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36회 <아아! 어머니, 어머니!>
Symphony in C minor ‘Fate’

아아! 어머니, 어머니!

문 : 당시 피고인이 작곡한 「민중의 노래」로 촉발된 불법시위로 말미암아 피고인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지요?
답 : 당시 시위가 그 노래로 촉발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법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시위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가에 의한 평화적인 시위였습니다.

문 : 그런데 피고인은 조사를 받는 과정에 국가보안법위반 혐의가 추가되었지요?
답 : 그렇습니다. 그들은 내가 전혀 모르는 사실에 대하여 자백을 강요했습니다.
문 : 그때도 피고인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했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러한 증거 조작과 고문을 통한 조작된 사건의 재판에서 피고인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지요?
답 : 예.
문 : 그 재판이 있었던 날, 피고인에 대한 실형 선고에 충격을 받은 피고인의 어머니가 법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피고인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그 교통사고는, 만약 당시 김인환의 사건조작이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피고인의 재판이 없었더라면, 재판이 있었더라도 피고인에게 실형이 선고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였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요?
답 : 재판이 없었다면, 어머니께서 그날 법정에 나오시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장소에서의 교통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문 : 피고인의 아버지는 피고인이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셨지요?
답 : 예.
문 : 그래서 피고인의 어머니는 단 하나뿐인 피붙이인 피고인을 홀몸으로 키우셨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 어머니를 사랑하였나요?
답 :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문 : 그러한 어머니를 죽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당시 공안검사인 김인환이었지요?
답 :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 : 피고인,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피고인은 당시 김인환이 조작한 사건 때문에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고 소년원에 가게 되었지요? 맞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문 : 피고인은 대학 때 김인환이 조작한 사건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실형 3년의 선고를 받았지요? 맞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 선고가 있었던 날, 충격을 받은 피고인의 어머니가 법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었지요? 맞습니까?
답 :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 : 그렇다면 피고인은 이와 같이 사건을 조작하고, 피고인이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까지 죽게 만든 김인환에게 보복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답 : 보복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요. 당연히 보복하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 : 피고인, 이제 자백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상피고인 박형기가 피고인과 함께 범행을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범행에 사용된 도구가 피고인이 재직하는 홍익문화연구소의 연못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공소사실을 부인하겠습니까?
 

기영은 준하를 보았다.
당당하던 준하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다.
아아! 어머니, 어머니! 가엾은 어머니!
평생을 인고 속에서 사셨던 어머니.
그 삶 자체가 한이 되어 버렸던 어머니.
그 영혼조차 한이 되어 버린 어머니.

어머니! 지금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생명을 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를 알고 계십니까.
당신의 젖가슴 같은 무덤가에는 지금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 있겠지요.
당신의 숨결 같은 바람소리만이 그 무성한 잡초를 어루만지고 있겠지요.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한 산속 무심한 산새소리만이 당신의 넋을 위로하고 있겠지요.

◇

어느 누구도 독재시대가 그렇게 끝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혼란이 왔다.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사람들은 이제야 드디어 민주시대가 올 것으로 낙관했다. 진정한 국민주권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희망일 뿐이었다.

혼란의 와중에서 독버섯 같은 새로운 독재 권력이 잉태하고 있었다. 이른바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그 권력은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독재 권력보다 더욱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꿈은 좌절되었다. 희망이 컸기에 좌절도 더욱 컸다.

대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독재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소년과 소녀의 기대도 좌절되었다. 더 짙고 어두운 암흑시대가 왔다. 소년은 그 짙고 어두운 암흑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불빛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그해 겨울, 대장의 공판이 있었다.

소년과 소녀가 대장 어머니를 모시고 법정으로 갔다. 겨울 방학이라 집에 와 있던 안경도 법정에 나와 있었다. 홍익문화연구회 부회장이라는 남학생과 사학과 여학생도 보였다. 법정은 어두웠다. 어두운 동굴에 갇힌 소년의 마음보다 더 어두웠다. 검은 법복을 입은 검사와 판사가 어둠 속 유령처럼 음산한 눈빛으로 대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포승줄에 묶인 대장이 법정에 섰다. 대장은 초췌하게 보였다. 야윈 얼굴과 부르튼 입술, 초췌하게 보였지만, 그러나 대장은 그들 유령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장의 눈빛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대장은 무덤 속 같은 어두운 법정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사람이었다.
 

