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12회 <진실 게임>
Symphony in C minor ‘Fate’

 

진실 게임

신경민과 박춘만의 진술은 최경호가 범인이라는 유력한 정황증거였다. 그리고 피살자의 목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이 최경호의 것이라는 감정결과는 그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증거만으로도 구속영장 신청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김용훈 검사는 더욱 완벽한 증거를 요구했다. 재선거를 앞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점에서 현직 국회의원 보좌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범행에 사용된 도구조차 발견되지 않았고, 범행이 최경호의 단독범행인지, 아니면 공범이 있었는지, 정해현의 지시를 받은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조사가 보완되어야 한다고 했다.

긴급체포 후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신청하던가, 아니면 석방해야 한다. 최경호의 집과 정해현의 선거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기를 기대했으나 다른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어쩔 수 없이 최경호의 자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박경일과 최수환은 아침부터 다시 실랑이를 시작했으나 최경호는 끝까지 자백하지 않았다. 무려 16시간 동안이나 기차레일 같은 평행선을 달리다 자정을 넘겼을 때는 추궁을 하는 두 사람도 이를 부인하는 최경호도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였다.

이틀 동안 꼬박 밤을 새다시피 한 박경일이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옷도 갈아입고자 집에 왔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아내는 그때까지 자지 않고 TV를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경일이 거실에 들어서서 막 점퍼를 벗어 들었을 때 갑자기 TV화면이 바뀌면서 낯익은 정시영의 얼굴이 나타났다.

― 긴급속보입니다. 본 KNB방송 보도국에서는 김인환 씨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익명의 제보자가 보낸 음성메시지를 방금 입수하였습니다.

정시영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침울하고 축축하게 젖은 남자음성이 TV를 타고 나왔다.

― 두 번째 정보, 7×푸2407!

7×푸2407! 자동차번호? 최경호의 차는 아니고, 혹시 공범의 차량번호? 박경일이 얼핏 생각하고 있는데, 점퍼주머니에 든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시영이었다. 금방 네모상자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 나야, 보도 봤어?
― 그래 방금 봤어. 넌 잠도 안자냐. 제발 잠 좀 자자.

― 지금 잠이 오게 생겼냐? 너 방금 본 그 수수께끼 같은 숫자가 무언지 생각해 봤어? 무슨 암호 같기도 한데 말이야.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없어?
― 글쎄, 얼핏 보면 자동차번호 같기도 한데. 혹시 차 넘버가 아닐까?
― 야, 그렇다면 빨리 차를 수배해야 할 것 아냐? 지난번 김인환처럼 죽고 난 뒤에 또다시 시체 치우러 갈 거야. 경찰이라는 작자가…….

정시영이 고함을 빽 질렀다. 그러고 보니, 그 말이 일리가 있었다. 만약 TV에서 흘러나온 ‘7×푸2407’이 자동차번호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 차 안에 누군가가 피살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박경일은 곧바로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 7×푸2407 번호 차량을 긴급 수배해.
박경일은 다급해졌다. 이틀 동안 밤샘으로 피곤에 절어있는 몸이었지만 한가하게 잠을 잘 형편이 아니었다. 박경일은 옷을 벗으려다말고 다시 집을 뛰쳐나왔다. 

*

방송국에 제보된 정보의 숫자가 자동차번호일지도 모른다는 박경일의 추측은 빗나갔다. 박경일이 수배토록 한 7×푸2407번 자동차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어떤 보고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전 내내 정시영이 보내는 메시지가 성화를 부리고 있었지만, 박경일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책상에 앉아 잠시 졸고 있는데, 김용훈 검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최수환과 함께 곧바로 검찰청의 자기 방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아마 최경호의 영장신청 때문일 것이다. 최경호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기까지 허용된 시간은 채 세 시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박경일과 최수환이 504호 검사실로 들어서자, 김용훈 검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미리 복사하여 준비한 사건기록철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그것은 복사된 법원공판 기록이었다. 그 기록의 사건번호란에 ‘7×푸2407’이라는 숫자가 기재되어 있었다.

― 이 기록 속에 나타나는 사람들 모두에 대해 조사해 주십시오. 어제 방송국에 제보된 음성메시지는 차량번호가 아니라, 이 기록의 사건번호였습니다.

