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32회 <겨울 환상곡 1>
Symphony in C minor ‘Fate’

겨울 환상곡 1

그러나 징소리를 무시하는 꽹과리 소리.

문 :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와 같이 증거를 조작한 사람이 김인환이었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김인환을 살해했나요?
답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 이상입니다.

곽 판사 : 피고인의 변호인은 신문해 주십시오.

박기영(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피고인은 대학2학년 때 ‘홍익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모임을 만들었고, 피고인이 그 모임의 회장이었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 홍익문화연구회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는 것이었나요?

답 : 아닙니다. 그 당시 홍익문회연구회는 개개인의 수행과 명상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우리 민족정신의 본질, 정수를 알고 깨우치자는 순수한 학술모임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문 : 그것이 홍익정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곽 판사 : 변호인, 지금 신문 내용이 이 사건 공소사실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공소사실과 관련되지 않는 신문은 자제하여 주십시오.

박기영 : 공소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검찰 측이 제기한 살해 동기에 대한 반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울리는 징소리.

문 : 피고인이 추구한 그 홍익정신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 말씀드렸다시피,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문 :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를 이롭게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 그것은 서로간의 소통입니다. 용서입니다. 사랑입니다.

문 : 지금 피고인이 재직하고 있는 홍익문화연구소는 그러한 홍익정신으로서의 소통과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는 곳이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곳에서 단절과 증오와 보복을 가르치진 않지요?
답 : 홍익인은 그러한 부정적인 것들을 배격합니다.

문 : 피고인에게 홍익정신은 단순히 학문상의 이론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할 신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답 : 그렇습니다. 학문상의 이론은 실천이 따를 때 그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문 : 피고인은 당시나 지금이나 홍익인의 신념으로 생활하고 있습니까?
답 : 그렇게 살고자 매일 수행하고 있습니다.
― 이상입니다.
 

◇

지리산 종주산행은 소년에게 두 가지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나는 자신의 육체적인 능력과 한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소년은 어릴 적부터 자주 앓곤 했다. 노루사냥이 있었던 그해 겨울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 시험기간에도 주기적으로 앓았다. 감기와 몸살은 항상 소년과 함께 하는 동반자였다.

그러한 잔병치레로 인해 소년의 성격은 소극적이고 내향적이었다. 혹시나 아프지나 않을까 하는 건강에 대한 우려가 평소 소년의 행동을 위축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아스피린 네 알을 먹기는 하였지만, 4박 5일 동안의 힘든 산행을 이겨내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야간산행도 견뎌냈다. 그러한 산행 경험이 소년에게 육체적인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육체에 의해 정신이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육체적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바탕이 되었다. 강한 정신적 에너지가 강한 육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종주산행을 통하여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동반자였던 잔병치레는 정작 몸이 허약해서가 아니라, 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설정해 놓은 육체적 능력에 대한 한계에 스스로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완전히 허물어질 것 같았던 힘든 산행을 이겨냈다는 사실은 소년이 그때까지 습관적으로 낮게 설정해 놓은 육체적 한계를 허물어 버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스스로의 인식변화, 즉 내면의식의 확장을 통하여 외부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소년의 의식세계는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와 다름없었다. 소년은 소녀가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는 불안감, 그리고 악동이 또 다른 해악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보이지 않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불안과 강박관념으로 인해 소년은 내면의 긍정적 에너지가 점점 소모되어 미래에 대한 자신감마저 잃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것들은 소년의 불확실한 예단이 만들어낸 가짜그림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부정적 사고에서 비롯된 실체가 없는 허상이었다. 그러한 인식전환이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자아와 강한 의지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보았던 대장 아버지가 남긴 시 속에는 웅대한 포부와 이상이 담겨 있었다. 대장 아버지는 천왕봉에 올라 백두산을 품에 안고 홍익인간이화세계弘益人間理化世界를 꿈꾸고 있었다. 그것은 정작 대장 아버지가 대장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이었지만, 그 웅대한 포부와 이상은 소년의 의식에까지 깊게 파고들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소년이 생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 세계는 크고, 깊고, 넓었다. 그 아버지처럼, 대장도 그 장엄한 이상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자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었구나. 평소 소년이 부러워했던 대장의 대범함과 용기는 대장 아버지가 가졌던 그런 원대한 세계관의 영향이었구나.

