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문 희 숙

오백 년 쯤 살고 난 졸정원*의 녹나무는
늘 배고픈 바람이나 새를 안고 밤낮 졸더니
마침내 배꼽 밑둥에 쩌억
둥근 문을 열었다

기억이 문을 나서고
두려움도 따라 나갔다
사는 건 돌부리에 부딪히며 내려가는 일
가벼운 어둠이 된 그는 한 칸 더 내려갔다

* 중국 장수성 소주에 위치한 명대 정원, 유네스코 등재, 중국 4대 정원 중 하나.
* 사진은 <부산 좌수영성지(城址)의 푸조나무>, 수령 50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좌우 두 개의 지주목으로 인해 <노부부목>으로 불린다.

* 작가 노트

▲ 문희숙 시인

어쩌면 노인이 된다는 것은 쓸데없는 기억을 놓는 일인지 모른다.
또한 노인이 된다는 것은 요철 같은 이곳에서 두려움이 침범 못하는 즈음에 이른 건지 모른다.
어느 날 수백 년 나이 먹은 나무 아래서 보았다.
그 나무는 마른 세월이 제 몸에 대문짝만한 구멍을 내거나 말거나 아직도 남아 있는 푸른 잎을 흔들며
새도 앉혀주고 바람도 놀게 하면서 지난한 시간을 무위와 무극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삶에 대한 두려움도 가소로운 듯 경외감마저 들게 하며 멋들어지게 늙은 나무에게서
시간의 이빨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가짐과 용기 있게 늙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문희숙은 1996년 중앙일보 지상백일장 연말 장원으로 등단했으며, 시조시집 『짧은 밤 이야기』(2016년)와 『둥근그림자의 춤』(2017년)를 펴냈다. 2017년 <김상옥시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에서 활동하는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