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시인

쌀쌀한 초저녁, 이맘때면 군고구마가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퇴근길 길거리에서 마주치던 군고구마 장수, 누런 드럼통 안에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드럼통 마구리에는 대여섯 개 서랍식 화덕이 있고, 그 안에 노릇노릇 굽히는 고구마들, 살살 껍질을 벗기면 황금색 고구마, 호호 불며 베어 먹는 그 맛은 아련한 향수의 맛이기도 하다.

고구마는 어린 시절의 먹거리였다. 60년대 가난한 농촌에서는 누구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걸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긴긴 겨울밤에는 별미 간식이었다.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차곡차곡 채운 고구마들, 그 위에 고깔 지붕의 짚가리, 한밤중에 그곳에 들러 고구마를 함지박에 꺼내온다.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놋숟갈로 속을 파먹던 날고구마, 시원하고 달달하고 부드러운 그 맛! 아이스크림이 거기 비길까.

그뿐이랴? 고구마의 변주는 실로 다양하다. 먼저 빼때기가 있다. 날고구마를 밭고랑에 파자마자 수동식 절단기로 썰어 밭두렁에 널어 말린다. 말린 빼때기는 소주공장에서 도매금으로 사갔다. 주정(酒精)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말린 빼때기는 아쉬운 대로 간식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음으로 삶은 빼때기가 있다. 삶은 고구마로 만든 빼때기는 마치 오징어 다리처럼 졸깃하다. 마지막으로 고구마 밥이 있다. 고구마 채를 썰어 짓는 고구마 밥, 지금 생각해도 그 밥은 먹기 싫은 개떡보다도 더 지겹다.

이렇듯 고구마에 대한 추억은 끝이 없다. 모르긴 해도 50대 이상으로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다들 엇비슷할 것이다. 길거리에 만나는 군고구마, 허전한 속을 덥혀주고 쌀쌀한 거리에 온기를 돌게 한다. 나아가 냉골 같은 세상에 후끈후끈 군불을 지피는 것 같다.

얼마 전 신문에서 군고구마 기사를 봤다. 백화점 내의 마트에서 즉석 군고구마가 등장했다고 말이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괜스레 기분까지 언짢아졌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벌이라고 군고구마 장사를 못하란 법은 없다. 하지만 이건 상도의를 벗어나는 일인 것만 같다. 뭐랄까? 재벌이 덩치 값을 못한다고나 할까.........

군고구마 장사는 영세상인들의 몫이다. 그들은 겨울 한철 밤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판다. 하루 저녁 아무리 많이 판다고 한들 땅을 사겠는가, 집을 사겠는가. 그걸 팔아 겨울 한철 일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뿐이다. 그런데 군고구마까지 재벌이 팔다니. 선뜻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논리는 청결을 들먹이고 위생을 들먹일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군고구마를 먹고 식중독에 걸린 사람이 어디 있던가? 군고구마는 즉석에서 구워 팔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 재벌이 군고구마 장사까지 넘본다면 도대체 영세상인들은 무슨 장사를 하겠는가.

고래는 본시 큰 바다에서 논다. 태평양 같은 큰물에서 놀아야 제격이다. 고래가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개울로 들어오는 게 될 말인가. 그래서 고래에게 좋은 말(?)로 충고하고 싶다. “고래야, 고래야, 피라미들 먹일랑은 피라미들에게 넘겨주어라. 너는 한시 바삐 큰 바다로 돌아가렴.”

재벌이 파는 군고구마, 그 맛은 어떨까? 나는 전혀 궁금하지가 않다. 내친 김에 이번 주말엔 군고구마를 사러 길거리로 나가봐야겠다. (whpark55@hanmail.net)

글/박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