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 시인

박하 시인

전자책(e-book)이 좋다한들 종이책에 비할쏘냐. 이 말에 동의하신다면 귀하는 십중팔구 사오십 대이리라. 하지만 ‘흥, 아니올시다. 그 반대인대요!’ 하신다면 분명 이삼십 대일 것이다. 이유인즉, 그들은 종이 위의 무덤덤한 활자보다 모니터 속의 빛나는 활자에 더 친숙하니까 말이다. 알고 보면, 젊은 그들은 어느새 ‘종이책 나라’에서 ‘전자책 나라’로 이민을 간 셈이다. 아니 전자책이 아니라 그저 휘황찬란한 ‘모니터 나라’인지도 모른다.

물론 전자문명의 강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필자 역시 일찍이 전자기기의 위용을 십분 체험한 바 있다. 일례로 들자면, 전자사전이다. 얇디얇은 전자사전은 가히 혁명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대체 무슨 혁명인가? 몸피도 얇은 그가 책상 위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던 사전들-국어사전, 영한사전, 옥편 등-을 깨끗이 쓸어내었으니 말이다. 아! 옛날이여! 온갖 호사를 누리던 그 사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헌책방에 가보시라. 사전들은 영락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먼지에 덮인 채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일반 서적들도 사전의 뒤를 따를 거라고 속단하지는 마시라. 종이책은 사전과는 엄연히 다르다. 결코 전자책이 따라올 수 없는 숱한 장점들이 있다. 필자의 생각을 옮겨본다.

우선 종이책은 한 권 한 권이 쟁기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종이책을 읽는 행위, 독서는 곧 내 황량한 마음 밭을 갈아엎는 쟁기질이다. 쟁기질을 할 때는 미처 모른다. 척박했던 제 마음 밭이 어떻게 변하는 지, 그 쟁기질의 깊이가 깊을수록 수확이 많아질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종이책은 한없이 겸손하다. 종이책은 전자책처럼 나를 상전처럼 모셔라, 밥(배터리)을 제때 줘야만 보여주지, 미간을 찡그리고 봐라, 베개처럼 절대 베지 마라 등등, 까다롭고 성가신 주문을 절대 하지 않는다. 아무 때나 주인의 요구에 순응할 뿐이다. ‘당신은 그저 펼치기만 하세요.’ 동서고금의 내로라하는 명사들도 -방송에서는 젠체할지 몰라도- 책 속에서는 고해성사 하듯 속엣 말을 순순히 들려준다. 그뿐인가? 주인장께서 원하시면 굳은 일도 마다않는다. 뜨거운 라면냄비의 받침이 되기도 하고, 때론 단잠을 위한 목침이 대용이 되든 군소리를 하는 법이 없다.

셋째, 종이책은 서재를 꾸밀 수 있다. 이미 읽은 책이든 앞으로 읽을 책이든 나란히 서재에 정리할 수 있다. 서재에 들어갈 때마다 책들의 열병식(閱兵式)을 받는 기분, 나는 사령관이고 책들은 나의 병사들이다. 성인(聖人)이고 무명작가고 내 앞에서는 하나같이 차렷 자세로 서있으니 말이다. 때로 울적한 날이면 나는 내 앞에 얌전히 도열한 책들 앞에서 신관사또 변학도가 되는 발칙한 상상도 한다. 동서고금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을 향해 ‘오늘은 누가 수청을 들겠는고?’ 하고 말이다. 서재가 주는 이 짜릿한 즐거움들을 어찌 전자책이 대신하리오.

넷째, 종이책만이 헌책방을 찾는 재미를 줄 수 있다. 헌책방을 찾을 때마다 폐광에서 금맥을 찾는 기분이랄까? 컴컴한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기분이랄까? 요즘에는 인터넷 헌책방들도 서비스의 날개를 달았다. 그러다 보니 나의 광맥 찾기, 그물 던지기가 더 한층 신바람이 난다. 알고 보면, 고전(古典)이란 헌책 중의 헌책으로 장구한 세월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책이 아니던가.

끝으로 종이책은 눈이 피곤하지 않다. 전자책은 내 눈의 망막을 과녁으로 삼기에, 오래 볼수록 내 눈은 무수한 빛의 화살에 쏘여 신음하게 된다. (빛이 화살인 줄은 빛 공해로 눈 수술을 받은 이는 실감할 것이다.) 개중에는 책만 펼치면 눈이 시려 눈물이 난다는 사람도 있긴 하다. 숫제 ‘자기는 정말 책을 보고 싶은데 눈이 안 따라준다’는 식이다. 이는 그 동안 책을 홀대한데 대한 책의 투정인 셈이다. 자주 보고 애정을 주다보면 어느새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연인이 되리라 확신한다.

비좁은 지하철 안, 젊은이들 하나같이 스마트폰에 시선을 붙잡혀 있을 때, 귀밑머리 새하얀 어르신 한 분 돋보기안경을 끼고 종이책을 읽고 있는 모습. 그야말로 가슴 찡한 감동이다. 도도한 전자기기의 물결, 그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종이책의 순정이여!

2012년 국민독서의 해를 맞이하여 새삼 외쳐본다. 힘내라 힘! 종이책 파이팅!

부울경신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