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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숙 시조집 『사랑은 주소 없이도 영원히 갈 집이다』 출간
- 겸손한 시인의 친절한 시집
문희숙 시조시인이 첫 시집 『짧은 밤 이야기』, 두 번째 시집 『둥근 그림자의 춤』에 이어 세 번째 시조집 『사랑은 주소 없이도 영원히 갈 집이다』를 출간하였다.
1996년 <중앙일보 지상백일장 연말 장원>으로 등단하여 현재까지 30여년 가까이 문단활동을 해 오면서 세 번째 시집이라면 발표한 작품이 그리 많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다작보다는 한편의 시를 눈물로 쓰고 한편의 시에 영혼을 싣는 시인이다.
세상일의 70%가 운명이라 한다면 / 사실은 게을리 살아도 / 사는 데 지장은 크게 없을 것이다 / 대체로 운명대로 될 것이므로… // 그러나 나는 / 그런 진부한 결정론에 동의하지 못한다 // 내 앞에 내리던 눈, 비와 / 충분히 쓸쓸했던 햇빛에 대한 고마움으로 / 간혹 물집 난 발톱을 갈아 끼우며 / 내 배를 끌고 언덕을 오른다 /
이 시집을 내는 시인의 말이다. 시인의 이 말에서 ‘물집 난 발톱을 갈아 끼우며/ 내 배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것’은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진 어느 성인처럼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행의 길을 선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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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石鏡
저를 닦아, 맑은 거울 되고 싶은 돌이 있다
바람에 길들지 않는 찬 붓 하나 들고
돌 귀를 빗질하면서 너는 참 따뜻했다
<작가노트>
사람마다 타고난 무의식이 원하는 꿈같은 게 있다.
무엇인가 되려는 잠재된 꿈은 일생을 거기로 데려간다.
작은 돌에게도 그런 무의식의 중력이 있어 모나고 물때 낀 저를 닦아 설레이며 스스로를 들여다볼 거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구르면서 생이 따뜻해지는 돌, 돌도 숨은 꿈을 향해 모난 제 구석을 늘 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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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실린 첫 번째 시 「석경石鏡」의 전문이다. 단 3행의 짧은 문장에 인간 내면에 잠재된 꿈과 의지, 그리고 따뜻한 인성까지도 함께 응축시켜 놓았다. 깔끔한 문장과 평범한 시어에 넘쳐나는 서정성은 더 부럽다. 투박한 돌이 거울이 되기까지 연마하고 또 연마하여 빚어낸 대가의 「석경石鏡」이다.
이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63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런데 시인은 위에서 소개한 「석경石鏡」처럼 이 시집에 실린 63편 모든 시에 <작가 노트>를 달아 독자와 쌍방향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작가 노트>를 통하여 한 편의 시가 탄생한 배경과 시로 나타낸 시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작가 노트>는 시의 난독성과 난해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준다는 점에서 시의 대중화에도 기여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 시집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겸손한 시인의 친절한 시집>이라 하겠다.
시인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귀국하기까지 10여 년간 중국 사천성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이곳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사원 <샹그릴라>에서 ‘사랑은 주소 없이도 영원히 갈 집이다’(「귀가―샹그릴라」)라는 깨달음을 얻고, 사하라, 이집트, 이란, 중앙아시아, 고비 사막 등 세계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길디긴 생의 주랑 끝에 매달린 거미’(「뒷문 밖에는―모래등에서」)를 보았다.
시인은 이런 미답의 공간과 시간을 여행하면서 얻은 깊은 내면과 확대된 시선으로 현재 고향 인 밀양으로 돌아와 유년의 행복한 기억의 「판화」를 새기고 있다. 이 판화 작업이 끝나면 시인은 아마 다시 ‘쭈글한 시간을 켜고 새들만 넘나드는 닫혀진 국경선을 여는 지도’를 볼 것 같다.(시인의 시 「미명」의 변용)
이 시집에 실린 시인의 시 「판화」 전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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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
빗길에 서 있는
연잎 보면 생각 나
내 귀에 속삭이던
물방울의 숨소리
하굣길 젖은 어깨를
감싸주던 그 우산
청보리 키 너머로
탱자꽃이 부풀 때
꼬리 긴 완행열차
아침 기적 불어대며
속살이 환한 개천을
둥글게 돌아갔다
양철문 옛집 벽엔
목이 긴 연잎 쓰고
여전히 빠진 이로
활짝 웃는 아이들
적막을 장식한 사진
거미줄에 감겨있다
<작가 노트>
시간이 갈수록 가까운 기억보다 먼 기억이 또렷하다 한다.
내가 가진 기억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마을과 친구들, 학교에서 집까지 오던 길에 있던 무궁화 울타리, 연잎 향, 넝쿨장미… 그런 수없는 가지들이 행복한 기억으로 아직도 또렷한 판화처럼 내 기억에 새겨져 있다.
좋은 기억은 늙지 않는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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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소금 시인선 143
사랑은 주소 없이도 영원히 갈 집이다
지은이 문희숙
펴낸이 임세한
펴낸곳 시와 소금
126페이지
값 10,000원
― 기사제공 // 임재도 부울경뉴스 총괄본부장, 소설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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