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설원 위로 썰매 한 대가 달려간다. 배경음악으로는 라라의 테마가 흐른다. 닥터 지바고의 명장면이다. 그러다가 이내 장면이 바뀐다.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쳐진 크레믈린궁! 하늘 위로 솟은 오색 꽃봉오리 지붕들, 환상적인 그 정경을 뒤로 밀치고 등장하는 그 이름, 악명 높은 비밀경찰 KGB! 그러다가 또 바뀐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 곧 이어 러시아연방들의 도미노 식 붕괴 등........마치 기다란 파노라마 영상 같다. 실제 가보기 전의 러시아, 그 인상은 마치 정리 안 된 서랍 같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나라였다.

지난 두 주(6/30~7/11) 북유럽 여행 일정 중에 고대하던 러시아에 들렀다. 두 도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덕분에 케케묵은 상식들이 대청소 하듯이 씻겨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뭐랄까? 마치 흑백사진 같은 고정관념이 총천연색 동영상으로 갱신되었다고나 할까. 기대 이상도 있었지만 기대 이하도 아주 많았다.

첫 인상은 기대 이하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교통 정체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국제공항에서 지루한 입국수속은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하지만 전세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진입하는 길은 도로가 아니라 숫제 주차장이었다. 교통사고도 없었다는데 말이다.

가이드에게 교통 정체의 이유를 물었다. 유학생 입장에서 처음에는 속이 터질 듯 했는데, 지금은 평정심을 찾았단다. 그러더니 한 마디로 ‘에~따 러시아!(이것이 러시아!)’라고 했다. 굳이 이해하지 말고 ‘그려러니’하는 게 상책이란다. 속으로 ’에라이~ 러시아!‘를 외쳤다.

다음으로 정통 발레 ‘백조의 호수’ 원본을 본답시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에스컬레이터 길이만 무려 100m가 넘었다. 1940년대 말에 건설했단다. 2차대전 이후 핵전쟁을 대비하여 지하 100m에 건설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변변한 굴착장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대역사를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역사(驛舍)에는 기둥마다 모스크바 공방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조각상들-러시아판 레지스탕스 전사들-이 있었다. 마치 지하철 역사 전체를 보석 세공을 하듯 정교하게 꾸며놓았다. 에어컨도 없는데 시원했고, 승객들도 무지 많았다. 속도 또한 몹시 빨라서 우리 지하철 속도의 두 배쯤 될 것 같았다.

다음으로 지하철에서 내려 볼쇼이극장을 찾아갔다. 3백석 남짓 아담한 극장은 관록이 느껴질 만큼 보기 좋게 낡아있었다. 객석은 비좁았다. 옆 사람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는데다 만원이었다. ‘설마하니 공연이 시작하면 냉방이 되겠지’ 막연한 기대는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 거의 찜통 수준. 팸플릿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 무려 2시간을 보냈다. 정작 놀라운 일은 러시아 관객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쨔~식들, 이 정도에 엄살들을 피우고 있냐?’ 하는 듯이..........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저녁 10시였다. 그런데 하늘이 여전히 환했다. 말로만 듣던 백야(白夜) 현상이었다.

놀라움은 뒷날 크레믈린궁, 아르바트 거리, 바실리성당으로 이어졌다. 그 절정은 셋째 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도시마다 곳곳마다 제정 러시아의 저력이 뿌리 깊게 스며있었다.

‘마뚀르시카’라는 러시아 인형이 있다. 오뚝이를 닮은 뚱뚱한 몸매, 금발에 푸른 눈동자, 울긋불긋 화려한 의상.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보는 게 다가 아니다. 뚱뚱보 몸매를 살짝 비틀면 배가 두 쪽으로 열린다. 마치 흥부 네가 박을 타듯이..... 그 뱃속에 겹겹으로 앙증맞은 인형이 나타나는데, 많게는 아홉 개까지.......이 인형은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다. 다산의 상징으로 ‘부자 되세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에겐 그 인형이 달리 보인다. 첫눈에는 매력이 없어 보이지만 막상 속을 열어보면 꽉 차 있다.

그들은 언제나 ‘에~따 러시아!’(이것이 러시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게는 ‘보는 게 전부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느껴졌다.

글/박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