴복하지 않자, 옷을 모두 벗기고 백열등 아래 책상 위에 매달아 세워 놓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고문은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그때 고문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했다는 말인가요?
답 : 아닙니다. 그런 고문에도 나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검사가 제 풀에 지쳤는지 스스로 말했습니다.
문 : 검사가 어떤 말을 했다는 말인가요?

답 : 그때 그 검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 항복해라. 나는 네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억울하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아무리 부인해봤자, 아무리 저항해봤자, 너는 결코 빠져 나갈 수 없다. 나는 너를 잡아넣어 달라는 대가로 이미 많은 돈을 받았다. 그 학생에게 자해를 하라고 시킨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 내가 널 풀어 줄 것 같니?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러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입니다.

문 : 피고인에게 그런 고문을 가한 사람이 이 사건의 피살자인 김인환이란 말인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이때 7×푸2407호 소년보호 사건기록 중 피의자신문조서를 피의자에게 제시하고) 피고인, 여기 이 기록 중에 ‘(이때 피의자가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이 갑자기 절규하는 목소리로) 지금부터 나에게 영혼은 없어. 당신들에게 복수할 거야.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들을 심판하겠어. 내 손으로 반드시 당신을 죽이고 말겠어’라는 진술이 있습니다. 이 진술은 피고인이 실제로 이렇게 진술한 것인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이 기록은 조작된 것이 아닌가요?
답 : 아닙니다. 그때 내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문 : 그렇다면 당시 고문과 사건조작에 의해 영혼마저 빼앗겨버렸다고 생각한 피고인이 김인환에게 복수할 마음이 들었던 것은 당연하겠군요?
답 : 그렇습니다. 당시 고문에 의한 고통보다도 돈에 매수되어 검사로서의 양심과 자신의 영혼마저 팔아버린 사람에게 나 또한 영혼이 없는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그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인환을 살해한 것인가요?
답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꽹과리 소리는 요란하다.

준하가 모를 리가 없다. 이와 같은 용훈의 신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 김인환에 대한 살인의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을. 그런데도 준하는 그 동기가 되는 신문에 모두 응하고 있다. 그것도 공소유지를 위한 전제사실에 대하여 용훈이 의도하는 바대로 모든 것을 시인하고 있다. 준하의 의도는 무엇일까. 준하는 드디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젠 징을 울려 장단을 맞출 차례이다.

울리는 징소리.

박기영 : 지금까지 검사는 피고인의 과거 전과의 한 부분에 대하여 신문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범죄의 구성요건과 관련한 고의, 즉 살해 동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변호인의 반대신문을 먼저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곽 판사 : 검사는 어떻습니까? 동의하는 건가요?
김용훈 검사 : 예, 동의합니다.
곽 판사 : 그렇다면 변호인의 반대신문은 지금까지 검사가 한 주신문에 한하여만 허락합니다.

박기영(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피고인은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1년 6개월 동안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었지요?
답 : 예.
문 : 그때 피고인이 수감되어 있을 때, 매주 면회를 오고, 거의 매일이다시피 편지를 보내온 한 여학생이 있었지요?
답 : 예.

문 : 피고인은 그 여학생을 사랑하였나요?
답 : 예.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도,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여학생을 사랑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 : 그 여학생의 편지 내용은 어떠한 것이었나요?
답 :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복수하는 마음보다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복수하기 이전에 먼저 용서하는 법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는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그 여학생의 편지를 통하여 용서를 배웠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 여학생의 말대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에게 용서하는 마음이 강림하기를 갈구했습니다. 오직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마음을 얻었습니다.

문 : 피고인은 그 용서를 실천했습니까?
문 : 그렇습니다. 적어도 당시 나를 소년원에 보낸 사실에 대하여는 용서하는 마음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 이상입니다.

깊은 울음을 감춘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겨울은 바람소리로 울었다. 소년은 참담했다. 대장의 불행이 모두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 같아 죄책감도 들었다. 대장이 없는 학교생활은 암울했다. 그럴 때마다 소년의 뇌리에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대로 굴복하지 마! 절대로!”

소년이 그나마 학교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매일 대장의 그 목소리를 반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에 실린 대장의 의지와 정신력이 소년에게 버틸 힘을 주었다. 그 사건 이후 유일한 단짝이 된 안경의 낙천적인 성격도 소년에게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를 부탁해.”

방청석을 바라보며 외친 대장의 그 목소리는 눈짓으로 보내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대장의 그 부탁이 아니더라도 대장 어머니는 바로 소년의 어머니와 다름없었다. 소년은 대장이 없는 대장 집에서 그대로 생활했다. 대장이 없는 집에 소년마저 떠나버리면 대장 어머니의 절망은 더욱 깊어질 것이었다.