그랬었구나. 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경찰이나 검찰에서 형사 사건의 사건번호를 발생순으로, 가령 ‘××형제0000호’라고 순서에 따라 번호를 매겨가듯이, 법원의 형사재판도 각 사건의 종류와 심급에 따라 사건번호를 매겨간다. 그러니까 음성메시지가 보내온 ‘7×푸2407’이라는 숫자는 자동차번호가 아니라 197×년도에 있었던 법원의 소년보호 사건을 나타내는 사건번호였다.

김용훈 검사는 박경일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 사실을 알고 그 기록을 미리 복사하여 준비해 두고 두 사람을 불렀던 것이다. 197×년 사건이라면 아주 오래된 사건인데 그 기록이 폐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 특히 이 기록 중에 나타난 사람 중 김준하와 박형기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해 주십시오. 김준하와 박형기가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사건 당일 두 사람의 행적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 철저하게 조사해 주십시오.
김용훈 검사는 이미 사건기록을 검토한 모양이었다.

― 그리고 이 사건기록 중 중요한 부분을 KNB방송국에 넘겼습니다. 곧 보도가 나갈 겁니다.
박경일은 정시영이 이미 김용훈 검사를 만나고 갔다고 판단했다. 젠장! 명색이 수사기관에 있는 자가 기자에게 차인 꼴이라니. 박경일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 음성메시지의 주인공이 이 사건번호를 언론에 제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메시지를 보낸 자의 의도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분명 이 메시지의 주인공은 과거에 있었던 이 사건번호의 사건이 이번 김인환 피살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제보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수사진행 과정이 낱낱이 공개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건번호를 의도적으로 방송국에 제공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김용훈 검사가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말했다. 그럴 것 같았다. 범인이거나, 범인이 아니더라도 음성메시지의 주인공은 언론을 이용하여 사건의 내막이 세상에 그대로 알려지도록 의도적으로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음성메시지의 주인공은 수사기관을 상대로 진실게임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도전을 한 것이다.

―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낸 자의 진짜 숨은 의도는 다른데 있지 않을까요?
박경일이 말했다.

― 물론 그렇겠죠. 그러나 그건 차후의 문제고, 현재로서는 일단 메시지의 의도대로 따라주는 것이 범인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기록을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김용훈 검사가 두꺼운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김용훈 검사도 아마 꼬박 밤을 샌 모양이었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 그러나 음성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최경호가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나타났는데, 최경호의 신병처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최수환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범인은 아니더라도, 범인으로 보이는 자의 음성메시지가 언론에 보도된 이상 최경호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한다면 정해현은 물론이고 정치권에서 그냥 있겠습니까? 검찰이 여당의 선거를 방해한다고 발칵 뒤집혀지겠지요.
김용훈 검사가 이번에는 목이 타는지 스스로 종이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말했다.

― 그러나 최경호의 머리카락이 피살자의 목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정 여의치 않으면 히로뽕으로 구속시켜 놓고 조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최수환은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음성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경호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 그렇긴 하지만 이 기록에도 정해현과 최경호가 등장하니까, 먼저 이 기록에 나타난 인물들을 조사해 본 후에 다시 최경호를 소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자백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는 석방할 수밖에요. 최 경위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경호는 반드시 잡습니다. 문제는 최경호의 배후입니다. 서두르다가 큰 물고기를 놓치게 됩니다. 신중하게 해서 조폭 히로뽕 모조리 일망타진해야 합니다. 제가 분명히 약속하겠습니다. 두 분 수고와 공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김용훈 검사의 말에서 결기가 내비쳤다. 김용훈 검사가 이번에는 큰 유리컵에 다시 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말했다.

―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사건 기록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에 대하여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해 주십시오. 메시지의 주인공이 이 사건번호를 왜 방송국에 보냈을까요. 그것은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하라는 언론을 통한 무언의 압력이 아니겠습니까. 범인이던가, 아니면 최소한 범인을 아는 자가 분명합니다. 이런 자가 수사기관을 조롱하며 달려드는데 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두 분께서 좀 더 수고해 주십시오.