유령이 대장을 추궁했다.

― 197×년 ××월, 피고인은 부산역 광장 및 도심에서의 불법소요사태 당시 시위를 주동한 사실이 있지요?
― 주동의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시위에 참가한 적은 있습니다.
― 그 시위에서 피고인은 화염병과 쇠파이프 등 무기를 사용하였지요?
― 없습니다. 저는 평화시위를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화병병과 무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평화시위를 하자고 호소했습니다.

― 피고인의 아버지는 소위 빨치산이었지요?
―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 피고인은 어릴 때부터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공산주의사상을 주입받으며 자랐지요?
― 저는 학교에서보다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저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그러나…….

― 그만, 피고인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유령이 대장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대장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유령을 똑바로 쳐다보며 더 크게 말했다.

― …… 아버지께서 추구하셨던 이념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한때 공산주의를 따랐지만, 전향한 이후 그 이념을 초월하였습니다.
― 그만, 됐다니까.

유령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대장은 유령의 말을 무시하고 더 크게 말했다.

― 아버지께서 추구하신 이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홍익인간이화세계弘益人間理化世界입니다. 아버지의 그 이념은 지금도 제 가슴에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 됐다니까. 그만하라잖아.
유령이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대장의 말을 잘랐다.
― 피고인, ‘새로운 통일을 위한 서시’ 라는 이 글은 피고인이 쓴 시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쓴 시인가?
― ‘새로운 통일을 위한 서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쓰신 시입니다.

― 이 시에 나타난 ‘백두산 정상에 오른다’는 의미는 통일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닌가?
―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버지의 이상은 통일을 넘어 이화세계, 홍익세상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 그 통일이라는 것이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 아닙니다. 그 글을 쓰실 때의 아버지의 생각은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였습니다.

―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였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통일의 방법으로서 적화통일도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 적화통일이란 것은 무력에 의한 통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아버지는 폭력을 싫어 하셨습니다. 저 또한 폭력을 싫어합니다.

― 「민중의 노래」 라는 이 노래는 피고인이 작사, 작곡한 것이 맞지요?
― 그 노래의 제목은 「민중의 노래」가 아니고 「홍익의 노래」입니다. 제가 작사, 작곡하였지만, 가사의 일부가 바뀌었습니다.

― 이 노래의 가사에는 ‘민중’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여기에서의 ‘민중’이란 북한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인민대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 아닙니다. 굳이 말한다면 국민주권에서의 ‘국민’의 의미로 쓴 것입니다.

― 그렇다면 왜 ‘국민’이라고 하지 않고, ‘민중’이라고 표현하였는가?
― 그것은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국민주권이란 서구 실정법이 도입된 이후부터의 개념이지만, 민중이란 그러한 국민주권보다 광의의 개념으로서 역사 속에서의 백성, 민초란 말을 현대적인 의미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 피고인은 지금 본 검사에게 역사 강의를 하고 있는가? 본 검사가 묻는 말에 대해서만 대답해.

유령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대장은 위축되지 않았다.

― 묻지 않았다면, 대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피고인은 이 노래를 대자보로 만들어 학교 게시판에 붙였지요?
― 붙이지 않았습니다.
― 그렇다면 누가 붙였다는 말인가?
― 그것은 나보다도 검사님께서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뭐라고? 피고인은 지금 본 검사를 조롱하는가?

― 피고인, 검사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대장 맞은 편 높은 의자에 앉은 또 다른 유령이 대장을 제지했다.

― 이 노래 악보아래 적힌 ‘청년 학도여, 독재타도, 유신철폐의 그날까지’란 선동문구는 피고인이 적은 것이 맞지요?
― 아닙니다.
― 그렇다면 누가 적은 것인가?
― 그것 또한 나보다도 검사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피고인! 대답만 하라니까.

유령이 다시 탁자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핏대를 올렸다. 유령의 핏발선 눈이 대장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유령이 얼굴을 붉히고 목을 꼿꼿하게 세운 채 다시 큰소리로 물었다.
 

