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문 희 숙

반닫이 화초장 오래 된 자물쇠엔
푸른 댓잎 펼쳐서 시간을 부채질하는
몇 갈피 비늘로 남은 물고기가 떠 있어

왕들의 무덤 날며 노래하는 새처럼
봄밤이 준 추억의 방부제를 보듬고
반으로 접힌 꿈길이 야광으로 빛난다

바람은 새로 불고 파도는 높아 가도
네모난 문설주에 눈부신 부레로 앉은
다 낡은 반닫이 화초장은 아직 그의 집이다

* 작가 노트

▲ 문희숙 시인

봄이 오고 다시 봄이 와도 나는 다만
한 자리에서 낡아가고만 있다.
집에 붙박혀 이제는 얼룩의 흔적이 되어가며
꽃 시절에 있었던 봄날들과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며
줄어들지도 사그라지지도 않던 생의 반짝이던 꿈을 되돌아 본다.
늘 그랬듯 규정된 사회적 존재로서 과거와 미래의 문턱에 엉거주춤 앉아
그리운 미지의 세계를 헤엄쳐가는 상상의 부레를 만지작거린다.
현실의 집, 넘지 못했으며 내일도 넘지 못할 것 같은 이 문설주에 붙박인 채……
나는 화초장처럼 낡으며 반쯤 열린 채
이곳에서 저곳을 건너다보는 봄에 잠겼다.

문희숙은 1996년 중앙일보 지상백일장 연말 장원으로 등단했으며, 시조시집 『짧은 밤 이야기』(2016년)와 『둥근그림자의 춤』(2017년)를 펴냈다. 2017년 <김상옥시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에서 활동하는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