김용훈 검사는 다소 흥분해 있었다. 수사지휘 검사인 자신을 조롱하듯 언론에 단서가 될 만한 사건번호를 제공하는 음성메시지의 대담한 발상에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강골검사는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 김 검사님 말이야. 모타리는 콩알만 한데, 강단이 있어.
돌아오는 차 속에서 최수환이 말했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에 두터운 안경을 낀 김용훈 검사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이 과제물 같은 수사기록을 안고 경찰서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오늘도 일찍 퇴근하기는 틀려버린 일이었다.

최수환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이끌었다. 두 사람은 경찰서 후문 근처 삼겹살 식당으로 갔다. 최수환이 고기 몇 조각을 불판 위에 올려놓고 굽고 있을 때, 식당 벽체 선반 위에 놓인 조그만 TV에서 저녁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화면에 정시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 김인환 씨 피살 사건 관련 소식입니다. 어제 본 방송국에 제공된 음성메시지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정시영의 멘트가 잠시 멈추고 어젯밤 TV에서 들은 침울하고 축축한 음성메시지가 흘러나왔다.
― 어제 본 방송국에 제보된 ‘7×푸2407’이란 숫자의 의미는 법원의 공판기록 사건번호임이 밝혀졌습니다. 법원관계자는 이 숫자는 197×년에 있었던 2407번 소년보호 사건이라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사건번호가 기재된 기록표지가 나타났다. 김용훈 검사로부터 받은 사건기록 표지와 같았다.

― 이에 따라 특별수사본부는 음성메시지가 제공한 이 사건기록에 나타난 피의자, 피해자 등 모든 관련자에 대한 사건 당일의 행적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한편 검찰은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긴급체포한 최경호 보좌관에 대한 구속영장은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 최경호 보좌관은 석방되었습니다.

이어 화면이 바뀌며 경찰서 문을 나서는 최경호의 얼굴이 나타났다.
― 나는 무죄입니다. 이것은 음모입니다. 검찰과 경찰은 사건을 조작하여 나를 범인으로 몰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정의가 살아있고, 법이 살아 있는 한 나의 무죄는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최경호가 유치장을 나와 보도진들에 둘러싸여 인터뷰하는 장면이었다. 이어 정시영의 멘트가 다시 이어졌다.
― 오늘 석방된 최경호 보좌관은 여전히 범행 사실을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주목됩니다. 이상 KNB 뉴스 정시영입니다.

박경일은 최경호가 조사실에서 씩씩대며 퍼붓던 말이 귓가에 쟁쟁 울리는 것 같았다.
― 당신 둘 말이야. 어디 두고 봐.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닦달해 놓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너희 둘 다 모가지 날려줄 테니까 목에 때 씻고 기다려.
TV화면에서 적의에 찬 최경호의 눈빛이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 저 자식 말이야. 내 손으로 반드시 잡아넣고 말겠어.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왜 석방시키는 거야. 이런 우라질!
최수환이 반주로 삼아 마시던 소주병을 들어 그대로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바깥에는 어둠이 짙어가고 가고 있었다. 최경호의 말대로 누군가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최경호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

이날 밤, 남포동 소재 동명빌딩 25층 2516호 부일물산(주)

두꺼운 철제 출입문 옆 벽에 세로로 부일물산(주)라는 음각으로 새겨진 작은 나무간판이 붙어 있었지만, 사실 이곳은 정해현의 은밀한 비즈니스 룸이었다. 평범한 사무실처럼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호화로운 대리석 테이블 룸과 각테일 바에 침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송철준의 M룸살롱 VVIP실을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룸 테이블 디귿자 모서리 소파에 정해현이, 그 오른쪽 소파에 송철준이 앉아 있었다. 조도가 낮은 붉은 조명 탓에 송철준의 푹 꺼진 눈이 진짜 해골처럼 음침하게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반이 넘게 비워진 25년산 발렌타인 양주병 하나와 안주접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정해현은 이곳에서 정재계 고위층 인사들을 상대로 마약과 도박은 물론 난교파티를 열고는 했다. 물론 마약과 여자는 송철준이 공급했다. 스스로 또는 정해현의 꾐에 빠졌거나 멋모르고 이곳에 한번이라도 다녀간 그들은 제대로 약점을 잡혀 정해현의 정치적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오늘은 정해현 혼자였다. 얼음 잔에 따른 양주를 한 잔 비운 정해현이 말했다.

