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 시인

‘오, 성(城)이여, 오 계절이여,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랭보(Rimbaud 1854~1891)의 시 구절처럼 정말이지 상처받지 않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우울해지게 마련이다. 그 정도가 심하면 ‘우울증’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 끓는 청춘들은 실연에 빠질 때면 당장이라고 죽고 싶고, 중년의 사업가는 심사숙고한 투자가 실패로 끝나면 죽고 싶고, 어떤 부인은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외도를 하면 당장 ‘너 죽고 나 죽자’하고 싶고........

우울증 환자가 갈수록 늘어간다고 한다. 내년부터 전 국민 대상 건강검진에도 넣을 예정이란다. 하지만 ‘우울’과 ‘우울증’은 엄연히 구분이 되어야 한다. ‘우울’이란 소위 ‘마음의 감기’라 하여 잠시 기분이 저조한 것이고, ‘우울증’이란 그 정도가 심하고 상태가 길게 지속되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잠시 우울한 것을 두고 지레 우울증으로 과민 반응하는 건 문제다. 일과성 우울이야 잘 다루면 재기의 발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심한 우울증은 자기 의지만으로는 곤란하다. 전문의를 찾아가고, 주변 가족들의 관심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사람마다 크든 작든 자기 몫의 우울한 사연은 겪게 마련이다. 필자 역시 쉰 고개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돌이켜 보면 수차례 고비가 있었다. 무슨 자랑이랍시고 늘어놓을까마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으로 간단히 소개할까 한다.

첫째 고비는 대학 실패로 방황하던 시절, 당시에는 길을 가다가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고교 동창생을 보면 슬그머니 피했던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어엿한 대학생, 나는 가난한 재수생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실연의 기억이다. 대학시절 사귀었던 아가씨가 졸업과 함께 군 입대를 앞 둔 내게 돌연 절연 선언을 했던 일, 입대도 하기 전에 ‘고무신 거꾸로 신은’ 애인, 그때의 내 심정은 이랬다. ‘내 입술은 잠자리 날개처럼 떨렸으나 다음의 말 한 마디는 뼈아프게 똑똑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

세 번째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 근무 시절, 과로와 함께 일사병으로 쓰러졌던 때. 정든 가족은 만 리 밖에 있고 온종일 링거 병을 매단 채 병상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라니.........이토록 열심이었지만 정작 진급에는 누락되었을 때 등이다.

지나고 보면, 인생이란 날씨와 같다. 갠 날도 있고 우중충한 장마도 있다. 장마 같은 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쨍하고 볕들 날’도 빨리, 또는 천천히 다가오게 마련이다. 세월이 어디 좀 먹던가. 부디 섣부른 판단보다 느긋하게 그대 우울과 맞서 보시라.

되새겨 보면, 우울도 우리 영혼의 담금질이다. 맹자(孟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하늘이 장차 어떤 이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뼈를 힘들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행하고자 하는 바를 어지럽게 한다. 이는 이 사람의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기어이 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글/박하

박하 시인: 본명 박 원호, 부산대 박사과정 수료, 건설 칼럼니스트, 시집 <찔레꽃 편지>, <하늘나무>, <연장 벼리기>. 저서 <초고층빌딩, 홀로 도시를 꿈꾸다>, <글로벌 비전, 건설엔지니어의 도전>, <문명의 뿌리, 도시의 뿌리, 인프라의 걸작들> 등

부울경뉴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