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 시인

박하시인

본래 ‘선생(先生)’이란 학문이나 학덕의 수준이 대단히 높은 분들을 일컫는 호칭이었다. 일테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과 같은 분들에게 적합한 호칭이었다. 하지만 염량세태에 따라 호칭도 인플레를 겪다보니 거룩한 선생은 지금은 아무에게나 가장 편한 호칭이 되고 말았다. 되돌아보면, 불과 50여 년 전만해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었듯이 선생님의 권위는 대단했다. 60년대 초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우리 세대에게는 그래도 예전의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수년 전, 시골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났던 은사님 이야기이다. 술잔이 오고가는 화기애애한 자리, 장난기 많은 한 여자 동기가 은사님께 뜬금없이 말을 건넸다.

“선생님, 초등학교 때 정말 아쉬웠던 건, (풍금을 못 치시는 선생님 때문에) 음악수업을 제대로 못 받은 겁니다. 그 바람에 지금까지도 저는 콩나물(악보)도 읽을 줄도 모른답니다.“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듯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은사님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정색을 하시며 일순간에 죄인의 표정을 지으며 하시는 말씀,

“정말 죄송합니다. 사죄의 뜻으로 여러분께 큰 절을 하겠습니다.”

그러시면서 자식 같은 제자들 앞에서 넙죽 큰 절을 하시는 게 아닌가. 바로 곁에 있던 우리들이 ‘어어, 선생님!’하며 황당해 하며 미쳐 제지할 새도 없었다. 은사님이 무안해하실까 봐 우리들도 일제히 맞절을 했던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40년 전에 잘못(?)을 스스럼없이 인정할 줄 알고, 또한 자식 같은 제자들 앞에서 큰 절로 사과를 하는 일. 은사님 역시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나라에서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았을 리가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분은 구구한 변명보다 제자들 앞에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그 은사님은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사표(師表)로 남아 있다.

두 번째는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 이야기. 사범대를 갓 졸업 후, 처음으로 2학년 담임이셨던 그 분, 매사에 박력이 넘치는 ‘사나이의 기개’ 그 자체였다. 부임하시자마자 그 분은 직접 가정 방문을 통하여 학생 개개인의 신상 파악을 하고자 하셨다. 그 취지를 십분 설명을 하신 다음에 매일 몇 집씩 가정 방문이 계속되었다. 셋째 날이었던 같다.

“어이! 박대영(가명)! 내일 오후는 너희 집 차례니 부모님께 미리 말씀 드려라!”

덩치 큰 내 친구가 우거지상을 한 채 못마땅한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집에는 오실 필요가 없는데요.”

변변한 이유도 없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버르장머리 없이 비쳤던 그 대답이 담임의 자존심의 뇌관에 불을 댕겼던 것이었다.

“뭐야! 이 자식! 이리 나오지 못해!”

죄인처럼 불려나온 친구에게 담임은 성난 사자 같았다. 왼손으로 친구의 턱을 떠받치더니 벼락같이 친구의 뺨을 갈겼다. 한 대로 끝이 아니었다. 친구가 이를 악다물고 견디는 게 반항 같았던지 불꽃은 친구의 다른 뺨에도 옮겨 붙었던 것이었다.

순전히 오해로 생긴 일이지만 친구는 끝끝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의 변명은 비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밤새 울었다고 한다. 속사정은 이랬다.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 부산에 유학 온 친구는 단칸방 자취도 못할 형편. 궁여지책으로 결혼한 큰누님 댁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 또한 누님 댁도 맞벌이를 하느라 집에는 친구 외엔 아무도 맞아줄 사람도 없었던 것이었다.

수년 전, 졸업 30주년 행사장에서 내 친구와 은사님의 조우가 있었다. 내심 친구는 은사님를 만나 그 당시의 오해를 풀고자 했지만 허사였다. 건강이 안 좋으신 노구의 은사님에게 도저히 당시의 그 구차했던 상황을 꺼낼 수가 없었던 것. 화해(?)는 영영 물거품이 되었어도 친구는 그때의 트라우마를 훌륭하게 극복했다. ‘억울해서 출세’라는 말처럼 맨주먹으로 사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여식까지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뒷북 같은 이야기지만, 만약 그 당시 담임의 과도한 자극(?)이 없었다면, 친구가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스승의 날은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날인 동시에 제자의 도리를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다. 기왕이면 이 날이 사제 간에 맺힌 오해의 응어리도 푸는 날이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부울경신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