― 이틀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 것 같아. 아무래도 최경호 이 자식이 정말 김인환을 죽인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죽은 김인환의 목에서 제 머리카락이 나올 수 있겠나.
―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TV에 나온 그 사건번호 말입니다. 옛날 그 사건이 아닙니까? 최경호 이 자식, 그때 제 배때기에 칼을 쑤셔 박은 놈입니다. 살인을 하고도 남을 새끼입니다.

― 그랬지. 그런데 얼마 전에 주걱턱을 붙여줬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담가 줄 놈이 있다고 해서 그랬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 재선거가 끝나기 전까지는 어떤 사소한 말썽도 생겨서는 안 돼.
―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경호 이 자식, 아까 초저녁에 룸에 왔다갔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취조한 짭새 두 새끼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씩씩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있지 못하겠다고 약을 달라고 보채기에 약 좀 줘서 보냈습니다.

― 이젠 아예 약에 절어 사는 모양이군. 살인혐의에다 마약까지……, 정말 큰일 낼 자식이야. 만약 이런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선거는 하나마나야. 송 회장이 이 자식을 단단히 단속해야 해. 이번 재선거만 끝나면 이 자식부터 정리할거야.

― 최경호 그 새끼는 내 손 안에 있습니다. 약에 절은 놈은 약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옛날 그 사건을 방송국에 보낸 놈이 누구일까요? 혹시 그때 그 자식이 아닐까요? 그때 그 사건으로 소년원에 간 그 새끼 말입니다.

― 뭐라고? 그 일은 벌써 이십년도 더 지난 일인데……. 잠깐, 그러고 보니 뭔가 좀 찜찜해.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그 새끼가 꾸민 일이라는 건가? 최경호가 그 새끼의 덫에 걸려들어 일을 저질렀다는 얘기가 아닌가. 설마……?
― 그때 사건이 방송에 보도가 되고……. 일이 돌아가는 게 어쩐지 심상치 않습니다. 그 새끼가 보통 놈입니까? 공부도 전교 일등한 놈이라면서요.

― 그랬지. 정말 그 새끼가 그랬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그 새끼라면 이번에는 아예 숨통을 끊어놔야 해. 송 회장도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정해현이 낯빛까지 변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진짜 그 새끼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나……, 에이, 설마요.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다행히 오늘 최경호가 풀려났기 망정이지, 자칫 이번 선거 완전히 말아먹을 뻔 했습니다. 오늘은 다른 생각 마시고 몸이나 실컷 풀고 가세요. 계집 하나로는 성이 차지 않겠죠. 특별히 둘을 함께 올려 보내겠습니다. 미리 돈을 좀 뿌리면 계집들이 특별서비스를 해 줄 겁니다. 그 돈 내가 다시 회수할거니 아까워하지 마시고요.

송철준이 빙긋 웃으며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정해현은 양주병에 남아있는 술을 얼음 잔에 모두 따라 냉수처럼 마셨다. 이내 취기가 확 오르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해골의 말대로 정말 그 자식일까? 그 새끼가 또다시 내 길을 막는단 말인가? 그러나 대권으로 가는 내 앞길에 걸리적거리는 놈은 무조건 밟고 간다. 그래도 일어나는 놈은 아예 죽이고 간다. 이제까지 그래 왔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정해현은 일어나 각테일 바로 가서 다시 양주 한 병을 꺼내와 얼음 잔에 가득 따라 마셨다. 이미 취기에 젖은 뇌세포가 접착제처럼 한 가지 생각에 달라붙었다. 김인환 그 작자를 가볍게 보다가 이번에 정말 낭패를 볼 뻔 했다. 그런데 최경호가 그 자식의 덫에 걸려 김인환을 죽였다면?

