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31회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 2>
Symphony in C minor ‘Fate’

잠에서 깼을 때, 텐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는 그쳤지만, 텐트 안은 어둑하고 습기로 눅눅했다. 몸이 납덩이같이 무거웠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텐트를 나오니, 온통 안개였다. 온 세상이 짙은 안개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나무도, 숲도, 산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텐트 앞 바로 지척에 있는 대장과 소녀, 안경의 모습조차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 일어났구나. 몸은 좀 어때?
소년의 기척을 느낀 대장이 말했다.
― 오빠, 괜찮아? 많이 아픈 것 같아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
소녀도 걱정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소녀와 안경이 마주보고 앉아있는 중간에 코펠이 얹힌 버너불빛이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코펠에서 김이 솟는지 밥 익는 냄새가 났다. 텐트 안에서 네 사람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남은 밥으로 대장이 소금물을 버무린 주먹밥 네 덩이를 만들었다. 소녀와 안경이 서로 큰 것을 갖겠다고 장난치며 헤헤거렸다. 안개바람 속에서 텐트를 걷었다.

어제처럼 대장이 앞장서고 소녀가 그 뒤를, 소년과 안경이 차례로 뒤따랐다. 짙은 안개 때문에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안개 자욱한 으스름 산속을 이리저리 떠도는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하자, 다시 으스스 떨리며 뼈마다가 쿡쿡 쑤시며 아파왔다. 아스피린 두 알을 또 먹었다.

안개를 헤치고 노루목을 지나 반야봉般若峰)에 올랐다. 반야봉의 낙조落照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반야봉 정상에는 안개가 걷혀 환한 햇볕이 내려쬐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 아래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구름두루마리를 펼쳐 지리산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를 모두 덮어버린 듯 오직 연회색 구름바다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지리산 천왕봉 정상 원경

‘낫날봉’또는 ‘날라리봉’이라고 불리는 삼도봉三道峰을 지날 때부터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개재를 건너 토끼봉에 오를 때까지도 안개는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아스피린 약효가 떨어진 탓일까. 토끼봉을 내려오는데 땀에 젖은 몸이 다시 떨려오기 시작했다. 안경이 다람쥐처럼 쪼르르 대장을 앞질러나가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소년은 앞서가는 소녀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치고 힘든 걸음으로 드디어 총각샘에 다다랐다. 그때서야 안개가 바람에 날리면서 햇살이 뻗치기 시작했다. 배낭을 벗고 앉아 아침에 만든 주먹밥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총각샘의 물은 너무 차가워 이빨이 시렸다. 야영지가 있는 세석평전細石平田까지는 앞으로 다섯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서둘러야 했다.

명선봉을 오르는 경사가 심한 비탈길은 무척 힘들었다. 굽이굽이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구름 속에서 흘러내려오는 것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연하천烟霞泉, 그 연하천을 굽어보았을 때는 온산을 휘감아 돌던 구름안개도 걷히고 따가운 햇살이 살을 태울 듯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래도 안개 속을 떠다니는 유령처럼 걷던 산길보다는 훨씬 나았다.

백무동과 화개골이 내려다보이는 시원스런 경관을 이룬 삼각고지를 지나, 형제봉을 오르는 길목 왼쪽 능선 위, 형제바위에 이르러서야 잠시 배낭을 벗어놓고 가쁜 숨을 돌렸다.

지리산에서 수도를 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智異山女의 집요한 유혹을 물리치고자 서로 등을 맞대고 부동자세로 서있기로 하였다. 그러나 너무도 오랫동안 서 있다 보니 그만 몸이 굳어져 돌이 되고 말았다. 형제바위에 얽힌 전설이었다. 대장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커다란 두 바위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도 희고 맑아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고 하여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 하는 벽소령碧宵嶺에는 달이 없었다. 오직 내리쬐는 태양이 광활한 지리산 중심부의 잘록한 허리에서 열기를 내리쏟고 있었다.

벽소령의 벱실샘에서 목을 축인 후, 덕평봉으로 오르는 숲 속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다. 비록 땀을 흘려야하는 오르막길이었지만 부드러운 숲 속 흙길이 소년의 지친 발목과 무릎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덕평봉 남쪽을 돌아 나오자, 넓은 평지가 나왔다. 대장이 조그만 샘 앞에서 배낭을 끌렀다. 선비샘이라고 했다. 이 샘 위쪽에 배우지 못하고 얼굴마저 험상 굳어 평생을 천대받으며 살아, 그래서 살아생전 단 한 번이라도 선비 대접을 받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어느 노인의 무덤이 있다고 했다.

