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 신사로 늘 당당했던 그 친구가 생각난다. 시류를 좇아 다들 머리 염색을 하는 친구들 속에서 그는 단연 돋보였다. 그야말로 ‘세한연후(歲寒然後)에 드러나는 송백(松柏)의 지조’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친구는 어느 날 안타깝게도 변절을 했다. 다름 아닌 여식의 결혼식을 맞이하여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겼던 것이다.

말인즉슨, 딸자식의 애원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변절’을 하기로 마음먹고, 결혼 이틀 전날, 머리 염색을 했다고 한다. ‘흐흠, 십년은 젊어 보이는 군.’ 거울을 보며 내심 쾌재를 부르고, 집에서는 가족들의 환대를 받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난리가 났다. 밤새 얼굴이 가렵더니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올랐다.

거울을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마치 판정승으로 진 권투선수의 얼굴이 이보다 더할까.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 주사를 맞고 온갖 처방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래도 결혼식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 결국 그 친구는 퉁퉁 부은 얼굴로 식장에 들어서야만 했다.

주변의 강요 때문이든, 스스로의 노력이든 간에 젊게 보이려는 풍조가 이미 대세이다. 이런 풍조가 워낙 드세다 보니 호칭도 따라서 달라지고 있다. 일례로 머잖아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일테면, 친손주가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부를 때는 ‘오냐, 오냐, 아이구, 내 새끼’하다가도 딴 집 애들이 부르면 펄쩍 뛸 듯이 놀란다. 물론 스스로 나이티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도 지극하다. 일흔이 훌쩍 넘은 분들도 응당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쉬쉬하며 주름살 수술을 하고, 옷맵시에도 부단히 신경을 쓰고 있다.

이런 현상에 덩달아 ‘노(老)’자가 들어가는 말도 싫어한다. 일테면 노인, 노형, 노년, 노익장 등등 급기야는 동양의 심오한 철학자 노자(老子)까지 도매금으로 된서리를 맞을 지경이다.

기실 노(老)자는 늙었다는 의미보다 무르익었다는 뜻으로 상대에 대한 존경의 뜻이 오롯이 담겨있다. 노련(老鍊), 노숙(老熟), 백전노장(百戰老將), 노형(老兄) 등이 있다. 또한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 만해도 노(老-라오)자를 여전히 애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라오스(老師)는 나이 상관없이 선생, 라오공(老公)은 남편, 라오포(老婆)는 아내, 라오반(老板)은 사장, 라오후(老號)는 호랑이를 뜻한다.

이처럼 ‘노(老)’자는 손윗사람이나 존경이나, 신령스런 동물에 대한 접두사로 확실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노(老)자가 들어가는 말 중에 가장 멋진 말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노익장(老益壯)을 들겠다.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이 못지않게 의욕이나 기력이 왕성함’의 뜻이다. 의학적으로야 어려운 일이지만 나이가 들어가도 생각이 유연한 분들은 많다. 그런 분은 대개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은 분들로 세상살이의 도(道)가 터진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자리에선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을 일러 ‘노익장(老益壯) OO씨’라고 했더니, 좀 언짢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내심 놀란 적이 있다. 그 말의 진의를 충분히 아실 텐데도, 일단 ‘노’자만 들어가서 싫은 듯했다. 뜻이 아무리 고와도 본인이 싫어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익장 대신으로 ‘어르신’이라 부르기로 작정했다. 사전에는 ‘남의 아버지나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어른+신’으로 신과 통할 정도의 경륜이 높은 어른’이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또한 ‘노’자로 된 한자말보다 순우리말이라 더욱 정겹기도 하다.

그런데도 거부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일흔이 넘으신 여자 분들도 어르신이라면 마뜩찮은 눈치다. 일흔 연세에도 불구하고 아줌마, 왕언니,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었으면 하는 눈치이다. 일례로 일전에 필자보다 열 살이나 연배인 예순 후반인 지인에게 ‘어르신’하고 말했더니, 그분 대뜸 하시는 말씀, ‘어허! 어르신이라니! 마, 형님이라 캐라!’

어느 자리에서든 처음 만나는 분들에 대해서는 적당한 호칭을 찾느라 망설여진다. 한편으로 어르신이라는 정겨운 호칭마저 애꿎게 퇴박을 맞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한량없다.

부울경뉴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