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산에서

                                                 박 미 정 

가파른 길
안에 두고 사는 산
단풍 짓는 것에 흘리어

산행연습 없이 걸음 한
낭만의 숨소리
거칠어지는 3부 능선이다

오기傲氣로 배낭 멘 것도 아닌데
후회는 오기傲氣를 낳아
오를 수밖에 없다가

바람이 회초리가 되었던지
부러진 가지를 꺾어 짚고
바위의 등에 앉았다가 기댔다가

돌아 나온 산마루를 타고
층층 계단 저 아래는
절벽인가 하다가도

굽이굽이 물결치는
단풍의 응원 속에
평지의 포옹은 새 삶인 듯 파안대소

*작가 노트

▲ 박미정 시인

단풍만 보고 떠났다.
한 굽이 넘으면 좋아질 줄 알고 살아온 것처럼 산을 먼저 읽어보지 않고 걷기만 하면 좋을 줄 알았다. 그러다가 중턱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낭패를 보았다. 살다가 부족한 게 운동뿐이겠는가. 걸어온 길 원망과 걸어갈 아득함이 교차하여 힘들었던 산행이었으나 돌아와 보니 꿈길 같다.
약속은 어기려고 있다고 말한 사람이 진저리 난 적이 있다. 다행히 백암산은 나와 약속한 일이 없으니 어길 일이 없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멀리까지 바래다주던 그 산이 좋아 발끝을 힘껏 누르고 목을 쭉 빼고 보고 싶은 가을, 참 아름다운 산길을 걸었다고 기억하고 싶다.

박미정은 시인‧ 수필가‧ 평론가이다. 시집으로 『제라늄의 분홍미소』 외 7권, 수필집 『해무를 벗기다』, 저서 『한국 현대 해양시 연구』 등 다수가 있다. 2007년 <여성문학상 대상>, 2011년 <부산문학상 대상>, 2014년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지역에서 활동하는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 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