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시인

부산에는 유엔기념공원이 있다. 필자는 매년 현충일 전후로 그곳을 찾는다. 수년 전 ‘ROTC 부산지부’ 주관의 참배 행사가 계기였다. 참배 횟수를 거듭할수록 느낌이 다르다. 잊고 있었던 역사의식이 되살아난다고 할까.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해준 은인들, 특히 유엔군 병사들의 희생에 대해 새삼 깨닫고 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유엔군 병사들은 6.25전쟁 동안 무려 4만 8백여 명이 숨졌다고 한다. 그 중에 2300명의 영령들이 이곳에 잠들어있다. 터키군 병사들은 모두 462명이다. 터키인 묘지는 정문을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 꺾어 들면 길옆으로 조성되어있다. 묘비마다 사각형의 청동판에 국적, 이름, 나이가 새겨져 있다. 터키 병사들은 대개 21세에서 23세였다. 그중에 핫산(HASAN)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슬람 계통에는 아주 흔한 이름이지만, 내 기억 속의 핫산이 떠올랐다. 30년 전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에서 만났던 터키 친구, 그 이름도 핫산이었다.

1984년 말, 필자는 사우디아라비아 중부 홍해 연안에 있었다. 현대건설 소속으로 담수화플랜트 건설 현장, 한쪽에서는 가스터빈으로 전기를 생산(發電)하고, 다른 쪽에서는 바닷물을 맹물로 만드는 담수화설비 공장을 지었다. 준공이 되고 나면, 성지 메카와 휴양도시 타이프로 전기와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한 사업, 그곳에서 필자는 건설공사의 품질 담당이었다.

당시 사우디의 모든 건설현장에는 소위 ‘현지화(localization) 30%’조항이란 게 있었다. 하지만 사우디 현지 업체가 수행 능력이 없다보니,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실제는 터키인들이 하청을 맡고 있었다. 터키인들은 사우디 당국과는 이슬람으로 통했고, 기후 적응능력도 대단했다. 우리 현장 하청업체 책임자가 바로 터키인 ‘핫산’이었다.

‘핫산’은 필자와 동년배로 삼십대 중반, 훤칠한 키에다가 콧수염도 멋진 사나이였다. 넉살도 좋았다. 그는 일찍이 독일에 가서 건설 현장 근로자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우리 현장의 독일계 감독관들에게도 잘 대처를 했다. 그 바람에 우리 사이는 엄연히 갑과 을의 관계였지만, 수시로 그 역할이 바뀌는 느낌이었다. 고마운 점은 그 뿐이 아니었다.

터키 근로자들은 하나같이 힘이 아주 셌다. 섭씨 사십도 뙤약볕 아래, 그들은 숫제 반바지 차림에다 웃통까지 벗고 일했다. 마치 청동 전사들 같았다. 또한 그들은 이슬람 율법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정도 많았고 장난 끼도 넘쳤다. 일테면, 사막에서 비밀리에 술을 담는 비법도 알려 주었으니까 말이다. ‘한손에 코란, 한손에 칼?’ 한 마디로 웃기는 얘기였다.

핫산으로부터 놀라운 사실도 들었다. 핫산의 아버지도 6.25전쟁에 참전했고, 터키 근로자들의 친인척들 중에도 6.25전쟁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분들이 많았다.

또한 그들은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서도 굳이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 부모 세대들의 희생이 오늘날 한국의 발전에 일조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자랑스러워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내 태도도 적잖이 달라졌다. 뭐랄까? 마치 까맣게 모르고 있던 친인척을 만난 것 같다고나 할까.

각설하고, 예전에는 이곳을 ‘유엔묘지’라고 불렀다. 6.25전쟁 당시 희생된 유엔군 병사들이 묻힌 곳! 느낌이 팍 오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름이 ‘유엔기념공원’으로 바뀌었다. ‘추모공원’이 아닌 ‘기념공원’은 왠지 안 어울린다. ‘묘지’라는 본질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기념’이라고 하면 ‘기념우표’처럼 대개 자랑스러운 사건이나 영광스런 인물에 대해 갖다 붙이는데....... ‘기념공원’보다는 응당 ‘추모공원’이 되어야 할 것 같다.(영어 공식 명칭에는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으로 ’추모 묘지‘가 들어있다.)

유엔기념공원의 추모관에 가면,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 그 첫 시작에 이런 멘트가 나온다. ‘모든 병사들에게는 어머니가 있다. 병사들의 희생은 그들 어머니의 가슴 속에 아직도 고통과 슬픔으로 남아있다.’ 이곳에 묻힌 아들을 둔 호주인 어머니(T.G PAGE) 가 남긴 말이다. 터키인 병사 핫산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허둥지둥 바쁘게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값진 희생을 잊고 지냈던 것은 아닌지........유엔기념공원의 터키인 핫산의 묘비 앞에서 터키인과의 인연을 새삼 떠올려보았다.

글/ 박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