― 197×년 ××월 초순경, 피고인은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 있는 협동서점에서 김형태란 사람을 만난 사실이 있지요?
― 만난 사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김형태란 사람은 없습니다.

― 그때 피고인은 위 김형태로부터 김일성의 주체사상 학습지침서인 「남조선 혁명을 위한 행동강령」이라는 인쇄물을 받은 사실이 있지요?
― 없습니다.
― 「남조선 혁명을 위한 행동강령」이란 이 인쇄물이 피고인의 집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나왔어. 그런데도 계속 부인을 하는 것인가?

유령이 손에 든 종이 인쇄물로 탁자를 탁탁 내려치며 윽박질렀다.

― 그것이 조작이란 사실은 누구보다 검사님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인쇄물을 알지도 못하고 더구나 그것을 집에 두었던 적이 결코 없습니다.

대장이 유령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윽박지르는 유령의 호통에도 대장은 조금도 위축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한 대장의 태도가 유령의 화를 더욱 재촉하였다.

재판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위를 주동하였다는 단순한 혐의가 아니었다. 유령은, 무간 스님의 말과 같이 빨갱이였던 대장 아버지처럼, 대장 또한 빨갱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소년이 지리산 천왕봉에서 보았던 대장 아버지의 시가 대장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증거로 변질되고 있었다. 놀라웠다. 아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대자보의 노래 가사 중 몇몇 단어를 적화통일의 이념적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유령의 상상력에 참으로 탄복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김형태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남조선 혁명을 위한 행동강령」이라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유령이 추궁하는 것처럼 정말 대장이 빨갱이가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었다. 소년이 아는 한 결코 아니었다. 재판은 분명 잘못 진행되고 있었다. 대장을 위한 국선변호사가 있었지만, 그는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단순히 재판을 위한 형식상의 요건만을 갖추고자 법정에 세워 놓은 또 하나의 허수아비 유령일 뿐이었다.

그날 공판이 끝나고, 대장이 정리에게 끌려 나가면서 법정에 있는 소년과 소녀를 보고 눈빛으로 말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걱정 하지 마. 내가 없는 동안 어머니를 부탁해.’

2주일이 지나 대장의 공판이 다시 열렸다. 유령이 신청한 증인이 나왔다. 법정에 들어선 증인의 얼굴을 본 소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령이 호명한 증인은 의외로 따까리였다.

대장의 재판과 따까리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순간 소년의 뇌리에 대자보가 붙었던 비 오는 날의 광경이 떠올랐다. 악동과 함께 있던 따까리와 손이 차가운 세모꼴 얼굴도 떠올랐다.

유령이 따까리에게 물었다.

― 증인은 B대학의 학내 동아리모임인 홍익문화연구회의 회원이었지요?
― 예.
― 홍익연구회의 회장은 피고인이었지요?
― 예.

― 증인은 「민중의 노래」라는 노래를 아는가요?
― 예.
― 197×년 ××월 초, 증인은 피고인과 함께 「민중의 노래」라는 악보아래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선동하는 문구가 기재된 대자보를 B대학의 게시판에 부착한 사실이 있지요?
― 예.

― 증인은 그날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있나요?
― 예. 그날 밤에 학교 앞 식당에서 홍익문화연구회 월례회가 있었습니다. 월례회를 마치고 피고인이 내게 와서 함께 남아 할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 그 할 일이란 것이 증인과 함께 대자보를 붙이는 것이었지요?
― 예, 그때 피고인이 마분지에 미리 만들어가지고 온 악보를 내보이며 함께 게시판에 붙이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피고인과 함께 게시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악보를 게시판에 붙였습니다. 피고인이 게시판에 악보를 붙이고 그때 비가 와서 제가 피고인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습니다.

― 대자보를 붙일 때, 피고인과 증인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 예, 우리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다른 회원들은 월례회를 마치고 모두 집으로 간 뒤였습니다.