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이 샘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엎드리면, 샘터 위에 있는 노인의 무덤을 향해 절을 하는 꼴이니, 노인은 죽어서 선비 대접을 받는다고 얘기했다. 선비샘에서부터 작은 능선을 여러 차례 오르내려야만 했다. 소년은 점점 더 힘이 빠져갔다.

일곱 개의 봉우리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마치 일곱 선녀가 내려와 노는 모습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칠선봉七仙峰, 그 기암괴석 바위봉우리에 걸린 구름도 소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곱 선녀가 지금 나타난다고 해도 그리 반가울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 지리산 법계사, 해발 1,300m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지대 사찰

칠선봉에서 다시 몇 개의 바위봉우리를 타고 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경사가 급한 돌투성이의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너무도 지치고 힘든 나머지 온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는 듯 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대장과 소녀가 앞서 가고 있으므로 무작정 그 뒤를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안경도 의식하지 못했다. 어디를 가고 있는지 방향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 작고 하얀 풀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등산로를 약간 벗어난 키 작은 나무 아래 한적한 숲 속이었다. 소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꽃을 바라보았다. 숲을 스치는 바람에 하얀 꽃잎을 매단 가느다란 대롱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그 꽃송이가 지친 소년에게 인사를 했다.

― 안녕, 힘들지? 하지만 포기하지 마. 여기서 멈출 수는 없잖아.
― 넌 혼자서 외롭지 않니?
― 아니, 왜냐면 나는 이곳 숲 속 전설을 모두 알고 있거든. 여기 이렇게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숲 속 전설을 얘기해주고, 너같이 지친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아주잖아. 앞서가는 소녀를 봐. 힘을 내.
― 그래, 고마워. 네 말대로 여기서 멈추면 안 되지.
― 암, 그래야지. 힘을 내. 날 잊지 마.
― 그래, 꼭 기억할게.

소년도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소를 보냈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났다. 그냥 무심코 스쳐 지나가 버릴 수도 있을 작은 풀꽃 하나가 지쳐버린 소년의 다리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신선한 느낌과 감각이 경이로웠다.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났다.

소년은 풀꽃과 나눈 무언의 대화를 머리에 새기며 시상詩想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녀를 위한 노래였다. 소녀에게 그 풀꽃을 그려주고 싶었다. 소녀와 함께 그 풀꽃처럼 살고 싶었다. 앞서가던 대장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서야 소년도 풀꽃의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바로 눈앞에 탁 트인 영신봉의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들어왔다. 맑게 갠 하늘 아래, 남쪽 화개천으로 이어지는 대성골이 영신봉을 베개 삼아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북쪽 함양 마천 임천강으로 흘러드는 백무동계곡도 칠선봉에 기대어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긴 숨을 내쉬고 있었다.

풀꽃의 상념에서 깨어나자 그때까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다리가 풀어지며 소년은 그만 대성골계곡처럼 편안하게 드러눕고 싶었다. 무거운 배낭을 벗어놓고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소년은 백무동계곡을 바라보면서 지친 다리를 뻗고 앉아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 천왕봉 정상에서 바라본 반야봉과 노고단

대장이 조금만 더 가면 야영하기로 한 세석평전細石平田이 나온다며 힘을 내자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수통의 물로 입술을 축이자마자, 대장이 다시 길을 재촉했다. 대장 말대로 영신봉 동쪽을 돌아 한참 내려가니 넓게 펼쳐진 세석평전 고원이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 이름처럼 잔돌(細石)이 펼쳐진 우리나라 최고지대(最高地帶)의 산상평원, 철쭉 군락으로 유명하다는 세석평전에 철쭉꽃은 이미 져버리고 없었다. 대신 무성하게 자란 철쭉 잎 군락이 더 넓은 산상평원에 부는 바람에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해는 이미 한참이나 서쪽으로 기울어 소년 일행이 지나온 반야봉을 붉은 낙조로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 반야봉의 낙조를 밀어내기 전에 야영준비를 해야만 했다. 텐트를 치고, 코펠 바닥에 눌러 붙은 누룽지를 데워 마시고 있을 때, 반야봉 꼭대기에 걸려있던 해가 잠겨들었다.