그래, 그 새끼의 다음 목표는 분명 내가 될 것이다. 미리 알았기에 망정이지, 꼼짝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뻔 했다. 그러나 나는 김인환 그 작자처럼 호락호락 당하지 않는다. 아니, 내가 먼저 너를 죽인다. 얼음 잔을 쥔 정해현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방범 CCTV를 겸한 인터폰 화면에 앳된 두 여자의 모습이 비췄다. 해골이 올려 보낸 두 여자였다. 정해현은 리모컨으로 이중 잠금장치가 된 출입문을 열었다.
― 유리입니다.
― 애리라고 합니다.
두 여자가 들어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하며 차례로 말했다.

방금 인터폰 화면에서 본 것보다 더 어려 보였다. 둘 다 짧은 스커트 안 팬티스타킹에 감싸인 미끈한 각선미가 일품이었다. 찰싹 달라붙은 분홍색과 흰색 티셔츠 안에 봉긋 솟아오른 탱탱한 유방이 풋사과처럼 싱싱하게 보였다.
― 제가 먼저 술 한 잔 드릴게요.
유리라는 여자가 탁자 위에 놓인 양주병을 들어 입에 머금고 정해현의 목을 껴안고 키스를 했다. 여자의 입을 타고 흘러드는 술이 정해현의 입속으로 흘러들었다.

― 아이, 오빠, 제 입술값 먼저 주셔야죠?
유리가 정해현의 목을 껴안고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정해현이 의자 옆 보조탁자 서랍에서 지폐 한 다발을 꺼내 일어나 띠를 풀고 천장을 향해 뿌렸다. 만 원짜리 지폐가 붉은 조명 불빛을 받아 낙엽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 우와, 우리 오빠 너무 너무 멋져.
유리가 분홍색 티셔츠를 머리 위로 끌어올려 벗고 콧소리로 말했다.
― 아이, 오빠, 우리 두 사람인데 한 다발 더 주셔야죠.
유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브래지어를 풀고 앵두 같은 유두를 정해현의 입속에 넣으며 말했다. 정해현이 두 손으로 유방을 주무르며 유두를 입속에서 굴리다가 다시 한 다발을 꺼내 띠를 풀고 돈을 뿌렸다.

― 고마워요, 오빠. 오빤 정말 너무너무 멋쟁이!
정해현의 목에 매달린 유리가 폴짝 뛰어올라 다리로 정해현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으며 말했다.
― 너도 따라 들어와.
정해현이 유리의 허벅지와 허리를 번쩍 들어 안고 침실로 걸어가며 말했다.
― 아이, 오빠, 서둘지 마세요. 오늘 저희 둘이 오빠를 홍콩으로 보내 드릴게요.
유리가 정해현의 뺨에 연신 볼을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최경호 이 자식이 그 새끼의 덫에 빠졌다. 그리고 김인환이 살해되었다. 그 새끼의 다음 목표는 분명 나다. 긴장하고 화가 날 때는 언제나 주체 못할 욕정이 치솟았다. 지금이 그랬다. 밤새도록 어린 두 여자를 거칠게 유린해도 제대로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침실로 들어간 정해현이 유리를 침대에 던지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 아이, 오빠, 급하기는…….
유리가 침대에서 팬티스타킹을 벗어 완전 나신이 되었다. 팽그르르 몸을 굴려 침대에서 다시 내려온 유리가 정해현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바지벨트를 풀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유리가 정해현의 페니스를 입에 넣고 혀끝으로 귀두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때 애리는 바닥이며 테이블 위에 떨어진 돈을 줍고 있었다. 한 장도 빠짐없이 주워 돈을 핸드백에 넣은 애리가 양주병을 들어 주둥이를 입에 대고 꿀떡꿀떡 마시기 시작했다.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를 몇 번 뿜어낸 애리가 혼잣소리로 말했다.
― 변태 새끼! 올라갈수록 썩은 냄새뿐이야. 저런 인간이 국회의원이라니!

― 야, 너는 뭐해? 빨리 들어와.
침실에서 정해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예, 사장님, 바로 갈게요.
애리가 수박 안주에 담배를 눌러 끄고 서둘러 옷을 벗고 완전 나신으로 침실로 뛰어가며 말했다. 

*

같은 날 밤, 거제동 소재 로얄아파트 106호

딩동, 인터폰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에 검은 사각 서류가방을 든 최경호의 모습이 비쳤다. 박영애는 미리 준비해 둔 수면안대를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 자기야. 잠깐만, 눈을 감아요.
― 왜 그래?
― 글쎄, 눈을 감으라니까요.

