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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교향곡, 연재 제30회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 1>
김영미안  |  anteaj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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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3  06: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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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교향곡, 연재 제30회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 1>
Symphony in C minor ‘Fate’

   
 

제3악장
Allegro C단조 2/4 박자

   
▲ 노고단 돌탑

순간적으로 등줄기를 짓누르는 무거운 절망감에
털썩 쓰러질 것 같은 다리를 가까스로 지탱했다.
그가 무너지면, 일행도 도미노처럼 쓰러질 것이기에
그는 안간힘을 다하여 버텼다.
일행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눈에 어리던 하나가 대열에서 낙오되고 없었다.

그는 초원 위를 뒤돌아보았다.
아직 두 번째 우기雨期도 맞지 못한 어린아이였다.
야위어 가느다란 다리를 절룩거리며
필사적인 몸짓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탄저병!
몹쓸 죽음의 병!
그는 알고 있었다.
탄저병에 걸린 얼룩말은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감추고자,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매서운 눈초리,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카로운 부리를 아래로 향하고
낮은 하늘가를 맴돌고 있었다.

탄저병에 걸린 저 어린아이는
곧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저 불온한 검은 새는 수직 낙하하여
제일 먼저 저 아이의 눈부터 쪼기 시작하리라.
잔인한 하늘청소부!
그는 눈에 힘을 주고 검은 새를 노려보았다.

저 아이는 결국 쓰러지고 말 것이다.
어차피 일행에 합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
메마른 늪가 먼지그늘에 서서

아이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다.
아이가 다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틀비틀 채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눈부신 태양 속으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자리에서 붉은 먼지가 뭉실 피어올랐다.

이제 저 아이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
숨조차 죽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기도했다.
아이가 무릎이라도 한번 세워 주기를
제발 고개라도 한번 들어
마지막 그 여린 눈빛만이라도
서로 마주칠 수 있기를.


   
▲ 하동과 구례 사이 섬진강 전경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 1


오후 두시, 속개된 공판

곽 판사 : 변호인은 계속하여 신문해 주십시오.

박기영(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피고인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한 무간 스님과 피고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지요?
답 :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문 : 그러나 두 사람은 빨치산을 탈출하여 전향하였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러한 사실을 누구로부터 들었나요?
답 : 무간 스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문 : 무간 스님과 피고인의 아버지가 전향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답 : 두 분이 젊음을 바쳐 신봉하였던 공산주의가 인간이 배제된 이념을 위한 이념,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문 : (이때 변호인이 피고인의 국보법위반 사건에 증거로 제출된 시 「새로운 통일을 위한 서시」를 제시하며) 이 시는 피고인의 아버지가 피고인에게 유품으로 남긴 것인가요?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시의 제목은 ‘새로운 통일을 위한 서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입니다.

― 잠깐, 피고인에게 한 가지 질문만 하겠습니다.
끼어드는 꽹과리 소리.

― 지금은 변호인의 반대신문을 위한 시간입니다.
꽹과리 소리를 중단시키는 징소리.

곽 판사 : 검사의 질문이 길지 않다면 허락하겠습니다.

김용훈 검사(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지금 피고인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시의 제목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당시 공안검사였던 김인환이 피고인을 국보법위반으로 기소하기 위하여 시의 제목을 바꾸어 증거를 조작하였다는 것인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렇다면 피고인은 증거를 조작한 김인환 검사에게 보복할 마음이 들었겠군요?

박기영 : 지금은 변호인의 반대신문을 위해 주어진 시간입니다. 검사의 신문을 중지시켜 주십시오. 피고인은 지금 검사의 신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답 : 아니, 대답하겠습니다. 물론 그와 같이 증거를 조작한 검사에게 분노를 느꼈습니다. 보복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었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김인환을 살해하였나요?

박기영 : 잠깐만! 피고인 김준하.

급하게 징소리 울린다.