이러한 각성이 이제까지의 습관화된 부정적인 사고를 지워주면서 소년의 내면의식에 강한 긍정에너지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 시에 나타난 대장 아버지의 원대한 세계는 소년에게도 넓고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크게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열린 넓은 시야와 전환된 인식은 소년에게 새로운 역사의식도 갖게 해주었다. 대장은 소년에게 아버지가 생전 탐독했다는 몇몇 역사서적을 빌려주었다. 그런 책들을 통하여 소년은 그동안 학교교과서에서 배웠던 역사의식은 권력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주관적 관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간 민중들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한다. 그 책들이 지적하고 있었다. 소년이 느낀 이러한 새로운 역사의식이 고대사는 물론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좌우대립이라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했다.

새롭게 느끼고 깨달은 인식전환이 소년에게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게 했다. 법대를 택할 때 가졌던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나름대로 정립된 구체적인 법조인상이 소년의 가슴에 자라나 있었다.

법조인으로서 단순한 개인의 영달이 아닌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익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뼈아프게 느꼈던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공익에 대한 의무감을 되새겼다.

이를 위해 소년이 세운 당면한 목표는 대학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겠다는 것이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소년은 오직 책 속에 파묻히기로 했다. 그 생활은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학교도서관으로 달려가고, 강의를 듣고, 도서관 문을 닫는 밤 10시까지 공부하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밤 11시, 간식으로 잠시 허기를 때우고 다시 공부를 하다 새벽 1시에 잠이 드는, 스스로 정한 규칙적인 생활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생활은 고등학교 때의 수험준비와는 또 다른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산행에서 체득한 의지력과 자신감이 소년을 이미 강하게 만들어 놓은 터였다. 소년은 그다지 힘든 줄을 모르고 잘 적응해 나갔고, 그런 생활패턴이 습관화되면서 뚜렷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

중앙도서관 뒤편 산책로에 노란 은행잎이 찬바람에 분분히 흩어졌다. 벌써 겨울의 문턱에 성큼 들어섰다. 토요일, 저녁 시간이 된 줄도 모른 채 소년은 도서관에서 책에 매몰되어 있었다. 평소 학생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중앙도서관의 좌석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반이 넘게 비어 있었다.

칸막이를 한 소년의 맞은편 좌석도 비어 있었다. 맞은편 의자 뒤에 누군가가 다가와 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래 잊고 있었던 아카시아향내 같은 머리칼 체취가 코끝으로 미세하게 풍겼다.

고개를 들었다. 소녀였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목뒤로 한데 묶은 소녀가 방긋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도서관 천장의 형광등 불빛을 받은 길고 흰 목이 눈부셨다. 소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함께 저녁을 먹으러가자고 했다.

소년은 모처럼 만에 일찍 도서관을 나왔다. 두 사람이 도서관을 나와 학교 정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소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손짓으로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저기 오빠 아냐? 오빠.

소녀가 저만치 게시판 앞에 서있는 사람을 향하여 손을 흔들면서 불렀다. 대장이었다. 대장이 일행 두 사람과 함께 게시판에 큼직한 마분지에 작성한 공고문을 부착하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은 여학생이었다.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대장이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게시판 앞으로 걸어갔다.

― 마침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둘 다 한 번 만났으면 했는데.
마분지 모서리에 압핀을 꽂고 있던 대장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게 뭐냐?
그렇게 묻는 소년은 이미 마분지공고문에 적힌 글을 눈으로 읽어가고 있었다.       

