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는 ‘왜(倭)’자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왜’자 관련 단어만 나오면, 금세 뜨거워지는 느낌이랄까. 여럿이 화젯거리라도 될라치면, 마치 한일간의 축구경기를 보는 것처럼 흥분하기도 하니 말이다. 멀리는 임진왜란에서부터 가까이는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기억까지, 조상 대대로의 아픈 기억이 고스란히 핏속에 DNA로 변한 것 같다. 삼성전자가 소니를 누르고, 현대차가 토요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금에도 역사의 피해 의식은 희석되지 않는 기분이다. 전문학자들마저 소신보다는 일반 여론의 눈치부터 살피는 것 같으니 말이다.

박하 시인

대표적인 사례가 ‘초량왜관’인 것 같다. 초량왜관(1678~1876)은 조선조 임진왜란 이후 부산 초량에 있었던 일본의 상관(商館)이었다. 그 기간만 따져도 무려 200여 년에 이른다. (물론 임진왜란 이전에도 서울의 동평관을 비롯하여 왜관이 있었다.) 이 시기는 조선조 5백 년 동안 조일 간에 가장 화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적 실체인데도 초량왜관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와 달리 일제강점기(1910~1945)는 불과 36년인데도 ‘근대역사관’을 번듯하게 꾸며놓았다. 이 곳은 일제 당시 동양척식회사 부산지사에서 미군정 사무실을 거쳐 미문화공보원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근대기 36년 동안의 역사는 손에 잡히는데, 전근대 200년, 초량왜관의 역사는 실종된 채로 버려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 초량왜관은 복원하지 않을까? 우리 속의 ‘왜(倭)’자 콤플렉스 때문이 아닐까? 전문학자들은 초량왜관 복원의 당위성에 관해서는 백번 찬성하지만, 막상 ‘복원에 대해 여쭙기라도 하면 예외 없이 슬슬 꽁무니를 빼는 형국이다. ‘그 민감한 것에 내가 왜 총대를 메랴?’, ‘잘해야 본전치기, 비끗하면 매국노인양 욕이나 먹을 텐데.......’ 이렇게 구시렁거리는 듯 하다.

지난 9월 초순에 부산초량왜관연구회(회장 최차호) 주관으로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다녀왔다. 필자는 왜관 전문학자도 아니고 문화관광 분야 공무원도 아니다. 다만 부산의 도시 변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설기술자로서 참가했다.

데지마는 나가사키 만(灣)에 있는 인공섬이다. 일본의 막부 후기, 소위 쇄국시대의 대외무역 창구로써 260여 년 동안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던 곳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서양의 첨단문물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메이지유신(1868)’에 성공했다는 것이 이미 정설이 되어있다. 데지마와 초량왜관은 동시대에 개설되어 거의 같은 기간 동안 무역창구로서 기능했던 곳이다. 하지만 그 규모는 초량왜관이 데지마의 25 배에 달했고, 주재 인원 역시 데지마의 최대 20명에 비해 무려 400여 명으로 20배 이상이었다.

데지마는 60년 전부터 복원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내년 말에 대망의 준공을 볼 예정이다. 그 동안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통해 나온 유물로 부지 내에 박물관도 꾸며놓았고, 지금도 연차적인 발굴공사와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데지마 복원현장을 돌아보며, 초량왜관을 떠올렸다. 데지마와 동시대에 존재했고, 기능면에서도 유사했던 무역창구였던 초량왜관은 지금 어떤 상황인가? 그냥 잠자고 있다고 하는 편이 마땅할 것 같다. 만약 지금이라도 초량왜관지역을 발굴한다면, 데지마보다 훨씬 더 많은 유물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들 유물들은 여전히 땅 속에 매몰된 채 주인을 햇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초량왜관을 떠올릴 수 있는 작은 전시관이라도 마련하는 날은 언제일까? 그날이 우리 속의 ‘왜(倭)’자 콤플렉스를 떨치는 그 진정한 시발점이 될 것만 같다.(whpark55@hanmail.net)

글/ 박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