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이의 뒷모습

* 박하 시인

‘김정일 사망’, 신문들마다 호외를 뿌렸고, 증권시장은 곤두박질쳤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하루 종일 뒤숭숭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른 아침, 열차 안에서 돌연사 했고, 그것도 사건 발생 52시간이 지난 뒤에야 공식 발표가 있었으니 말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었을까? 열차 안에서 괴한에 의해 저격을 당했는지, 그것이 혹시라도 쿠데타 기도였는지, 시신을 부검까지 했다면 분명 석연찮은 내막이 있을 거라는 둥.......온갖 소문들이 마치 먹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정치적 의미보다 한 인간의 마지막 뒷모습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옛날 조선시대만 해도 웬만한 사람들은 ‘가야할 때’를 분명히 알았다고 한다. 대단한 선승(禪僧)이 아닌 일개 서생(書生)이라도 말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면 당신 스스로 겸허하게 주변 정리를 하는 일. 지난 생애를 돌아보고 남기고 갈 것, 나눠주고 갈 것, 버리고 갈 것, 또 저승까지 가져갈 것까지....... 일례로 분재기(分財記)만 봐도 그렇다. 당신 사후에 재산 상속을 두고 자식들 간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분쟁거리를 사전에 없앴다는 뜻이다.

한편 부모님의 별세를 앞두고 자식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부모님이 연로하시면 자식들은 으레 수의(壽衣)를 장만하고, 관곽재로 쓸 황장목까지 마련해 두었다. 다음으로 별세하는 순간, 임종(臨終)은 자식의 의무로 생각했다. 만약 자식으로서 임종을 못했다면, 이를 천하의 불효로 여겼다고 한다. 이와 달리, 어떤 이가 여행 중에 사고사나 병사를 하게 되면 객사(客死)라고 하여 엄청난 흉사(橫厄)로 여겼다.

다음으로 문집(文集)을 내는 일이다. 웬만한 선비라면 생전에도 문집을 내지만, 형편이 곤란한 선비는 벗들이 유고집을 내주기도 했다. 그 문집에는 고인이 생전에 남긴 편지, 시문 등이 오롯이 담기게 마련이다. 개인이든 나라든 역사는 모름지기 기록에 의해 전해지는 것. 한 생애의 마무리로 문집보다 더 아름다운 것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옛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이별의 의미보다는 작게는 한 생애의 마무리이고, 크게는 대대손손 문화와 역사의 계승이라는 의미가 더 강했던 것이다. 물론 옛날엔 보름 정도의 장례 절차와 삼년상이라는 긴 복상(服喪) 기간에 대해 지나친 허례허식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당시와 지금은 문명의 속도가 다르고, 가치관 역시 다르니 단순 비교는 무리가 있다. 다만 그 때나 지금이나 한 인간의 죽음의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세대의 마무리인 동시에 다음 세대를 향한 인계인수이기도 한 것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죽을 복을 타고 났다’는 말이 떠오른다. 과연 죽을 복도 타고 나는가? 아니면 개인의 수양(修養)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이와 관련, 기억나는 한 분이 있다. 여든 연세에 암 판정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그 할머니. 의사와 가족의 수술 권유도 정중히 거절한 채 담담하게 마지막을 맞으셨던 분, 문병 간 내게 곱게 빚은 머리의 모습도 뜻밖이었지만, 빙그레 웃으시며 ‘살만큼 살았어!’하시는 건 충격을 넘는 감동이었다. 3개월쯤 뒤에 장례식 때 들은 얘기는 더욱 놀라웠다. 그 동안 알뜰히 모으신 용돈으로 손주들마다 일일이 통장까지 남겨주셨다는 게 아닌가.

요즘 건배사 중에 ‘99,88,234’라는 말이 있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다. 어쩐지 건강에 대한 욕구보다 장수의 욕망이 더 강해 보인다. 또 있다. 얼마 전에는 ‘호모 한드레드(Homo Hundred)'라는 특집방송도 있었다. 물론 건강한 장수는 정말 바람직하다. 하지만 장수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정작 마무리가 소홀해지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생명존중이라는 미명으로 마무리에 쏟을 최후의 한 방울, 품위 있게 ‘죽을 힘’마저 생명 연장에만 쏟아버리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떠나갈 때의 뒷모습이 아름답기를 바라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럴진대, 당사자 스스로 떠난 뒤의 뒷모습을 미리미리 상상해보고 조금씩 준비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