기영은 눈에 힘을 주고 준하를 보았다. 왜 이러나? 용훈이 기습적인 유도신문으로 자백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검사의 숨은 의도를 정말 모른다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기영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준하는 오히려 살인의 동기를 부여하고자 하는 용훈의 신문에 순순히 응하고 있다. 그것도 오히려 자백에 가까운 진술을 하고 있다. 이것이 준하가 추고자 하는 춤인가. 그렇다면 굿판은 그의 생명을 위한 진혼제가 될 것이다. 기영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여름 방학이 되었다. 안경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삼총사가 오랜만에 만났다.

지리산 종주를 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대장이었다. 소녀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산속 텐트에서 며칠 밤을 자야하는 힘든 산행이라고 만류했지만, 소녀는 한사코 따라나섰다. 삼총사만이 모여 3박4일 일정으로 다녀올 작정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소녀의 동행으로 산행 일정을 4박5일로 넉넉하게 잡았다.

사상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완행버스를 탔다. 진주를 지나고 하동에 이르러 버스는 섬진강변을 따라 달렸다.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섬진강 하구의 폭은 넓고 푸른 물로 포만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버스가 하동을 지나 구례 쪽으로 나아갈수록 강폭은 점점 좁아져 강물은 은빛 자갈모래톱 사이를 개울처럼 굽이치며 흘렀다.

차창 밖 멀리 보이는 강 모래톱에서 첨벙첨벙 물놀이를 하는 새까맣게 그을린 개미 같은 아이들의 등짝에서 한여름 햇볕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어릴 적 소년의 모습이었고, 대장의 모습이기도 했다.

   
▲ 화엄사 전경

구례에서 내려 먼저 화엄사華嚴寺를 찾았다. 대장이 화엄사 뒤편 산을 가리키며 그 산 정상이 지리산의 삼대 주봉 중의 하나인 노고단老姑檀이라고 했다. 그러나 산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늠할 수조차 없는 짙은 숲이 깊은 숨결로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화엄사 경내로 들어섰다. 화엄사는 노고단을 등에 업고 하동과 구례를 잇는 섬진강 들판을 껴안고 있었다.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사찰로 화엄교리를 전파하는 신라사찰 1호라고 안내게시판에 적혀 있었다.

소년이 화엄사와 같은 웅장한 규모의 사찰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국보급의 예술품으로 평가받는다는 각황전, 그 앞의 석등과 사사자삼층석탑, 소년의 눈에 비친 사사자삼층석탑의 형상은 아름답다기보다는 기묘했다. 3층 석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네 마리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승상僧像은 괴기했다. 각황전과 대웅전의 불긋불긋한 단청과 탱화는 오히려 두렵기까지 했다.

화엄사 경내를 둘러보고 나오자, 대장이 배낭에서 낡은 등산지도를 꺼내 산행 일정을 설명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올라 반야봉을 거쳐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天王峰 일출을 보고 산청 대원사로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그 산행코스가 지리산의 중요한 봉우리와 능선을 빠뜨리지 않고 답사할 수 있는 가장 널리 알려진 종주코스라고 했다.

화엄사 뒤편으로 나있는 숲 속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낮 동안 폭염을 뿜어대던 태양은 이제 서쪽으로 기울어 섬진강의 푸른 물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화엄사 뒤편 계곡 물가에 텐트를 치고 설익은 밥을 된장국에 말아 먹었다.

이내 어둠이 몰려왔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더불어 밤벌레 울음소리가 적막했다. 반딧불 하나가 파란 빛을 내며 어두운 숲 속 나무사이를 날았다. 부~엉, 부~엉, 가끔 부엉이도 구슬프게 울었다. 소녀는 이미 텐트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소년 또한 아련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계곡 숲에서 맞는 새벽은 신선했다. 흐르는 물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새들의 요란한 지저귐이 한데 어울려 잠든 숲을 깨웠다. 울창한 숲 사이로 햇살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계곡물로 세수를 한 소녀의 물기어린 얼굴이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받아 맑고 매끄럽게 빛났다. 대장이 피워놓은 석유버너 위, 코펠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밥 익는 냄새가 먼저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아침을 먹고, 화엄사 계곡을 벗어나 노고단을 향해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막길로 접어들자 이마에서 금세 땀방울이 비처럼 흘렀다. 숨도 가빴다. 그러나 소년보다 더 무거운 배낭을 멘 대장은 전혀 힘든 표정이 없이 묵묵히 앞장서 산을 올랐다.

