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드러난 책벌레도 많지만 좀(蠹)처럼 숨어사는 책벌레들이 훨씬 많다. 독서란 모름지기 몰입, 은자(隱者)처럼 숨어서 즐길 때 그 열락(悅樂)의 도가 훨씬 더하기 마련이다.

한편 요즘에는 독서 인구가 급감 중이란다. 시도 때도 없이 팡팡! 터지는 ‘손안의 마약’ 때문에.......하지만 한번 맛들이면 죽을 때까지 가는 긍정적인 중독은 따로 있다. 십중팔구 팔자를 고치는데, 아주 드물게는 무기력 요괴로 변하는 부작용도 있다. 바로 책벌레다.

지난 11월 30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모범장서가상’ 시상식이 있었다. 대선 열기로 빛이 바랜 감이 없진 않지만, 그 덕에 부산에 숨은 책벌레도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윤형두) 주관으로, 수상에는 전국에서 6명이 뽑혔다. 1등상(정동수)에 8천여 권, 2등상(박춘기)에 4천여 권, 3등상에 3천여 권, 나머지 세 사람은 2천여 권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장려상인 3등상에 뽑혔다. 유별난 책벌레로 장애인 한 분도 특별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필자는 이 행사를 어떻게 알았을까? 석 달 전쯤 모 신문의 기사 때문이다.

‘그 많던 장서가 어디 갔소?’........대한출판문화협회는 이달 말까지 ‘2012 모범장서가’ 신청을 받는다. 종이책의 가치를 아는 애독가들을 격려하는 대회로 1964년 처음 시작됐다. ........인터뷰를 통해 장서가의 책 사랑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첫 번째 선정 기준은 도서 보유량이다. 세부 기준도 있다. 직업적으로 책과 가까운 교수와 작가, 종교단체의 임원급 인사는 지원할 수 없다.......하략. (동아일보 2012. 8. 15)

응모 절차가 제법 번거로웠다. 후보추천서, 독서이력, 도서 분야별 수량, 감명 깊었던 도서목록 30권 등. 필자가 응모 서류에 적었던 ‘책을 가까이 하게 된 계기’를 옮겨본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1974년~1978), ‘헌책방 순례’는 숙명적인 취미가 되었으며, 공대생(건축과)의 지적 허영을 채우는 동시에 문리대 여학생과 근사한 연애를 꿈꾸며 연극부에 들어갔고, 그 덕에 고전 희곡을 비롯한 인문학 분야의 책들도 경계 없이 넘나들게 됨.

-결정적 계기는 건설기술자(현대건설 소속)로 80년대 초, 2년 남짓 사우디아라비아 근무 당시, 현지 일본철강회사(NIPPON KOKAN ARABIA) 출장 갔다가, 받은 충격! 숙소에 가득한 책들을 보고 ‘현장 도서관이냐?’고 물었다가, 개인 서재라는 말에 심한 열등감을 느낌.

출장에서 돌아와 참회의 뜻으로, 그 동안 종종 ‘고스톱으로 날밤 새기’의 버릇을 끊고, 현장소장님을 간곡히 설득하여 휴게실에 간이 도서관을 개설함.

실사를 위해 협회 직원이 우리 집에 오셨다. 이번 심사 대상 장서가 분들을 물었더니 가장 많은 분은 8천 권이란다. 나는 3천여 권이니 순위로 치자면 3위이다. 전업 작가도 교수도 아닌 분이 장서 8천 권이라니, 그 분은 얼마나 대단한 책벌레인가? (필자는 겨우 3천여 권인데도, 알랑방귀 회유와 뇌물 등 갖은 술수(?)를 동원하여 아내를 설득하여 책벌레의 영토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 분의 노하우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실사 과정보다 대화가 재미있었다. 서재마다 사진을 찍고 난 뒤, 거실에서 즉석 방담을 나눴는데, 화제는 요즘의 독서 경향, 출판계 동향, 전자책과 종이책, 그리고 베스트셀러의 이면까지 전방위로 번져갔다. 옆에서 아내가 던진 한 마디, ‘당신 오늘, 물 만난 고기 같네’

실사가 아니었다면 결코 있었을 수 없었던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뒤죽박죽에다 삐뚤빼뚤 피난민 창고 같던 서재가 삼빡하게 변신을 한 것이다. 예전에는 어두컴컴한 폐광에서 금맥을 찾아내는 기분이었다면, 이제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뭐랄까? 방긋방긋 웃는 미인들이 나를 빙 둘러 에워싼 채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사또님, 사또님, 오늘밤은 제가 수청을 들겠사와요! 저요, 저요!”

책벌레들은 서재만 봐도 황홀하다. 디지털 열풍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종이책은 영원하리라. 내친 김에 마저 움베르토 에코(Eco 80) 영감의 깜짝 이벤트를 소개하고 가야겠다.

그는 전자책 단말기인 <킨들>과 두꺼운 종이책 한 권을 들고서, 루브르 박물관 장서각 2층 난간에 올라가 아래를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결과가 어땠을까? 소설 수백 권이 들어있던 <킨들>은 박살이 나서 재생불능이었지만 종이책은 멀쩡했다고 한다.

이에 맞장구를 치듯 최근 들어 한물간 중고서적들이 ‘쿨’하게 돌아오고 있다. 도심 한복판을 속속 접수 중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책벌레들에게 호시절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필자는 부상으로 삼십만 원 어치 도서상품권을 받았다. 덕분에 당장 단골서점에 들러 <불한당의 미국사>, <사치와 문명>, <하이테크 시대의 로테크> 등등 맛깔 난 신간들을 왕창 샀다. 황홀한 월동 준비를 시켜주신 분들께 이 글로나마 대신 감사를 전합니다.

글/박하 시인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늘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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