    문득 무간암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대장은 무간 스님 앞에서 아버지가 걸었던 홍익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 홍익의 길로 가는 첫걸음이구나?
소년이 말했다. 대장은 그냥 빙긋 웃었다.

― 오빠, 저녁은 먹었어요? 함께 저녁 먹으러 가요?
― 그렇지 않아도 우리도 가려던 참인데, 모두 함께 가자.

대장이 함께 공고문을 부착하고 있던 일행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행은 학교 정문 앞 민속주점으로 갔다. 입학식 날 갔던 주점 겸 식당이었다. 대장과 함께 있던 여학생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라면과 파전, 막걸리를 시켰다. 여학생은 발랄하고 생기가 넘쳤다.

― 서로 인사해. 나와 함께 우리 홍익회를 만드는 창립 멤버들이야.
대장이 함께 온 일행 두 사람을 소개했다. 남학생은 대장과 같은 정외과 1학년이고, 여학생은 사학과 2학년이라고 했다. 대장이 소년과 소녀를 일행에게 소개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소녀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반갑습니다.
사학과 여학생도 고개를 숙이며 쾌활하게 인사했다.

소년은 일행 중 먼저 남학생과 악수를 했다. 순간 소년은 섬뜩했다. 손이 너무 차가웠다. 다섯 개의 차가운 고드름을 잡는 느낌이었다. 마치 냉혈동물의 피부에 닿는 것처럼 오싹했다. 역삼각형의 긴 얼굴에 턱이 뾰족하고 미간이 좁았다. 연구회의 기획부장 겸 총무라고 했다. 문득 악동을 대할 때와 같은 불온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여학생의 손은 따뜻했다. 둥근 얼굴에 오뚝 선 콧날, 여학생은 그 얼굴만큼이나 둥근 가느다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 속에서 선하고 영리하게 보이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탁자 위에 파전과 막걸리가 먼저 놓였다. 대장이 막걸리를 따랐다.

― 홍익문화연구회는 어떤 활동을 하나요?
소녀가 막걸리에 입술만을 갖다 대고 잔을 놓으며 물었다. 여학생이 영리한 눈을 빛내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여학생의 막걸리 잔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우리 고유의 역사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소녀의 물음에 여학생이 젓가락으로 찢은 파전 한줄기를 입 속으로 넣으며 말했다.

― 예? 어떤 점에서요?
소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학생을 보고 말했다. 그때 라면도 나왔다.
― 배고프다.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대장이 젓가락으로 라면가락을 휘휘저어 후루룩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러나 여학생은 라면그릇을 앞에 두고 계속 말했다.

― 현재의 사관史觀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현대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증사학實證史學과 헤겔에서 비롯된 공산주의 이념의 기초가 된 유물사관唯物史觀 내지는 사회경제사학社會經濟史學이지요.

유물사관이 레닌과 스탈린을 거치면서 독재의 수단으로 변질된 것은 따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가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는 실증사학이라는 것도 과연 우리나라에서 실증사학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가하는 것은 반성해 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여학생은 마치 역사 강의라도 하듯이 거침없이 말했다. 그 태도가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여학생이 목이 마른 듯 물을 한 잔 마시고 말을 이었다.

― 특히 우리의 고대사 부분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에 저술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조선시대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인데, 문제는 이러한 삼국사기나 동국통감이 중국의 사대주의사관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와 같이 사대주의사관에 의하여 변질된 우리 역사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제가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한 번 그들의 관점에서 왜곡시켜 버렸고, 현재 우리 역사는 이와 같이 중국에 의해 변질되고,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 버린 역사관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것이지요.

― 유물사관과 실증주의사관 외에도 민족사관民族史觀이란 게 있지 않아요?
소년이 여학생의 장황한 말에 반문하듯 말했다.

― 우리 홍익문화연구회의 취지가 거기에 있어. 홍익문화연구회는 이와 같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복원시키자는 거야. 일종의 민족사 찾기 운동이야. 새로운 민족사관 정립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어.
여학생 대신 대장이 소년의 질문을 받았다.