― 위 대자보를 부착하고 나서 증인은 위 대자보의 부착 사실을 경찰에 제보하였나요?
― 예. 처음에는 무슨 내용인줄 몰랐는데, 게시판에 붙여진 악보와 악보아래 적힌 데모선동 문구를 보고 잘못하면 나도 처벌을 받겠다싶어 그날 밤에 바로 경찰서에 가서 알렸습니다.
― 이상입니다.

― 저 사람은 홍익회 회원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법정 앞쪽 의자에 앉아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사학과 여학생이었다. 일순 법정이 웅성거렸다.

― 모두 조용하세요. 저 여자 누구야! 정리, 저 여자 당장 쫓아내.
높은 의자에 앉은 유령이 손짓으로 정리를 부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정리 두 사람이 달려와 사학과 여학생을 끌고 나갔다. 곁에 앉아있던 홍익회 부회장인 남학생도 일어나 함께 나갔다.

―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저 사람은 홍익연구회 회원도 아니야. 저 사람이 월례회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런데 어째서 저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거야?

소년 옆에 앉아 있던 소녀가 울음 섞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도 알고 있었다. 안경도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소녀보다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따까리가 홍익연구회 회원이라니……. 이처럼 사실을 조작하는 것이 법정인가. 도대체 대장이 어디 사람이 없어 하필이면 따까리와 함께 대자보를 붙인단 말인가.

실체적 진실은 조작된 음모 앞에 너무도 무력했다. 또 한사람의 증인이 나왔다. 소년은 다시 놀랐다. 아! 저 친구는! 손이 차가운 세모꼴 얼굴이었다. 홍익연구회의 기획부장이라고 했던 친구였다. 놀라기는 소녀가 더 했다.

유령이 세모에게 물었다.

― 증인은 B대학의 학내 서클인 홍익연구회의 기획부장 겸 총무였지요?
― 예.
― 증인은 197×년 ××월 초순경, 피고인과 함께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 있는 협동서점에서 김형태라는 사람을 만난 사실이 있지요?
― 예.

― 그때 위 김형태가 피고인에게 「남조선 혁명을 위한 행동강령」이라는 인쇄물을 주면서 무장봉기를 주도하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을 옆에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이 있지요?
― 예.
― 그래서 증인은 피고인의 간첩행위를 경찰에 제보했던 것이지요?
― 예.
― 이상입니다.

유령이 신문을 끝냈다. 소녀가 울먹이는 소리로 다시 말했다.

― 거짓말이야. 모든 것이 거짓말이야.

소년의 예감은 적중했다. 대자보가 붙었던 비 오는 날, 그 불길한 징조가 현실화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악동과 관계된 일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법정까지 조작한다는 것이 악동의 생각만으로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악동을 조종하거나, 아니면 악동과 공모한 또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대장은 그들이 치밀하게 준비하여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아니 대장이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대장을 강제로 구덩이에 집어던진 것이다. 그 구덩이는 대장이 빠져나오기에는 너무도 깊었다.

2주일 후, 대장에 대한 선고 공판이 있었다.

―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

놀랍게도 대장에게 적용된 법은 국가보안법이었다. 유령의 선고를 듣는 순간에도 대장은 놀라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대장은 오히려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유령을 지긋이 올려보고 있었다. 소녀가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 말도 안 돼. 이런 재판이 어디 있어? 이렇게 조작된 재판이 어디 있어? 내가 오빠를 구할 거야. 내가 반드시 오빠를 구할 거야.

법정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없었다. 양심의 저울도 없었다. 정의의 칼도 없었다. 조작된 음모만 가득했다. 오로지 가공된 거짓말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년은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녀가 울고 있었다. 대장 어머니가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선고가 끝나고 그나마 빛을 내고 있던 대장이 끌려 나가자, 법정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잠겨든 것 같았다. 소년은 그 어둠에 질식할 것만 같아 서둘러 법정을 빠져 나왔다. 하늘을 보았다. 하늘조차 어두웠다. 어두운 하늘 위로 성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진눈깨비였다. 하늘도 울고 있는 것인가.

