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영 박사 / 영산대학교 겸임교수

봄이 시작되기 전에도 복수초는 눈을 머리에 이고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북풍한설을 견디고 매화는 봄의 전령사로 이름을 날리지요. 봄이 제법 무르익게 되면 남도 제주로부터 유채꽃을 시작으로 진달래, 철쭉꽃으로 우리의 마음도 겨우내 얼어붙었던 것을 녹여냅니다. 또한 봄이 가고 여름이 시작될 즈음에는 코스모스 같기도 하고 국화 같기도 한 금계국이 온통 야산과 들에 꽃의 향연을 펼칩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 이 여름의 초입에 무엇보다 기억나는 꽃이 있다면, 바로 ‘능소화’(凌霄花)일 것입니다.

능소화는 꿀풀목 능소화과의 식물로, 학명은 Campsis grandiflora입니다. 중국 원산의 갈잎 덩굴나무로, 담쟁이덩굴처럼 줄기의 마디에 생기는 흡반이라 부르는 뿌리를 건물의 벽이나 다른 나무에 붙여 가며 타고 오릅니다. 6월말부터 8월까지 가지 끝에서 나팔처럼 벌어진 주황색의 꽃이 핍니다. 그런데 이 능소화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전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옛날 옛날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답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앉아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의 소화의 처소에 한 번도 찾아오지를 않았어요. 소화가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불러 들였건만, 그녀는 아마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어디 한 둘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시심과 음모로 그녀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까지 기거하게 된 소화는,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지요. 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는 않았는가 싶어 담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을 너머 너머 쳐다보며 안타까이 기다림에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답니다. 어느 여름 날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상사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초상도 거창했겠지만 잊혀진 구중궁궐의 한 여인은 초상조차도 치루어 지지 않고 '임금을 기다리겠노라'고 애닯픈 유언을 남긴 채 그렇게 사라져 갔습니다. 그녀가 죽은 그 이듬해 여름...'소화'가 살았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주홍빛 꽃이 넝쿨을 따라 주렁주렁 피어났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습니다. 이 꽃이 능소화 입니다.』

능소화의 꽃말은 그리움, 명예, 자존심입니다. 구중궁궐의 꽃 - 능소화, 전설의 주인공인 궁녀 '소화'의 일편단심 임금을 기다리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능소화는 조선시대에는 '양반꽃'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래서 만약 상민의 집에 능소화를 심으면 반상의 법도에 위배된다하여 붙잡혀가서 곤장을 맞곤 했다고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덕목이 필요하겠지만, 명예와 자존심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 여겨집니다. 가끔 명예와 명성을 같이 사용하곤 하지만, 명성은 높은 지위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명예는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인정해야 할 영역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은 ‘정의감’이라는 말 대신에 ‘명예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예와 함께 비굴하지 않는 자존감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라 여겨집니다. 명예와 자존감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태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소화’와 같은 절개와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각자 생각하는바 다르겠지만...이제 능소화가 곳곳에 필 것입니다. 이 꽃을 보면서, 꽃말을 곰곰이 되 십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대를 사는 능소화로서의 삶을....

글/구모영

법학박사

영산대학교 행정학과 겸임교수

부울경신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