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담과 구멍담

                                                 배 혜 경

▲ 청송 송소고택 2017년 5월 촬영

말이 담이 되었던 날들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이 아파 담을 쌓기도 했고, 내 말의 가시에 찔려 누군가는 담을 쌓았을 것이다. 담으로 눈을 가린 날들도 생각한다. 보고 싶지 않으면 담장 아래 숨었고, 담장 위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만 본 것조차 제대로 못 본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다감했던 담들을 떠올려본다. 유년의 허름한 골목 시멘트 담과 우산을 받고 자박걸음을 놓았던 남도 슬로시티의 질박한 흙담, 제주의 높푸른 하늘을 고집스레 받치고 있던 낮고 검은 돌담 그리고 아련한 기억 너머의 담 너머 또 다른 담이다.

아침부터 부슬비가 피부에 스며들 듯 내린다. 봄날 하루를 틈타 나선 길, 차를 달리는 내내 비 비린내가 코를 간질인다. 고택에 들어서면 편안해질 마음을 예감하며 마음이 먼저 달려 고즈넉한 고택 앞에 차를 세우니 비가 어느새 그쳤다. 차분히 내려앉은 하늘 위로 솟을대문이 홍살을 떠받치고 대문 양쪽으로는 길게 담장이 이어져 있다. 문기둥에 붙은 ‘잘 자면 행복하다’라는 멋부리지 않은 글자가 하룻밤 묵어가라고 나그네의 정서를 부추긴다.

그 이름도 늘 푸른 청송(靑松)에는 송소고택이 자리한다. 조선 영조 때 만석꾼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지은 아흔아홉 칸 집이다. 경상북도 민가 양식을 따르며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특색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며 사랑채 기와지붕이 먼저 눈에 든다. 마당의 품이 너르다. 우측 행랑채를 슬쩍 보고 사랑채로 향한다. 기역자 모양의 흙담이 사랑채를 반 이상 가리고 섰다. 흙담은 내 키 높이 정도로, 높지 않은데다 담장을 따라 화초를 심어두어 소박하고 아담한 인상을 풍긴다. 담을 돌아 사랑채로 들어서니, 비를 맞아 후줄근해 보이는 분꽃 한 무리가 담벼락에 기대었다. 강릉 선교장에서도 보았던 내외담과 기능이 비슷하지만 송소고택에서는 훨씬 정겨운 모양새의 이 담을 헛담이라 부른다.

추억의 미각을 돋워주는 ‘헛제삿밥’ 말고 ‘헛’이라는 말이 이렇게 좋은 의미로 들리기는 처음이다. 헛담은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정네들이 아녀자들에게 쉽게 엿보이지 않도록 하고 대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려는 아녀자들도 낯이 붉어지지 않게 해주려는 마음을 담고 있다. 남녀가 서로 삼가는 태도를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예의와 배려심을 갖춘 담이다.

헛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진솔한 마음의 이야기를 꺼낼 기회를 헛말이라는 헛담으로 가로막는 것이다. 자신의 안쪽을 보이는 게 두려워 지레 헛담을 쌓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만추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던 석남사 계곡에는 가녀린 물줄기가 흘렀다. 단풍잎 몇 자락이 투명한 물소리를 따라 흐르고, 바람도 없는 그 길을 나는 말없이 걸었다. 쨍 하고 갈라질 것 같은 하늘과 바싹 마른 땅이 그 물소리로 이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헛말은 말과 말 사이에 발목을 적시는 정도의, 그 물소리 정도면 좋지 않을까. 헛담으로 서로 아끼고 삼가며 유연한 지경(地境)을 이루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헛말은 그저 헛말만 하는 게 아니라 은근한 진심과 배려가 묻은 참말을 하고 있다는 걸 예전엔 미처 몰랐다. 말의 안쪽을 살피는 일이 또한 과제로 남는다.

사랑채를 나와 우측 안채로 들어간다. 마루가 아직 물기로 촉촉하다. 툇마루 옆으로 난 샛문의 문고리를 잡고 삐거덕 밀어본다. 툇마루 위로 아기자기한 문양의 천정이 안채의 뒷마당을 내려다보고, 그 마당을 담이 둘러싸고 있다. 헛담을 놓아 사랑채를 향한 아녀자들의 시선을 막은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안채를 둘러싼 담에는 구멍이 세 개 뚫렸다. 신기하게도 담장 바깥에서는 여섯 개의 구멍으로 보이는 이 담을 구멍담이라 부른다.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지만 구멍담에 눈을 바투 대면 밖이 훤히 보인다. 쌍망원경처럼 구멍 하나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나란히 셋이서 구멍담에 눈을 대고 사랑채에는 누가 왔을까, 바깥세상을 내다보며 희희낙락댔을 아녀자들을 상상해본다.

구멍담에 이어진 사립문을 밀고 나가니 자줏빛 목단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잎을 겹겹이 싸매고도 살짝 풀어헤치고 있는 매무새가 농염한 여인네다. 왼편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헛담의 안쪽이 다시 보인다. 그새 하늘이 훌쩍 높아졌다.

▲ 배혜경 수필가

배혜경 수필가는 부산문인협회 회원으로 수필집 『앵두를 찾아라』(2015)와 영화에세이 『고마워 영화』(2017)를 발간하였다. 전국 수필잡지를 통해 꾸준히 집필하고 있으며, 2017년 부산수필문인협회 제8회 올해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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