중재라고 불리는 곳을 지나면서부터 투박한 돌길이 나오더니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더욱 가팔랐다. 소년은 오직 대장의 엉덩이만 따라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등산로 오른편에 작은 폭포 하나가 나타났다. 접선대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폭포 아래 계곡물로 땀을 씻고 잠시 숨을 고른 대장이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심한 돌밭 너덜지대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코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 이름처럼 경사가 급해 앞장선 대장의 엉덩이가 소년의 코에 걸릴 지경이었다. 여기에서는 대장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눈썹바위라고 불리는 평평한 바위에 도착했을 때, 소년은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이 갈아입을 옷가지만 넣은 가벼운 배낭 때문이었는지, 삼총사의 우려와는 달리 가벼운 걸음으로 잘 따라오고 있었다. 오히려 힘들어하는 소년의 등을 밀어주며 기운을 북돋아 주곤 했다. 안경 또한 작은 체구로 다람쥐처럼 산을 올랐다.

드디어 눈앞에 노고단의 장대한 산상고원이 펼쳐졌다. 원추리 군락이 노고단의 장대한 고원을 바위를 감싼 이끼처럼 두르고 있었다. 노고운해老姑雲海라는 지리산의 비경은 펼쳐져 있지 않았다. 하늘은 맑았다. 구름은 없었다. 대신 비늘처럼 늘어선 지리산 자락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 노고단 표지석

대장이 아득히 가물거리는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그쯤이 천왕봉이라고 했다. 까마득했다. 저기까지 어떻게 가나. 소년은 맥이 탁 풀렸다. 소년에게는 노고운해라는 지리산의 비경도, 비늘처럼 늘어서 반짝이는 산자락의 절묘한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고단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 지리산의 산신 선도성모仙桃聖母 마고麻故 할멈도 소년에게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은 다만, 앞으로 며칠 동안이나 쉬지 않고 산을 타야한다는 고된 일정에 가슴이 막막해질 뿐이었다.

화엄사에서 이른 새벽에 산행을 시작한 탓에 노고단에 올라서도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대장이 길을 재촉했다. 노고단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능선 길은 소년에게도 그리 힘든 길은 아니었다. 그때서야 소년도 산의 빼어난 경관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남쪽 왕시루봉 능선과 피아골, 북쪽 만복대 능선과 심원골이 경이롭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노고단까지 오르면서 너무 많은 땀을 흘린 탓일까. 해발 1,400m가 넘는 고산지대라 기온이 낮은 탓일까.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야영하기로 예정한 임걸령林傑嶺을 향해 능선을 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임걸령은 원래 ‘몰두덩이’이라고 불린 신라 화랑들의 연마도장이었는데, 조선 명종 때의 초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초적질을 한데서, 그의 이름을 따서 임걸령(林傑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몇 차례 능선을 오르내리자 돼지평전이라는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돼지평전이라는 이름은 마늘 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파먹은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대장이 말했다. 이곳을 지나는데,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주위 산봉우리를 타고 검은 구름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금세 굵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푸른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섬광은 마치 날카로운 창날을 휘두르는 것같이 곧바로 아래로 내리꽂혔다. 바로 지척이어서 너무도 선명했다. 곧이어 고막을 찢는 것 같은 천둥소리가 온 산을 흔들었다.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소년도 덜컥 겁이 났다. 벼락이 머리 위에서 곧 내리칠 것 같았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네 사람 모두 순식간에 흠뻑 젖고 말았다. 소녀가 입고 있는 짧은 반소매 티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속에 입은 하얀 브래지어 윤곽과 봉긋하게 솟아오른 유방 아래로 상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머리에서부터 물기를 줄줄 흘리는 소녀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갔다.

