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하면, ‘야~ 바람둥이, 지금 유세 떨고 있냐?’ 하고 누군가 지레 핀잔을 줄 법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열심히 노력(?)했다면 (한때나마) 세상 사내들의 로망, 카사노바 같은 바람둥이도 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어서 하는 말이다.

풋풋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삶의 에너지다. 그 삶이 신산한 도회의 삶이든, 만리타국 이민의 삶이든 간에 마찬가지. 가슴 속 곳간의 소중한 한 부분으로 때로는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텅 비기도 한다. 가득 찰 때는 회춘(回春)이나 하는 것처럼 흐뭇하고, 텅 빌 때는 방전된 배터리처럼 먹먹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그 곳간을 향수 배터리라고 부른다. 이런 고백을 할 때는 반드시 배경 음악으로는 이 노래가 흘러나와야 한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비에 젖은 꽃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빚은 그 소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조용필의 ‘단발머리’ 중에서.

시골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우리 담임선생님은 갓 대학을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아 오셨기에 의욕이 하늘을 찌르는 분이었다. 순전히 선생님의 제안으로, 급우들 네 명이 총각선생님의 하숙방에서 과외를 받게 되었다. 과외 수강생도 선생님이 비밀리에 찍으신 단발머리 여학생 2명, 남학생 2명, 모두 네 명. 특별히 총명해서라기보다 우리네 집들이 선생님의 하숙방과 그리 멀지 않고,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 녀석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저녁마다 하숙방으로 찾아가 한 시간씩 공부를 했다. 하지만 열공을 한 기억보다 장난치며 놀았던 기억들만 오롯이 남아있다.

일종의 비밀과외였던 셈인데, 그렇다고 선생님이 용돈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은 가난하여 과외비도 현금이 아닌 고구마, 감자 등 제철 농작물로 드렸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선생님은 흔쾌히 받으셨다. 모르긴 해도 선생님은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쳐 도시(진주, 부산)에 있는 명문 중학교에 합격을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입학시험은 경쟁이 치열했다. 우리들이 바로 1954~1955년생들로 베이비붐 세대였으니까.......

과외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어느 날 저녁. 가로등 아래에서 단발머리 한 소녀가 외쳤다.

‘아차! 깜박했다. (선생님 방) 대청마루 밑에 과자봉지를 놔두고 왔다 아이가. 야! 너거들이 가서 좀 가꼬오모(가져오면) 안 되것나?’

그 말을 듣고 동무와 나는 신이 나서 즉각 되돌아갔다. 선생님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어서, 우리 둘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갔다. 컴컴한 대청마루 아래를 더듬자 뭔가 바스락거리는 게 잡혔다. 마루 아래 동자기둥 뒤쪽에 있는 비닐봉지였다. 분명 콩알사탕이 들어있는 봉지였다. 임무를 완수한 특공대처럼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어둠 속을 헤쳐 왔다.

가로등 아래 당도했더니, 기다리던 두 소녀가 까르르 웃으며 도망을 가는 게 아닌가. 그제야 우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깜박 속았던 것이다. 가로등 아래 비닐봉지를 자세히 비쳐보았다. 두둑한 봉지 속에는 콩알사탕이 아니라 콩자갈이 들어있었으니.........

이번 주말에는 서울에서 시골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 매년 이맘때면 서울, 부산, 진주, 내 고향인 곤양을 번갈아가며 동창회를 여는데, 벌써 십 수 년째를 이어오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그 언젠가 나를 위해 콩자갈을 전해주던 그 맹랑 소녀들’도 거의 매번 참석한다.

이번 모임은 서울에 사는 동창들 주관으로 경향각지 예순의 동창들을 불러 모은다. 그들은 일찍부터 서울 살았어도 수돗물만 빨고 자란 서울깍쟁이들이 아니고, 고향 산천을 어깨동무하고 함께 누볐던 고향까마귀들이다. 이번에는 새로 지은 숭례문도 구경시켜주고, 뒷날은 강화도 구경까지 시켜준다니, 벌써부터 봄소풍 가는 소년처럼 설렌다. 그야말로 친구 덕에 강남 가는 길이다. 또한 이 길은 봄마다 우리 가슴 속 ‘향수 배터리’를 빵빵하게 충전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딱 일년 가는 가슴속 전지/ 두엄 냄새도 향기로운 봄날이 오면/ 잊고 지낸 그 배터리 깜깜하게 스러지네// 달디 단 샘물 같은 초등학교 동창회/ 만나는 동무마다 소리치며 얼싸 안고/ 아른아른 보릿고개 송기松肌 먹던 기억까지/ 1박2일 온몸으로 푸닥거리를 하네// 시도 때도 없이 고향 말이 터지고/ 마른 가지마다 찌릿찌릿 새움이 돋는 기척/ 마침내 빵빵해진 나의 곳간이여 (졸시- ‘향수 배터리’ 전문)

글/박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