― 민족사 찾기 운동이라고? 하지만 민족사관이라는 것도 일종의 국수주의의 변형이 아닐까. 민족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극단적 애국심을 강조한다거나, 실증이 배제된 채 오로지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역사를 파악한다는 것은 일제와 같은 또 다른 국수주의를 낳을 위험성이 있는 것 같은데?

소년이 말했다. 대장이 의외라는 듯 소년을 한번 바라보고 말했다.

― 그것하고는 달라. 실증實證이라는 것이 무엇이니? 실증이란 그야 말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런데 현재 우리의 역사는 그 본질이 사대주의사관으로 변질되고, 일제의 침략논리와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왜곡되고, 그것도 모자라 이러한 변질된 역사의 실체를 발견하기도 전에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스스로 그 의미가 변형되어 버렸어.

홍익문화운동은 우리 민족의 본질, 그 정수를 알고 깨우치자는 것이야. 원래의 본질 위에 덧씌워진 껍데기를 걷어내자는 것이야. 사대주의사관과 일제에 의하여 왜곡된 역사를 바탕으로 한 현재의 실증주의사관의 중독에서 깨어나자는 것이야.

원래부터 존재해 왔고, 아니, 원래 모습으로 존재해야 했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되찾자는 것이야. 이것이야말로 원래 의미의 실증주의가 아니겠니. 실증이란 원래의 모습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이미 변형된 모습에서 찾은 실증은 변형된 존재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야.

그런 의미에서 홍익문화연구는 실증주의의 가장 본래적인 모습을 찾는 시도라고 할 수 있어. 네가 말하는 국수주의는 원래의 모습과 사상에서 그것을 오도한 역사관 내지 우월적 민족관이 그 모습과 존재형식을 변형시킨 것이야.

그러한 국수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에 근거한 유태인 학살이고, 일본의 우리민족 말살정책이라고 할 수 있지. 이러한 국수주의가 인류에게 가한 해악을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하지.

그러나 홍익문화운동은 그러한 국수주의를 배격해. 아니, 국수주의를 초월한다고 할 수 있어. 홍익문화운동은 우리 역사의 원래 있었던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자는 것이야. 과거부터 존재하였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지만, 그 존재 사실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숨결을 되살리자는 것이야.

그것도 변형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되살리자는 것이야. 그것은 네가 말하는 배타성에 근거한 국수주의와는 달라. 그런 의미에서 홍익문화운동은 민족주의사관인 동시에 신실증주의사관新實證主義史觀이라고 할 수 있어.

한 동안의 열변에 목이 타는 듯 대장이 라면그릇을 들고 국물을 후루루 마시고는 다시 잔을 들어 막걸리도 한 잔 마셨다.

― 그러한 우리 역사의 본래적 모습을 홍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니?
소년이 물었다.
― 그렇죠. 홍익이 우리나라의 개국기원이니까요.
처음의 여학생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그러면 아예 홍익역사연구회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 그것은 우리 연구회의 역사적 측면에서의 지적일 뿐이야. 문화라는 것은 역사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법률, 교육은 물론이고 종교, 문학, 예술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분야를 포함하는 개념이야.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홍익문화연구회는 이러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홍익부활운동이야.

― 그렇다면 그것을 모두 포괄하는 홍익의 개념이 먼저 정립되어야 할 것 같은데?
― 나는 그 개념을 무간 스님의 말속에서 이미 찾았어.
― 인간과 인간의 사이(間)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그것 말이야?

― 그래, 하지만 홍익의 개념은 인간과 인간의 사이뿐만 아니라, 무간 스님의 말과 같이 이 지구상에서의 모든 관계와 관계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야 해. 스님의 말씀처럼 지구상에서의 모든 관계가 평화롭고 조화롭기 위해서는 서로 상생하는 관계여야 해.