그때서야 소년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눈물어린 소년의 눈에 대장 어머니가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법원 정문 앞 왕복 4차선 횡단보도였다. 길 건너 맞은편에는 적색신호등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 안 돼.
미처 뛰어가 붙들 틈도 없었다. 소년의 외침과 끼이익, 하는 자동차의 급제동 소리와 퉁, 하고 물체가 부딪히는 둔탁한 파열음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대장 어머니의 가냘픈 몸이 하늘로 둥실 솟구치고 있었다.

어릴 적 노루사냥에서 총을 맞고 솟아오르던 노루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장 어머니가 춤을 추고 있었다. 허공으로 치솟은 가냘픈 몸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춤 속에서 시간은 정지되어 있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모든 사물도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소년은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 어머니!

절박하게 외치는 소녀와 안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와 안경이 달려갔다. 소녀가 먼저 무릎을 꿇고 당신의 가냘픈 몸을 끌어안았다. 진눈깨비로 젖은 도로 위로 당신이 흘린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 아아! 어머니, 어머니!

그 핏물과 함께 소녀의 절규와 눈물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소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소년은 넋이 나간 듯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만치 산중턱 위에 하얗게 눈을 덮어쓰고 웅크려 앉은 무간암이 보였다. 무간암이 올려다 보이는 산중턱 아래에 대장 아버지의 묘소가 있었다. 대장 어머니의 가벼운 시신은 그 아버지의 묘소 곁에 묻혔다.
 

극락왕생을 비는 무간 스님의 독경을 끝으로 상여를 메고 올라왔던 동네 사람들은 모두 산을 내려갔다. 새로 생겨난 또 하나의 봉분 위로 굵은 눈발이 어지럽게 날렸다. 무덤가에는 이제 대장과 소년, 소녀, 안경 그리고 대장을 지키려고 따라온 경찰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대장의 어깨 위에 눈이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당신의 가볍고 초라한 몸이 더욱더 가볍고 초라한 목관 속에 뉘인 채 땅 속에 묻힌 지 한참이 지났지만 대장은 미동도 않은 채 그대로 꿇어앉아 있었다.

재판에서 실형을 언도 받았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유일한 상주로서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단지 사흘 동안의 구속집행정지 결정이 있었다. 대장은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할 몸이었다.

대장은 여전히 무덤 앞에 앉아 있었다. 대장의 가슴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심장 속에도, 뼈 속에도 회한이 사무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장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너무 큰 슬픔과 너무 큰 분노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냉정해 지는 것일까. 대장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소년은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표정 없는 담담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대장의 가슴속에 맹렬히 타오르는 분노와 복수의 불길을……. 대장의 저 담담한 표정은 분노와 복수의 불길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안타까운 몸짓이거나, 아니면 그 복수를 반드시 실행하고야 말겠다는 냉혹한 결심을 했기 때문일 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경찰 중 한 사람이 다가가 조용히 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 오빠, 그만 일어나.

소녀가 울며 대장의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눈발이 날리는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대장이 천천히 일어섰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탓인지, 대장은 곧바로 일어서지 못하고 잠시 휘청거렸다.

대장은 입고 있던 삼베 상복을 벗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생전에 입었던 옷 한 벌과 몇 가지 유품과 함께 태웠다.

― 오빠. 미안해. 용서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어.
소녀가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 미안하다. 어머니께 용서를 구하고 싶어.
소년이 말했다.

―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어머니의 운명인 걸. 아버지도 어머니도 죽지 않았어. 내 가슴속에 살아 있어. 정말로 슬퍼해야 할 것은 그분들의 육체가 소멸했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그분들의 생각과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이야. 너희들이 어머니를 기억해 준다는 것만으로 고마워. 진심이야.

― 오빠!

소녀가 갑자기 대장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소녀의 어깨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안경도 두꺼운 안경테 아래로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대장이 눈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소년은 보았다. 대장의 눈에서 비로소 흐르는 굵은 눈물을.

산을 내려오자, 마을 입구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장례를 치를 기간 동안 대장을 호송하여 장지까지 따라온 경찰차였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이 내려 어두운 하늘이 한층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대장이 경찰차에 탔다.

그해 겨울, 대장은 다시 떠나갔다.

― 연재 제37회 <산의 울음, 산의 노래 1>은 2019. 7. 1.(월) 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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