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 시인

그 할머니는 여행을 좋아하셨다. 세상 구경을 많이 하면 할수록 저승길이 편하다는 속설을 철석같이 믿고 계셨던 분이셨다. 그 할머니는 사진 찍기도 좋아하셨다. 그래서 여행 때마다 찍은 사진들을 앨범으로 차근차근 정리도 곧잘 해 놓으셨다. 심심하실 때나 때때로 손주들이나 친구들이 집에 오는 때는 어김없이 앨범을 꺼내셨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만면에 웃음을 띠시면서 옛 추억을 떠올리곤 하셨다.

할머니의 삶은 주변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큰 아들 집으로 옮겼지만 별로 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어린 손주들을 돌보아주셨을 뿐 아니라 집안의 허드렛일을 곧잘 도와 주셨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는 자린고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셨다. 할머니의 철학은 자린고비 영감님이 돌아가시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모름지기 유산이란 ‘악착같이 모아서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기분 좋게 쓰고 난 뒤 그래도 남는 것’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친구들에게도 종종 인심도 쓰셨고, 명절이 지나 여기저기서 받은 용돈이 목돈이 될라치면 어김없이 친구들을 선동(?)하여 함께 해외여행도 다니셨다고 한다. 물론 그때마다 찍은 사진들도 많아서 앨범이 대여섯 권은 족히 되었다.

그 할머니가 갑자기 몸져누우셨다. 할머니가 입원하시면서부터 아파트 단지의 경로당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경로당의 응원반장 격인 할머니의 입원이 계속되자 친구 할머니들도 시름시름 우울증을 앓았다. 그만큼 할머니의 빈 자리는 컸던 것이다. 모두가 할머니의 컴백을 학수고대했건만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경로당 친구들의 상심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고 몇 주 후, 어느 비바람 부는 날, 아파트 안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아파트 마당으로 할머니의 여행 사진들이 어지럽게 휘날렸던 것이다. 그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 얼굴도 있었고, 여럿이 찍은 사진에는 동네 친구 분들의 얼굴도 있는 게 아닌가. 새벽부터 비바람이 불었던 타라 어떤 사진은 벌써 아스팔트 바닥에 짓밟힌 채로 측은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무심코 길바닥에 버려진 이 사진들을 발견한 친구 할머니들이 격분했고, 할머니들이 함께 큰 아들 댁으로 쳐들어가서 홧김에 온갖 상소리로 항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어찌 이리도 배은망덕한 며느리가 있느냐?’

‘소각장에서 태울 일이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그건 며느리의 불찰이었다. 황망 중에 당한 일이라 큰 아들 내외도 워낙 정신이 없었을 터였다. 할머니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웬만한 것들은 소각을 했는데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드러난 앨범들은 처리하기가 마땅찮아 몽땅 쓰레기봉투에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앨범들 속의 사진들이 마치 ‘왜 우린 화장을 안 해주는 거야?’ 하고 소리치듯 쓰레기봉투를 열고 뛰쳐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 사진들은 앨범이 넘치는 바람에 중간에 그냥 끼워놓았던 사진들이었던 것이다. 그 사진들이 때마침 비바람을 타고 아파트 마당에 나뒹굴게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큰 아들 내외는 울면서 사진들을 회수하여 고이 불에 태워드렸다. 하지만 그걸로 마무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큰 아들 내외는 그 아파트에서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모친의 친구 분들을 도저히 뵐 낯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외는 없다. 연로한 부모님들은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하기 마련이다. 떠나는 당신께서 스스로 유품 정리를 하시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갑자기 돌아가실 경우에는 그 사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자신도 돌아보게 된다. 회사든 집이든 이곳저곳 서랍 속에 온갖 잡동사니로 나뒹굴고 있는 내 사진들부터 한번 정리를 해야겠다.

부울경뉴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