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님 혜존

                                   조 승 래 

쌓여만 가는 책장에서
본 책, 읽다가 접어둔 책, 안 본 책 등을
이삿짐 정리하듯 버릴 것 가리다가

세상 떠난 친구의 학위 논문도
고인의 서재에서 찾아온 내 것도
고민하다가 그냥 버리기로 한다

준 사람도 없고 다시 읽을 사람도 없는
많은 책이 그저 폐지로 되어가고
좋은 글만 디지털화되어 보존되는 줄 알면서도

첫 페이지에 “00님 혜존” 이라 썼던
그 책의 가치는 읽은 사람의 기억 속에만 있고
“받아 간직하여 주십시오(혜존)” 라고 쓴 사람의 기억은

기뻤다가 조바심 났고
무덤덤하다가
그야 그렇지 뭐,

❚작가 노트

사람들이 시집을 읽지 않고 시집은 시인이 출간하여 다른 시인에게 나누어 주는 이른바, 품앗이하는 것 아니냐는 어느 시인의 말에 많이도 씁쓸했다. “그래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응수했지만 많은 부분이 긍정되는 사실이었다. 어떤 시인은 같은 시집을 또 보내 준다. 공감하고픈 마음 이해가 된다.

이러다가 종래에는 종이책은 아예 다 사라지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도 생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 계속 시집을 내는 것 아닐까 싶다. 긴 시간을 고민하고 가슴 졸이고 울음을 삼키고 쓴 시집을 지인들에게 보내면서 “00 선생님 혜존, 00 선생님 청람, 00 님에게, 00에게” 등 여러 표현으로 서명하여 보낼 때는 가슴이 부풀고 뿌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으로는 위로한다.
‘기뻤다가 조바심 났고 무덤덤하다가 그야 그렇지 뭐,’

❚조승래(趙勝來) 시인은… 

▲ 조승래 시인

경남 함안 출생으로 201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몽고조랑말』, 『내 생의 워낭소리』, 『타지 않는 점』, 『하오의 숲』, 『칭다오 잔교 위』, 『뼈가 눕다』, 『어느 봄바다 활동성 어류에 대한 보고서』, 임재도 시인과 공동시집 『공감 여행』, 김일태 등 7인 공동 시집 『길 위의 길』등을 펴냈다. 『칭다오 잔교 위』는 2015년 세종도서 문학 나눔에 선정되었고, 계간문예문학상(2020), 조지훈 문학상(2021)을 수상하였다.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겸임교수(경영학박사)를 했고, 가락문학회, 시와시학회, 시향문학회, 함안문인회 동인 및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와 文學의 집 서울 이사로 활동 중이다.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국내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 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