대장이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지켜야 하는 것은 대장과의 약속에 따른 소년의 의무였다. 그것은 소녀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 그즈음 대장 어머니도 소녀를 따라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성당에 나가게 되면서부터 깊은 절망에 빠져있던 대장 어머니의 표정도 차츰 밝아지고 생활도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음모로써, 모략으로써 대장을 학교에서 추방해 버린 승리감에 도취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대장을 소년원에 보내버린 악행에 대하여 조금만큼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소년과 안경에 대한 악동무리들의 더 이상의 보복은 없었다.
 
   
 

*

눈이 내렸다. 구포다리를 건넌 버스는 김해로 접어드는 국도를 따라 달렸다. 소년과 소녀, 그리고 안경은 대장이 수감되어 있는 김해소년원 입구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려 소년원으로 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눈길을 걸었다.

하얀 눈이 내린 길옆 논바닥에는 베어버린 벼 그루터기가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눈 덮인 벌판은 황량하고 허전했다. 차가운 바람만이 그 들판에서 깊은 신음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소년은 그 바람소리가 대장이 토해내는 울음소리 같아 슬펐다.

연회색 털목도리를 목에 감은 소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소년도 추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소년이 겪고 있는 추위는 대장이 겪고 있을 고통에 비하면 사치스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원 정문으로 향하는 눈 덮인 시멘트 포장도로에는 쇠사슬을 이어놓은 것처럼 금방 찍힌 자동차 바퀴자국이 두 줄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바퀴자국은 대장과 소년의 가슴에 악동이 새겨 놓은 분노처럼 선명했다. 그 자국은 대장을 옭아매고 있는 질긴 포승줄 같았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한다는 것이 대장의 고통을 배반하고 조롱하는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낙천적인 안경도 장갑 낀 손을 마주잡고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소녀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이나 안경과는 달리 소녀의 표정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대장을 만난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소년의 가슴에는 또 다른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멀리 하얀 눈을 덮어쓴 산등성이 위로 검은 새 한 마리가 빙빙 돌며 날고 있었다. 그 새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가물가물해졌다.

면회를 신청한 후,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낯선 제복을 입은 교정관이 면회실의 작은 출입문을 열었다. 철망으로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생소한 푸른 수의를 입은 대장이 철망 건너편에 나타났다.

소녀의 눈에 금방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고였다. 소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오열을 삼켰다.
― 오빠!
소녀가 말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녀의 눈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정작 대장을 보자, 소년도 가슴이 메어질 듯이 답답해져 왔다. 소녀와 소년의 안타까운 심정과는 달리, 그러나 대장은 밝았다. 웃고 있었다.
― 지낼 만 해?
그나마 낙천적인 안경이 말했다.

― 그럼. 야, 안경, 자식들이 아무 짓도 안 했어? 너희들, 굴복하지 않았지?
대장이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은 오히려 소년과 안경을 걱정하고 있었다. 소년과 안경이 악동무리의 보복에 힘들어하고 있지나 않은가 염려하고 있었다.

― 아무 일도 없었어. 그 자식들 조용해…….
안경이 말했다. 대장에게 미안했다. 대장은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있는 듯 했다. 대장은 자신의 고통은 결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고통이라도 스스로 감내할 것이다. 소년은 대장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소년은 말하고 싶었다.

(―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너의 고통에 대하여 함께 울어 줄 수는 있어. 너의 절망에 대하여 함께 분노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러나 소년은 말하지 못했다. 단지, 씩 웃어보였다. 대장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이다.
― 오빠! 이겨내야 해. 오빠는 이겨낼 수 있어. 필요한 것 없어?
소녀가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 이겨내고 있어. 잘 이겨낼 거야. 필요한 건 모두 다 있어. 아무 걱정하지 마.

대장과의 만남은 짧았다. 눈 덮인 들판을 다시 걸어 나왔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에 눈이 녹고 있었다. 햇살은 평화롭게 들판을 적시고 있었다. 소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 저 안에서, 오빠는 내리는 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빠에게 누명을 씌운 그 사람에 대하여 복수를 생각했을까. 아니면 용서를 생각했을까.

소녀가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 나는 매일 기도하고 있어. 오빠가 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복수하는 마음보다는 용서하는 마음이 더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오빠가 그런 진리를 빨리 깨우치게 해 달라고.

그것은 소년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녀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소녀는 순결해 보였다. 지극히 단순해 보였다. 지극한 단순함이 사물의 본성을 드러내어 그 형태를 밝게 만드는 것일까. 면회실에서 눈물을 흘리던 소녀의 얼굴은 이미 활짝 열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순수한 영혼에서 피어난 소녀의 참모습일 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녀를 바라보는 안경의 눈도 한층 밝아 있었다.

