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무더위에다 심야까지 열대야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도시인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줄곧 에어컨 아래에서 지내다 보니, ‘여름나기’가 아니라 숫제 ‘여름 건너뛰기’를 하는 것 같다. 밤 동안에도 여름다운 이색 정취는 없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볼 수도 없고, 찾아볼 생각조차 달아난 지 오래다. 또한 요즘에는 늦은 밤마다 런던올림픽 실황중계가 있어, 열대야라는 사실 체 잊고 지내기 일쑤다.

아쉬운 대로 어릴 적 ‘여름나기’의 추억이나 떠올려봐야겠다. 초등학교 시절 이맘때,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냈던가? 비디오를 재생하듯 거꾸로 돌려보고 싶다.

아침나절이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마을 뒷산인 사자산에 모였다. 그곳은 우리들의 아지트, 사자산 기슭에는 관덕정(觀德亭)이라는 활터가 있었고, 산능선에는 아름드리 참나무, 팽나무 등의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동네 형들은 소나 염소를 몰고 나와 짬짬이 꼴을 베기도 했지만 우리 조무래기들은 줄곧 숲에서 뛰놀았다. 이곳에는 장수하늘소, 사슴벌레, 풍뎅이, 말똥구리, 말벌 등 갖가지 곤충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우리들의 사냥감이었다. 동무들끼리 누가 더 큰 사슴벌레를 잡는가, 내기를 하고, 풍뎅이의 날개를 분질러 팽이처럼 돌리기도 했다. ( 분명 잔인한 놀이였는데도, 당시에는 그런 자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냥놀이가 사내아이들의 야성을 어느 정도 키워주었던 것이리라.)

오후 나절에는 집에 들러 간단히 점심을 때운다. 이때쯤이면 뙤약볕이 절정에 이르고, 우리는 다시 마을 뒤편에 있는 강으로 몰려간다. 여름철 놀이 중에서 가장 신나는 것이 물놀이! 미루나무들이 열병식을 하는 방죽에 소를 풀어놓은 채, 우리는 해가 저물도록 물에서 놀았다. 벌거숭이로 물장구를 치다보면 어느새 입술이 새파래지고 손바닥이 쪼글쪼글해진다. 그러면 동무들은 줄줄이 방죽으로 올라왔다. 미루나무 아래 매미들의 합창을 들으며 늘어지게 한숨 자기도 했다. 하루 온종일 산과 들에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팔다리, 등짝 할 것 없이 꺼풀이 벗겨지고, 얼굴은 모두 깜둥이로 변했다.

해거름 때, 방죽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제법 멀었다. 이윽고 집에 당도했을 때는 멱 감기했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온몸이 땀에 절어있다. 그러면 저녁을 먹기 전에 어김없이 치루는 통과의례, 바로 등목이다. 등목은 대개 어머니 차지였다. 윗도리를 벗고 우물가에 엎드린 채 등에다 찬물을 끼얹는 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어머니는 등에 찬물만 끼얹어주시는 게 아니다. 싫지 않는 잔소리와 함께 뽀도독, 뽀도독 소리가 나게 등을 밀어주신다. 어머니의 손은 얼마나 매운지........간지러운 겨드랑이에다 귀때기 뒤에 숨어있는 때까지, 사정없이 박박 문질러주시던 그 손길이 그립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가끔 ‘땀띠’ 사냥을 나갔다. 고향에는 아주 특별한 등목 장소로 ‘통새미’라는 샘이 있었다. ‘통새미’, 바위틈에 파놓은 샘이 마치 커다란 통처럼 생겼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대낮에도 그 샘에 가기만 하면 온몸에 으스스한 냉기가 스미는 곳. 이곳에서 찬물을 뒤집어쓰면 비명이 절로 나온다. 한여름에도 이빨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통새미에서 목욕을 하고 나면, 마치 얼음찜질을 한 것처럼 땀띠가 사라졌던 것이다.

여름밤의 정취는 또 어떻던가? 저녁이면 으레 마당에 모깃불을 피운다. 모깃불의 재료는 쑥대가 제일이다. 쑥 타는 냄새는 눈에는 매워도 향기롭기 그지없다. 또한 푸석푸석 타면서 오래간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면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가 슬슬 풀린다. 살랑살랑 부채 바람을 쐬며 할머니의 도깨비 이야기를 듣다 보면 손자는 스르르 꿈나라에 도착해 있다.

만약 여름에 뙤약볕이 없고 무더위가 없다면 곡식이나 과일이 제대로 익겠는가? 사람 역시 여름 한철이나마 제대로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특히 우리의 어린이들이- 심신이 제대로 무르익겠는가? 어릴 적 여름나기가 새록새록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글/박하시인

부울경뉴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