상생의 관계란 서로 소통이 되는 관계야. 소통을 통하여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관계지. 상생이란 서로 사랑하는 관계야.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를 베푸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야.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봐. 사랑이라는 말은 현대 서구 문명의 기초가 된 기독교의 대명제야. 자비라는 말은 동양 문명의 주류가 된 불교에서의 대명제야. 그리고 사랑이라는 개념은 시간적으로 볼 때, 예수의 출생에서 비롯되는 서기西紀로 표시돼. 그리고 자비라는 개념은 석가의 탄신에서 비롯되는 불기佛紀로 표시돼.

지금은 1970년대야. 그러니까 현대 서구사회의 도덕적, 종교적 근원인 사랑이라는 개념의 역사는 아직 2000년이 채 되지 않았어. 그리고 불기로 따지면 지금은 2500년대야. 그러니까 불교에서의 자비라는 개념의 역사도 겨우 250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지.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도 않는 단기檀紀는 무려 4300년이 넘고 있어. 홍익이라는 말은 도덕적, 종교적인 개념으로는 사랑, 또는 자비라는 말과 그 뜻이 같아. 따라서 홍익이념은 서구의 사랑이라는 개념보다, 불교에서의 자비라는 이념보다 훨씬 더 역사가 오래 되었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우리나라의 고대조상은 서구사회가 사랑이라는 이념으로써, 불교사회가 자비라는 이념으로써 그들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을 형성하기 이전에 이미 사랑과 자비라는 개념을 아울러 포괄하는 홍익이라는 개념을 정립해 놓았다는 것이야. 따라서 홍익이라는 개념은 우리 민족 고유의 가치관인 동시에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로 실체화되고 이념화된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적 가치관의 기원이라는 것이지.

그런데 현실은 어떻게 되어 있어. 우리의 가치관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구의 가치관에 매몰되고 말았어. 홍익문화운동은 이와 같이 외래문화에 매몰되어 버린 우리 민족 고유의 가치관을 복원시킴과 동시에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적 가치관으로 새롭게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야. 홍익문화연구회는 단지 역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 경제 등 생활전반에서의 홍익부활을 모색하고 있어.

대장이 웅변을 하듯 장황하게 말을 한 후 다시 막걸리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 
 

(― 하지만 홍익이라는 개념은 우리 민족의 성립 당시에 실제로 존재한 이념체계가 아니라, 후세의 민족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관념체계일 뿐이 아닐까?)
소년의 입 속에서는 이 말이 맴돌았다. 그러나 소년은 자기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문제를 두고 깊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년이 잠자코 있자, 대장이 다시 말했다.

―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희들도 우리 홍익연구회에 가입하는 것이 어떻겠어? 이 문제로 한 번 만나고 싶었어.
대장이 너희들이라고 말한 것은 소녀와 소년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대장의 권유에 소년은 내키지 않았다. 재학 중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목표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마당에 다른 일로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 홍익연구회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또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나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것 같아. 미안해.
소년은 완곡하게 대장의 권유를 거절했다.

― 홍익이라는 이념이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전파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실증성 여부를 떠나 추구할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요. 오빠, 나도 가입하고 싶어.
이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장의 말을 듣고 있던 소녀가 불쑥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주점 안은 왁자지껄한 소음과 소주와 탁주 냄새가 범벅이 되어 탁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러한 혼탁한 와중에서도 소녀의 눈은 이제까지 접해보지 않았던 강한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밤, 꽤 늦게까지 주점에서 대장 일행과 어울려 역사뿐만 아니라 당면한 시국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 주점에는 대장과 소년 일행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요구하는 다른 학생들의 보이지 않는 열망도 술을 마시며 내뿜는 담배연기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그날, 밤이 이슥해서야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가슴에 커다한 바위덩어리 하나가 얹힌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소녀가 대장이 주도하는 홍익문화연구회에 선뜻 가입하겠다고 했을 때, 문득 가슴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응어리였다.

― 연재 제33회 <겨울 환상곡 2>은 2019. 6. 3.(월) 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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