그러나 용서하는 마음이 더 아름답다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동의할 수 없었다. 용서라고? 그 악동자식을 용서해야 한다고……! 음모로서 비열하게 대장을 망쳐버린 악동무리를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오히려 가슴 깊은 곳에서 격렬한 회오리가 치밀어 올랐다. 대장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대장이 용서한다고 하여도 소년이 참지 않을 것이다. 가슴 밑바닥에 쌓인 분노를 결코 삭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분노 탓일까. 여린 햇살이 투시되고 있는 파란 겨울 하늘은 소년의 마음만큼이나 싸늘하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새털구름이 비켜가는 하늘에 아까 본 검은 새가 여전히 혼자 먹이를 찾아 빙빙 돌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길고 추웠다. 암울한 동면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해 겨울, 깊은 동면에 든 것처럼 소년은 다만 웅크려 있었을 뿐이었다.

   
 

*

3학년이 되었다. 3월, 개학과 더불어 전교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악동이 당선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악동을 지지한 학생들보다도 선생님들이 더 희희낙락하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악동을 아주 훌륭한 학생이라고, 대장부라고, 기개가 넘치는 청년이라고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칭찬했다.

심지어 교장 선생님까지 월요일아침 전교생이 집합한 조례시간에서 악동의 당선을 축하한다고, 악동은 그 누구보다도 장래가 촉망되는 아주 능력이 출중한 학생이라고 비행기를 태웠다. 그것이 소년과 안경을 더욱 메스껍게 했다. 그 훈시가 있을 때 운동장 뒷자리에 선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소요가 일어났다.

떠도는 말에 Y고등학교의 실질적인 이사장이기도 한 악동 아버지가 악동을 학생회장에 당선시키도록 정기적으로 선생님들을 유흥 술집으로 데려가 술을 사주었다고 했다. 그에 보답하듯 악동이 학생회장에 당선되자, 선생들은 비싼 양복상품권에다 특별상여금까지 챙겼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장이 있었다면, 악동은 결코 학생회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음모와 계략으로써 대장의 미래를 난도질해버린 악동이 학생회장이 되었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부조리였다. 그것이 소년의 가슴에 더 큰 분노의 씨앗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조리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선생이란 작자들이 이에 편승하여 오히려 이를 미화하고 있다니. 그것은 분노를 뛰어넘어 현실과 기성세대에 대한 엄청남 회의를 소년에게 심어주었다. 선생들까지, 명색이 교장이라는 사람조차도 돈 앞에 침을 질질 흘리며 헤헤 거리는 꼴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데도 아무 말도,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이 현실, 이 무력감, 소년은 나중에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고, 이것이 소년을 더욱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게 했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서있는 플라타너스 가지에서 새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연약한 새움이 딱딱한 나무껍질을 뚫고 나오는 힘은 어디에서 솟는 것일까. 딱딱한 나무껍질이 불의이고 모순이라면, 연약한 새움은 정의일 것이다. 새움은 돋아나고 있었지만, 대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봄이 무르익고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연초록빛으로 햇살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봄 햇살이 퍼지는 것처럼 소년도 조금씩 기운을 차려가기 시작했다. 고교 3년이란 막바지 학창시기, 대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가난한 시골 농사꾼인 부모님과 고향 마을 어른들을 생각했다.

봄도 가고 플라타너스 잎이 짙은 녹음으로 우거졌다. 짙푸른 잎사귀 아래, 왕매미가 힘차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매미는 7, 8년 동안을 캄캄하고 음습한 땅속에서 유충으로 지내다가, 어느 맑고 상쾌한 여름날새벽, 단단한 땅을 뚫고 밝은 세상으로 나와 저렇듯 힘차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대장도, 다만 지금은 매미유충처럼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도래할 맑고 상쾌한 새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안경도 그랬다. 안경도 소년처럼 대장은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둘은 손을 잡고 어금니를 꽉 다물곤 했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 이런 세상은 만들지 말자. 저 악동 같은 자식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은 만들지 말자. 돈 앞에 침을 질질 흘리며 헤헤거리는, 저 쓸개 빠진 선생들이 없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 희망을 갖자. 역사는 언젠가는 바뀐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 우리가 미래의 주인공이 되자. 밝고 찬란한 새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다.

짙푸른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누렇게 변색되어 쪼그라들었다. 쪼그라든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높았다.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 몇 조각이 외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대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잎사귀를 떨어뜨린 플라타너스 가지가 차가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바람은 매섭고 잔인했다. 플라타너스가 두꺼운 껍질로 몸을 감싼 채 다시 깊은 동면에 빠져든 것처럼, 대장도 이 매서운 계절에 깊은 동면에 빠져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장은 그 깊은 동면상태에서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도래할 자신의 밝은 새날을 꿈꾸며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동면은 새날을 맞아 더 힘차게 날기 위한 일시적인 시련일 뿐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 반드시 새날은 온다.

여전히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2월, 소년은 졸업을 했다. 그러나 함께 있어야 할 대장은 없었다.

― 연재 제27회 <사랑과 용서 2>은 2019. 4. 22.(월) 에 게재됩니다.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26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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