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를 우리다

                                               공 태 점 

하얀 백자 다관에 꽃차를 넣고 끓는 물을 붓는다. 다관 뚜껑을 살며시 닫고 장구통 모양의 모래시계를 삼 분으로 맞추어 재빨리 뒤집어 놓는다. 고운 액상의 파란 모래 알갱이가 장구통의 잘록한 허리 아래로 일정하게 흘러내린다. 정교하게 떨어지는 미세한 입자들을 지켜보면서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낮 동안 몸이 불편한 남편의 투정을 다 받아내다 보면 물너울처럼 밀려오는 울분을 가까스로 삭이며 시간을 견딘다. 얼레에 매인 연처럼 바깥으로 나풀거리는 마음을 꿇어앉혀 나에게 차 한 잔 곡진히 대접하기로 한다. 하루 중, 이 시간만큼 내가 하고 있는 행위에 충실히 집중하는 시간도 드물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포개지는 순일한 의식 같은 것이다.

집 나간 마음을 불러들여 마주하고 싶을 때는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은데 거리가 멀다. 응어리진 가슴을 풀어헤쳐 숨통을 틔우고 싶거나 심란할 때 술을 마시면 가라앉는다지만 그 맛을 잘 모른다. 한 모금만 마셔도 불을 담아 부은 듯 얼굴이 붉어져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머리까지 아파온다. 술은 가슴을 뜨겁게 데우지만, 차는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탁자 위에 밀쳐둔 소소한 다구들에 눈길이 머문다.

육신의 허기가 아닌 정신의 사치를 위한 시간이다. 차를 우리고 마시는 일은 신의 영역을 넘보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건더기가 아닌 향기를 향유하는 것은 신들이나 하는 미감 의식일 것 같다. 마음이 편안하고 그 향에 머리가 맑아진다. 차분하고 경건해진다.

연말 총회 자리에서 찻잔을 하나씩 선물로 받았다. 자신이 받은 찻잔을 조심스레 건네주던 손길이 있었다. 찻잔은 은은한 비색이 감돌아 빛깔도 곱고 나뭇잎 모양의 잔 받침도 마음에 들었다. 둘이서 마실 때는 찻잔도 서로 쌍이 맞아야한다며 다도를 하는 동인이 눈짓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마주 보고 마시려면 찻잔도 짝이 맞으면 좋겠다던 내 말을 흘려듣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나보다 어린 나이지만 매사 푸근하고 넓은 품을 지녔다. 오늘은 그녀의 마음과 마주하고 앉는다.

모래시계가 멈춘다. 움직이던 것들이 갑자기 멈출 때, 세상은 일시 고요해진다. 청각의 시각화, 아니 시각의 청각화인가. 시끄러운 곳에서는 향내가 덜 나고 어둠 속에서 소리가 더 잘 들리는 법. 차를 마실 때는 사람의 수가 적을수록 그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다성茶聖 초의선사도 차를 맛있게 끓이려면 마지막 인연이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 예를 다하라 일렀다. 다도를 정식으로 익히진 못해도 즐겨 마시다 보면 나름 형식을 갖추려 노력한다.

백자 다관에 정성스럽게 우려낸 차 한 잔을 따른다. 잔 받침을 하고 조심스레 앞에 놓는다. 엷은 호박색 찻물이 든 찻잔을 가만히 두 손으로 받쳐 든다. 따스한 온기가 찻잔에서 손으로 전해온다. 잔을 천천히 움직여 음미하듯 향을 맡는다. 부드럽게 잔을 기울여 정신을 모은다.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는 명상에 든다.

먼저 눈으로 차의 빛깔을, 가까이 다가와 코로 향기를, 입안에 들어온 순간에는 차 고유의 맛이 전신에 퍼진다. 차는 마시기 전부터 의식을 치르기도 하지만,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차 맛을 느끼는 순간 머릿속은 온 우주와 닿아 있음을 느낀다. 차 맛이 입안에 머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대체로 짧은 시간 지속되다 희미해진다.

차 맛을 느끼는 시간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차를 우리고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이미 명징한 세계에 닿는다. 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는 찰나에 깊은 내면의 세계로 빠져든다. 미움과 원망, 분노, 욕망 등 온갖 찌꺼기는 남겨두고 향기로운 찻물로 우려낸다. 기다림과 수용, 비움과 나눔, 밝음과 맑음으로 충만해진다. 텅 빈 마음은 하심으로 돌아간다. 먼저 내 속의 것부터 덜어낸다. 다관 속 찻잎처럼 우려지고 걸러져서 나 아닌 누구에게 향기로 가서 닿을 수만 있다면….

나를 에워싼 크고 작은 인연과 우주 만물까지 그들의 존재를 존중하고 멀찍이 바라본다. 결국 내가 품어야할 인연들이 아닌가. 매 순간 미명에서 깨어 있긴 어렵겠지만 차를 대하는 순간만이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거울에 비춰진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마음 덜어낸 빈자리에 낮 동안의 출렁거림도 작은 행복으로 채워진다.

이 한 몸 걸러내고 우려져 향기로운 차 한 잔이 될 수 있다면, 자주 찻잔을 기울일 터이다. 한 줌 찻잎처럼 찌꺼기로 남을지라도….

▲ 공태점 수필가

▲ 공태점 수필가는……
경남 의령 출생
2000년 ˂문예한국˃으로 등단
2012년 경남문학 우수작품집상 수상
2016년 제2회 창원문학상 수상
수필집 ˂내 마음을 만지다˃ ˂비움의 의자˃
경남문인협회. 창원문인협회 경남수필문학회.
목향수필문학회. 경남 창원시낭송협회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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