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하 시인

때가 때인지라 ‘진보의 덫’이라고 하면 지레 오해할 수도 있겠다. 여기 이 자리의 ‘진보’는 요즘 한창 뜨거운 저기 저쪽 유세 마당의 진보가 아니다. 과학기술 수준이 발전한다는 ‘진보’를 뜻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진보의 덫’을 얘기하고 싶다.

지난 2월 9일, 고리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 1호기가 12분 동안 정지사고가 발생했지만 당국이 쉬쉬한 채 넘어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쿠시마 원전 참사 1주기(3/11)에다 서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3/26)가 목전에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설계 수명(30년)이 다한 원전들의 수명 연장이 과연 타당한가에까지 논의가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부터 고리원전 5,6호기 건설에 건설기술자로서 4년 동안 참여했기에 원전에 대해 관심이 남다른 편이다. 당시 5,6호기 건설현장에서는 인근에 있던 1호기의 모습도 늘 보고 지냈다. 이른 아침마다 출근길에 만나는 정경은 1호기 방수로(discharge) 앞쪽의 길천 앞바다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였다. ( 이 물안개는 원자로의 냉각수로 쓰였던 바닷물이 임무를 마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갈 때 그 온도차에 의한 증발현상으로 방사능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 물안개를 볼 때마다 기분이 썩 좋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별보기 운동(?)’을 하던 당시, 그것은 희망찬 하루의 시작이자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대한민국의 힘찬 기지개처럼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또한 현장에 있는 동안 원전 2호기의 시운전 과정도 지켜보았다. 따라서 필자는 원전의 원리를 웬만큼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번 정전사고를 다루는 신문이나 방송들은 필자의 궁금증을 충분히 해소해 주지 못했다. 전담 기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당국의 보도자료 제공도 불충분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마치 퍼즐 맞추기를 하는 것 같았다. 속보들이 이어지면서 이제 퍼즐은 제법 뚜렷한 실체로 바뀐 기분이다.

한편 원전에 대해 웬만큼 안다는 필자도 궁금증이 적지 않은데, 평소 원전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은 오죽하랴. 설상가상 고리원전과 가까운 부산·울산 사람들의 불안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고 보면, 의구심과 공포심은 사촌간이라 할 수 있다. 궁금증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으면 의혹은 커지고, 그 의혹은 공포를 넘어 결국 공황상태로 번지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이번 사고에 쾌재(?)를 부르는 쪽도 있는 것 같다. 일례로 일본의 대표언론들이 이 사고를 1면 머리기사로 다루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런 기사들이 역수입되면서 공포가 더욱 조장되기도 한다. 따라서 당국은 시민들의 궁금증을 신속하게 해결해 주고, 사고의 원인 분석과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번 정전사고에서 보듯, 소위 진보라는 이름의 첨단기술에도 맹점의 덫이 숨어있다. 중요한 사실은 사고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사고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탄탄대로와 재앙의 구렁텅이, 그 두 갈래로 말이다.

‘실수는 인간의 일, 용서는 신의 일’ 평범한 진리이지만 현실에서는 자주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실수는 신의 장난, 완벽은 인간의 일’ 쯤으로 말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에는 이상한 관행이 있다. 단언컨대 어떤 업무, 어떤 현장을 막론하고 숱한 체크리스트마다 언제나 ‘정상(이상 무)’로 도배되기 일쑤이다. 설령 문제가 발생하여 적절한 조처를 밟았을망정 결과는 ‘정상’으로 적어버린다.

왜 그럴까? 단지 훗날 감사(監査)를 받을 때 시시콜콜 시달리기 싫다는 그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정작 본인은 곧이곧대로 기록하고 싶은데도 하늘같은 ‘상관의 지시’ 때문일까? 실수나 실패의 기록이 제대로 없는 한 진보는 구두선이다.

이런 잘못된 관행이 계속되는 한 진보의 덫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옛말에 ‘땅강아지 한 마리가 거대한 제방을 허문다.’고 했다. 작은 것도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원전의 안전운행과 투명함을 담보하는 절대 기본이다.

* 본지의 편지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부울경신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