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 시인

문명은 언제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유사 이래 인류는 ‘빨리’가는 것을 부러워했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빨리’ 움직여야 제몫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인류는 욕망의 변형인 놀이에서도 빠른 것을 좇았다. 썰매보다 스케이트가 재미있고, 스케이트보다 스키가 재미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상상의 산물인 동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 ‘권두운을 타는 손오공’, ‘축지법을 쓰는 도사들’처럼........

정복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 빨리’, 즉 속도를 지배한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멀리는 로마제국이 그랬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 말의 속뜻은 제국의 속주(屬州) 구석구석까지 당시로선 첨단 고속도로(아피안 로드)를 만들어 군대도, 물자도, 통신도 더 빨리 소통했다는 뜻이다. 소위 암흑기라 불리던 중세 유럽을 누가 깨웠던가? 동양의 속도광 칭기즈칸이 아니던가.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 육중한 철갑옷으로 거들먹거리던 동안, 칭기즈칸의 군대는 전광석화처럼 그들을 덮쳤던 것이다. 칭기즈칸의 군사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도 자유자재로 활을 쏠 수 있는 경무장 기병들이었다.

근대의 산업혁명 또한 따지고 보면, 속도의 혁명이었다. 기존의 말에 의존하던 수레들이 증기기관으로 바뀌면서, 길 위의 수레들도 바다의 배들도 날개를 단 것처럼 변했던 것. 또한 20세기 초반 미국 번영의 원동력도 따지고 보면, 미대륙 전역을 바둑판처럼 만든 연방(아이젠하워)고속도로의 공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이유가 뭘까? 6.25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서 세계무역 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된 배경 말이다. 학자들이란 원래 고상한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만, 근본원인을 찾는다면 ‘빨리빨리’가 일등공신일 것 같다. 물론 국민 대다수가 다함께 ‘빨리빨리’ 달린 결과인 것이다.

이런 경제적 발전을 두고, 동양통의 서양학자들은 유교자본주의니, 하는 알쏭달쏭한 논리를 펴지만 오히려 그 반대논리가 제격일 것만 같다. 말인즉슨, 조선조 500년 동안 상업과 무역을 일관되게 천시했던 고루한 관료층(선비들)의 지배에 대해, 마냥 억눌려 살아왔던 백성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부글부글 끓었던 한이 제 때를 만나자 일시에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억눌렸던 기간이 자그마치 500년이니, 그 동안 가슴깊이 축적된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들끓는 그 용암 같은 에너지가 신바람을 타고 터지기 시작했으니, 그 관성이 앞으로 2,3백년은 너끈히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일도 있다. 혹여 얼빠진 지도자가 등장하여, 세계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기업들에게 사사건건 딴죽이나 걸면서, 거저 퍼주기, 거저 갈라먹기에만 몰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라 곳간은 채 차기도 전에 거덜 나고, 국민들은 다시금 ‘보릿고개’ 그 시절로 후퇴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빨리빨리’로 인한 세대 간, 계층 간의 간격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 간격이 곧 ‘소통 부재인 것이다. 일테면, 신세대는 이메일, 문자메시지를 넘어 소위 SNS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판에, 기성세대는 ‘제발 천천히, 빨리 가면 멀미한단 말이야’하며 고집스럽게 외면하는 식이다.

한편 기성세대 중에서도 신문명을 쉽게 따라가는 이들도 많은데 그 이유가 뭘까? 그들은 가까이 있는 자식이나 젊은이들, 직장에서는 부하 직원들에게 물어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일찍이 예견했던 인류의 스승, 공자의 방식대로 말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걸 결코 부끄러워 말라(不恥下問)고........

다함께 ‘빨리빨리’, 한두 사람이 아닌 모두의 평균속도를 높여갈 때, 진정한 역사의 진보가 이뤄질 것이다. 개인보다는 가족, 가족보다는 사회, 나아가 국민전체의 평균속도 측면에서 본다면, 선진국에 배해 우리나라는 여전히 느린 편이다.

* 글/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