대장은 이번 종주를 위해 지리산에 대해 미리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았다. 대장이 세석평전에 깃든 전설을 얘기했다.

지리산 산정山頂에 사는 여신女神 마야, 마야는 팔을 뻗으면 잡힐 듯 서쪽에 바라보이는 반야봉의 반야를 사랑했다. 어느 날 반야는 마고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다. 그러나 반야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움에 사무친 마야, 오직 사랑하는 낭군을 기다리는 초조함에 마야는 손톱으로 지리산 능선에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긴다. 이때 마야가 껍질을 벗겨 죽은 나무가 지리산 주능선의 고사목枯死木이고, 그 나무 올로 마야가 베를 짰던 자리가 세석평전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그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기에 오직 손톱으로 그 많은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겼을까.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그 나무껍질로 올올이 베를 짜 나갔을까. 진한 물감을 덧칠해 놓은 것 같은 반야봉의 검붉은 낙조는 세석평전의 마고반야전설처럼 진한 슬픔을 품은 듯 했다.

넓은 세석평전에 어둠이 소리 없이 밀려들고, 밤하늘에 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배낭에서 하모니카를 꺼내어 불면서 작은 수첩에 악보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등산로 옆 숲 속에 피어있던 하얀 풀꽃의 시상에 선율을 입혀가고 있었다.

이윽고 완성된 악보에 따라 하모니카 선율이 더 넓은 세석평전의 하늘로 울려 퍼졌다. 소녀가 수첩에 적힌 가사와 악보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 소년이 하모니카로 반주를 했다.

어둠이 짙어진 세석평전 넓은 고원에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별은 두 팔을 벌려 안으면 가슴 가득 안길 듯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졌다. 소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하얀 꽃잎이 별 속에서 수줍은 고개를 내밀고 살포시 웃음을 짓는 듯 했다.

소녀의 목소리가 무수한 음표의 별이 되어 밤하늘로 퍼졌다. 그 음표가 강물을 이루어 멀리 은하수로 흘러갔다. 별의 강물에 몸을 누인 소년은 평화로웠다. 아주 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 것일까. 대장이 모두를 깨웠다. 대장이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바로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잠을 잔 시간이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깊은 숙면을 취한 탓인지, 몸이 가뿐했다. 텐트 밖에 나오니 오싹 찬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지리산 산상고원의 밤은 여름에도 추웠다. 간밤보다 더 많은, 셀 수도 없는 무수한 별들이 성단을 이루어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별을 올려다보니, 몸도 따라 흐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머리가 빙글 돌면서 순식간에 땅과 하늘이 뒤바뀌어 별의 강물에 풍덩 빠져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텐트를 걷고 손전등을 든 대장이 앞장서 길을 찾아 나갔다. 별빛을 받으며 걷는 산길은 적막했다. 별은 무리를 지어 서쪽으로 흐르고, 네 사람은 별빛을 머리에 이고 천왕봉을 향해 조심스레 나아갔다.

얼마가지 않아 우뚝 선 촛대봉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봉우리 모습이 올망졸망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리는 촛대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촛대봉 정상을 향하는 비탈길을 오를 때는 차가운 밤인데도 이마에 땀이 흘렀다. 고개를 넘어서자 어둠 속에서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건너다 보였다.

촛대봉 비탈진 길을 조심스레 내려서니 평탄한 능선이 나왔다. 그 능선 길가로 갖가지 형태의 기암괴석 사이로 뼈만 앙상한 고사목이 별빛 속에 그림자처럼 무리지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연하봉烟霞峰이라고 했다. 기암괴석 절벽 사이에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무수히 피어난다고 했다.

능선을 지나는 구름이 고사목을 쓰다듬고 잠시 머물다가 바람 따라 홀연히 사라지는 이 봉우리에 앉아 있으면,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 든다고 하여 연하선경烟霞仙境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머무는 구름도, 선녀 같은 야생화도 볼 수 없었지만 별빛 속에 모습을 드러낸 연하봉의 정경은 신비로웠다.

