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 모두 일본을 두려워하는데, 유독 한국인들만은 일본을 아주 우습게 본단 말이요.’ 이십여 년 전쯤에 어느 외국인이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로 기억된다. 당시 그 외국인은 한국인들의 아무런 근거 없는(?) 무모함을 빈정거리는 투였다. 당시로선 그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는 약체였고, 상대 일본은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라 승승장구하는 강국이었으니까 말이다.

박하 시인

하지만 그 외국인이 오늘 다시 한국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 한국인들의 저력을 고쳐 생각할지 모른다. 한국은 어느새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 되었다. 반도체, TV, 스마트폰 등의 전자산업은 이미 일본의 소니(SONY)를 넘어섰고, 조선분야에서도 세계 1위, 해외건설 분야에서도 일본을 넘어선지 오래이다. 어디 그 뿐인가? 자동차산업도 세계 5위로써 일본과의 격차를 좁혀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한국은 전방위로 일본의 경제력을 추격하는 위치에 다다랐고, 경제, 문화, 관광,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과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서로 간에 해묵은 민족감정은 빙산처럼 수면 아래에 숨어있는 느낌이다. 특히 요즘에는 한일 간에 민족감정이 극에 달했다. 결정적 계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 한국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일본인들의 반응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격렬했다. 한류로 인해 그 동안 잠잠했던 반한 감정이 다시 폭발한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인으로서 나는 사실 이명박 대통령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임기 후반에 제대로 한번 강수를 둔 것 같아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 그 동안 일본의 눈치나 보면서, 제 나라 영토에 발도 한번 못 붙인 대통령들에 비하면 얼마나 당당한가 말이다.

하지만 후련함 뒤에 몰아칠 후폭풍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아는 이는 알리라. 김영삼 대통령 때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가 얼마나 된통 당했던가. 혹자는 그 후폭풍이 IMF 사태를 초래했다고 믿고 있는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IMF 신용 위기를 범국민적인 ‘금 모으기 운동’ 등으로 극복하고 난 뒤, 우리 경제의 기본은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튼튼해졌다고 한다.)

응당 정부·정책적 대응방식이 있을 테지만, 국민 개개인의 대응방식이 달라야 한다. 냉정히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 국민이 일본 국민에 비해 아직 한참이나 뒤지는 분야가 많다. 그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마는 필자가 겪은 일본인에 대한 에피소드가 그 중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1985년 8월 경, 당시 필자는 사우디아라비아 소재, 홍해 변에 위치한 마카타이프 담수플랜트 건설현장에 있었다. 어느 날은 아라비아 반도 건너편, 주베일에 있는 일본계 철강회사(N.K. ARABIA)로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갔다. 공장 제작제품들의 검수를 위해, 공무과장과 품질관리 담당인 필자, 두 사람이 동행했다. 담맘 공항에 마중 나온 직원을 따라 그들의 공장으로 갔다. 마침 점심 때라 융숭한 접대를 기대했지만 식사는 공장 내 식당에서 조촐하게 이뤄졌다. 어떻게 구했는지 김치 반찬을 준비해놓고 ‘기무치 오이시이데스!’(김치 맛있습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마침 시에스타(혹서기 오침시간)를 실시하던 때라 그들은 자기들 숙소에서 2시간쯤 쉬라고 했다. 컨테이너를 개조한 숙소 안에는 두 개의 간이침대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벽에 가득한 책들이었다. 겨우 에어컨 박스 공간만 비워놓고 책들로 빼곡했다.

“ 이곳이 현장 도서관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두 사람 개인 책들입니다.” 그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공돌이(기계분야 기술자들), 니들에게 책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슨 스파이나 된 것처럼 그 책들을 살펴보았다. 문예춘추, 주간지, 신간 소설, 만화책, 전공 책들, 철구제작에 관한 만화책들. 그들의 교양은 이미 백과전서파 수준이었다. 물론 이슬람의 사막 도시에서 독서 빼고 다른 여흥이 없다고는 하지만, 독서 습관은 분위기 조성이 없이는 어려운 것이다.

오후에 제품 검수도 빈틈없이 준비를 해놓은 터라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들이 매사에 당당했던 것도 국력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출장에서 돌아와 현장소장님과 관리부장께 건의하여, 휴게실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때 이후 최소한 우리 현장만큼은 여가 시간이며 으레 ‘새잡기 운동’을 하던 대신 ‘독서운동’이 자연스레 펼쳐졌다. 사막에서는 철학자도 될 수 있지만 노름장이도 될 수 있다는 사실! 필자 역시 그때부터 맛들인 전방위 독서습관으로 인해 오지랖 넓은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극일(克日)은 물론 정신무장이 중요하다. 하지만 정신무장이란 결코 구호가 아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출판대국 세계 6위에다 우리 국민의 평균 독서량도 일본인들의 평균 독서량을 능가했다는 뉴스를 만난 적이 있다. 독서의 질을 떠나서 얼마나 고무적인 소식인가. 하지만 기술자들, 특히 건설 기술자들의 평균 독서량은 어떨까? ‘해외건설 누적 수주 5천억 불 달성(2012. 6)’이라는 금자탑에 어울릴 정도로 우리 기술자들이 책을 읽고 있을까?

아이작 뉴턴(1642-1727)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만약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책이 곧 거인의 어깨이다.

글/박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