박영애가 최경호의 눈에 검은 수면안대를 채우고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 자,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
최경호는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 잠깐만 앉아계세요. 제가 말할 때까지 절대 눈을 뜨면 안 돼요. 알았죠?
최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대로 가려진 어둠속에서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자, 이제 됐어요. 눈을 떠요.
― 어! 이게 다 뭐야?
안방 침실이었다. 전등은 꺼져 있고 대신 안방으로 옮겨놓은 거실식탁 위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촛불 일곱 개가 밝혀져 있었다. 식탁에는 케이크와 와인과 함께 푸짐한 음식도 차려져 있었다.

― 당신이 정말 살인자로 잡혀가는 줄 알았어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이제 풀려났으니 우리 축하파티해요.
박영애가 최경호의 옆에 서서 말했다. 박영애는 브래지어와 팬티도 입지 않고 잠자리 날개 같은 짧은 반투명 슬립만을 걸치고 있었다. 촛불 불빛에 은은하게 비치는 검은 체모와 갈색 유두 색깔이 고혹적이었다.

박영애가 최경호의 양복 상의를 벗겨 옷걸이에 걸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 자, 우리 와인부터 한 잔 해요.
박영애가 투명유리 와인 잔에 붉은 와인을 따랐다.
― 이번 재선거 마치고 나면 정 의원이 반드시 당신을 내칠 거예요.
와인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면서 박영애가 말했다. 최경호는 그새 와인 대신 독한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 혼자 화장실에 가서 가방에 넣어온 필로폰 주사도 스스로 한 대 맞은 뒤였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생각해 봐요. 살인혐의를 받고 있고, 마약까지 하는 당신을 계속 곁에 둘 것 같아요. 정 의원은 반드시 당신을 내치려고 할 거에요. 그러니 미리 대비를 해야 해요.
― 어떻게?
최경호의 뇌세포는 이미 술과 마약기운에 젖어들고 있었다.

― 이번 재선거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 의원의 약점을 단단히 잡아야 해요. 비자금도 최대한 많이 빼돌려 놓고요.
― 그는 날 내치지 못해. 내가 입만 벙긋해도 그의 정치생명은 끝장이야. 걱정할 거 없어.
― 어찌 이리 순진하실까. 정 의원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요.

박영애가 핀잔을 주듯 입술을 내밀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어린애에게 타이르듯이 소곤거리며 말했다.
― 내 말대로 해야 해요.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어요. 그리고 송 회장의 마약루트도 알아두어야 해요. 그래야 송 회장도 당신을 함부로 못해요. 그렇지 않으면 난 당신을 떠날 거예요. 팽을 당해 오갈 데 없는 당신 앞날이 훤하게 보이는데 내가 왜 당신 곁에 있겠어요.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알았어. 알았어. 이제 그만 자자. 빨리 당신을 품고 싶어.
― 내 말대로 할 거죠? 정말 그렇게 할 거죠?
― 알았어. 알았다니까. 당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나는 뭐든 하잖아. 이번에 오천만 원을 빼돌리는 걸 보고도 그래? 이제 그만 자.
― 아, 당신은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이리 오세요. 자자, 옷을 벗겨드릴게요.
박영애가 최경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어머머, 당신 것, 벌써 엄청 커졌어요. 자자, 이리 오세요.
박영애가 최경호를 이끌어 침대에 눕혔다.
― 오늘은 내가 당신을 황홀한 천국으로 보내 줄게요.
박영애가 최경호의 벗은 몸 위로 올라가 슬립자락을 끌어올려 벗으며 말했다.

최경호가 팔을 뻗어 박영애의 유방을 움켜쥐었다. 박영애의 손에 잡힌 페니스가 그녀의 질 속으로 삽입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그러나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혀가 마비가 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하얀 별똥별이 쏟아져 내렸다. 무슨 말을 하는 박영애의 목소리가 벌떼소리처럼 귀에서 왕왕 울렸다. 최경호는 왕왕거리는 벌떼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 2019. 1. 7.(월) 연재 제13회 <새로운 용의자>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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