연하봉을 지나 평탄한 풀밭 능선을 남쪽으로 밟고 나아가 일출봉日出峰에 올랐다. 태양은 아직 떠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왼쪽에 웅장한 천왕봉의 암영을 드리우고 떠오르는 일출이 경이로운 장관을 이룬다는 일출봉에도 무리를 이룬 별들이 모여 앉아 소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출봉을 내려와 장터목場基項에 도착하자 별빛은 점점 더 옅어지고 있었다. 장터목에서 몸에 젖은 별빛을 걷어내며 라면을 끊여먹고, 경사 급한 돌 비탈길을 조심조심 올라 제석봉에 닿았다. 희미한 여명 속에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고사목들이 암벽 기슭에 위태롭게 팔을 벌리고 늘어서 있는 모습은 처연했다.

▲ 지리산 주능선의 고사목

톱날능선이라 불리는 암벽 비탈길을 올라, 하늘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통천문通天門에 이르렀을 때 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부정한 사람이 어찌 성스러운 하늘로 통할 수 있으랴.

암벽 벼랑 사이로 나있는 통천문에는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서둘러야 했다. 어쩌면 이미 천왕봉 하늘에는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통천문을 지나 한동안 평탄한 길이 이어지더니 거대한 암벽 비탈이 앞을 가로막았다. 앞장선 대장이 천왕봉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이라고 했다. 거대한 암벽 비탈을 기어오르다시피 했다.

해가 솟기 전에 먼저 정상에 올라 경건하게 태양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조바심이 났다. 이마로 땀이 줄줄 흘렀다. 숨이 가빴다. 천왕봉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미 정상에 올라 팔을 벌리고 선 대장과 안경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망망한 구름바다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운해였다. 동녘 하늘가 구름 끝으로 붉은 기운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태양은 푸른 동해의 심연에서 솟아나고 있을 것이다. 구름바다에 잠긴 먼 수평선 너머에서 우렁찬 기지개를 켜며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망망한 구름바다에서 태양은 찬란한 무지개처럼 점점 더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솟아오르는 태양이 드디어 그 웅장한 자태를 활짝 드러내었다.

소년은 가슴을 크게 벌리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장엄한 태양이 구름을 뚫고 벌겋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가슴이 벅찼다. 소년의 가슴에도 붉은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태양을 마주보고 선 대장이 천천히, 두 팔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손을 머리 위로 뻗쳐 올려 모았다. 무간암에서 본 절을 하는 동작이었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절을 하는 대장의 모습은 태양만큼이나 장엄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 번 절을 한 대장이 두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리고, 무릎을 약간 구부린 채, 팔을 둥글게 앞으로 내밀어 이제 막 솟아나는 태양을 부둥켜안은 자세로 가만히 눈을 감고 섰다.
 

대장의 두 다리는 산 정상 바위에 박혀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대장은 떠오르는 태양을 끌어안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환한 빛이, 뜨거운 기운이 대장의 머리를 지나, 가슴으로, 아랫배 단전으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다.

소녀가 대장 옆에서 꿇어앉아 성호를 긋고 가슴 앞에 가만히 두 손을 모았다. 성당에서 보아온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평화롭고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소녀 옆에 서서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안경의 눈 속에서도 붉은 해가 타오르고 있었다. 안경의 눈빛도 경이롭게 빛났다.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와 솟아오르는 태양, 그 속에 몰입되어 자신을 잊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은 태양만큼이나 경건하고 성스럽게 빛났다.

소년은 대장을 보았다. 대장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대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환희의 눈물 같기도 하고, 해원解寃의 눈물 같기도 했다.

소녀는 여전히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우고 있었다. 소녀도 기도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 기도는 누구를 위한 기도며, 눈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창조주인 하느님이 만든 자연의 장엄함에 저절로 흐르는 환희의 눈물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장이 행여 깨어지기라도 할까봐 끌어안은 태양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가슴 앞에 합장하고서 허리를 경건하게 굽혀 태양을 바라보고 반절을 하였다. 소녀도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을 살며시 내리고 성호를 그었다.

대장이 배낭에서 접혀진 한지봉투 하나를 꺼내어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봉투를 열고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것은 무간암에서 대장이 무간 스님에게 보였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겼다는 시詩였다. 「새로운 生命을 위한 序詩」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새로운 生命생명을 위한 序詩서시

白頭大幹백두대간의 南남쪽 끝
天王峰천왕봉에 올라
푸른 東海동해의 深淵심연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太陽태양의 환한 빛을 가슴에 안으며
너 새로운 生命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雲海운해속에 잠긴 먼 水平線수평선 너머에는
너의 無限무한한 可能性가능성이 펼치고
大幹대간의 稜線능선을 따라 걷노라면
어느 듯 蓋馬개마의 高原고원
동강나 쓰라린 이 땅의 설움일랑
차디찬 이 高原고원의 頂上정상에
따뜻하게 묻어두자

또 하나 큰 걸음 옮기면
白頭백두, 白頭백두
아! 白頭山백두산
그 속엔 이 땅의 탯줄이 출렁거린다
그 속엔 民族민족의 魂혼이 살아 숨 쉰다
그 속엔 檀君단군의 얼이 빛나고 있다

오늘 내가 선 곳은
白頭大幹백두대간의 南남쪽 끝
天王峰천왕봉
내일 네가 서야 할 곳은
北북쪽 頂上정상
白頭백두, 白頭山백두산
그 頂上정상의 天池천지에 가슴을 적시고
네 앞에 펼쳐진 滿州만주의 地平線지평선을 바라보라

네 가슴 속 浩然호연한 精氣정기는
廣闊광활한 滿州만주벌판을 달리고
粲然찬연하게 피어날 半萬年반만년 겨레의
새로운 歷史역사가
그 위에 펼쳐질 것이니

檀君紀元단군기원 42××年년 正月정월 初초하루,
智異山지리산 天王峰천왕봉에서 아버지가 짓다.

시詩를 읽어 가는 소년의 가슴에 또 하나의 태양이 떠올랐다. 시에는 또 하나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동해의 심연에서 솟아난 웅장한 태양은 광활한 만주벌판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비로소 알았다. 대장이 지리산 종주를 하자고 한 이유는 아버지의 정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남긴 시 속에서 솟아나는, 아버지의 가슴 속 태양을 찾고자 함이었다. 푸른 동해의 심연을 뚫고 구름을 헤치며 솟아나는 찬란한 천왕봉 일출은 대장 아버지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었다. 대장은 아버지의 유산을 찾아 지리산 천왕봉을 찾은 것이다.

소년은 알 것 같았다. 대장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이제까지 대장 아버지가 물려주고자 했던 유산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형체를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그리고자 하면 그려지지 않는 모호한 것이었다.

대장은 마음속에 그릴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려지지 않는,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실체를 찾기 위해 무간 스님을 찾았고, 천왕봉에 올랐던 것이다.

천왕봉에 올라 바라본, 구름바다를 헤치며 솟아오르는 태양은 아버지가 보았던, 아버지의 몸을 적시던, 아버지의 가슴속에 안겼던 바로 그 태양이었다. 대장은 온 몸을 적시는 장엄한 천왕봉 일출에서 아버지가 남기고자 했던 그 보이지 않는 유산의 실체를 비로소 찾은 것이다.

천왕봉 일출을 통하여 그 뚜렷한 실체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표식으로 대장의 가슴속에 깊게 각인된 것이다. 대장의 뺨을 적신 눈물은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실체를 가슴속에 그릴 수 있게 된 기쁨에서 비롯된 환희의 눈물이었다. 대장은 이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미소는 경건하고 평화로웠다.

대장을 바라보는 소녀도 일어나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경의 눈빛도 경이로웠다. 소녀가 두 팔을 벌려 대장과 소년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대장이 안경의 손을 잡고, 안경이 소년의 나머지 한 손을 잡았다. 네 사람은 하나의 원이 되었다. 태양이 되었다.

― 야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 사람은 서로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 소리는 길고 깊었다. 네 사람이 함께 내지르는 환호성이 망망한 구름바다 위로 울려 퍼졌다. 태양은 이미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 위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 연재 제32회 <겨울 환상곡 1>은 2019. 5. 27.(월) 에 게재됩니다.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31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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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와의 짧은 소통

작가가 처음으로 지리산 종주를 한 것은 1980년대 초 대학을 다닐 때였다.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 1, 2> 단락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나이또래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작가는 아마 예닐곱 번쯤은 더 지리산 종주를 한 것 같다. 그 중 한번은 맨발종주였고, 한번은 장마철에 혼자 종주산행을 하다 비와 안개에 갇혀 결국 등산로를 벗어나 길을 잃고 죽을 고생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 단락은 작가의 이러한 지리산 종주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지난 주 다시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작가로서 작중인물들과 함께 호흡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이 소설을 읽어주는 독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은 천왕봉은 여전히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어머니 마고 여신의 깊은 숨결을 간직하고 지금도 아물지 않은 이 땅의 비극을 치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