겁에 질린 소년과는 달리 대장은 침착했다. 대장이 배낭에서 비옷 대용으로 미리 준비한 사각형 비닐과 운동복 상의를 꺼내어 소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그 빗속에서도 안경은 노래를 불렀다. 원래 낙천적인 성격인 안경은 세찬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불렀다. 이따금씩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천둥소리도 전연 두렵지 않는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서 다시 한 번 푸른 섬광이 하늘을 가르고 동시에 능선을 쪼개어버릴 듯 천둥이 지축을 흔들었다. 고막을 찢는 것 같은 우렛소리에 소녀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대장이 침착하게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일으켜 빗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얼마를 더 나아갔을까. 야영지로 예정한 ‘임걸령’이라고 쓰인 나무표지판이 보였다. 그 표지판 아래 덧붙인 작은 판자에 ‘샘터’라고 쓴 조그만 글자와 방향을 표시하는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섬광과 천둥은 멎었지만,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렸다. 소녀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떨었다.

대장이 등산로를 벗어나 평평한 평지를 찾아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그나마 바람이 세차게 불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텐트를 쳐 본 경험이 없는 소년과 안경이 서툰 손놀림으로 대장을 거들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장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금방 텐트를 쳤다.

소녀가 먼저 텐트 안으로 들어가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다음에 남자 셋이 한꺼번에 들어와 웃을 갈아입었다. 안경이 대장의 배꼽을 손가락으로 쿡쿡 장난삼아 찌르며 키득거렸다. 셋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소녀는 뒤돌아 앉아 있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었지만, 소년은 몸이 자꾸만 떨려왔다. 대장이 소녀의 몸을 감쌌던 비닐을 덮어쓰고 나가 샘터에서 물을 받아 왔다. 텐트 안에서 버너를 피우고 라면을 끊였다. 따뜻한 라면국물이 그나마 몸을 데워 주었지만, 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비상용으로 가져갔던 아스피린 두 알을 먹고 텐트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 노고단에서 바라본 섬진강

대장이 임걸령 바로 아래에 있다는 ‘황호랑이 막터’에 대한 유래를 얘기했다.

― 화엄사 어귀 황전리라는 마을에 황씨 성을 가진 총각이 살고 있었어. 황 총각은 겨울에는 나무주걱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황 총각이 기르던 암캐를 데리고 반야봉까지 올라가 나무주걱을 만들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고 날이 저물고 말았다. 황 총각은 임걸령 샘터 밑 바위 아래 산막을 치고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을 새는데, 마침 데리고 갔던 암캐가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다.

그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위기에 처한 황 총각은 기지를 발휘했다. 황 총각은 마침 암캐가 낳은 강아지 한 마리를 호랑이에게 던져주었다. 호랑이가 강아지를 날름 받아먹었다.

그렇게 한 마리씩 차례차례 강아지 일곱 마리를 호랑이 먹이로 던져주고는 마지막에는 모닥불에 벌겋게 달궈진 돌덩이를 주걱에 담아 던져주자 이것도 강아지인줄로 안 호랑이가 돌덩이를 덥석 받아 삼키고는 죽고 말았다. 그 뒤로 황 총각이 아무런 무기도 없이 기지로 호랑이를 잡은 이 산막 터를 ‘황호랑이 막터’로 부른다고 했다.

― 에이, 바보호랑이구나. 그런 어리석은 호랑이라면 나도 맨손으로 잡겠다.
안경이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 어흥, 호랑이가 나타났다.
대장이 갑자기 호랑이 흉내를 내며 장난을 쳤다.
― 죽은 호랑이보다 강아지가 너무 불쌍해.
소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텐트를 두드렸다. 온몸이 떨리고 쑤셔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주고받는 장난과 대화가 꿈결처럼 아련하게 들렸다. 소년은 저절로 솟아나는 신음소리를 억지로 참았다. 열에 들뜬 몸을 웅크린 채 소년은 아련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연재 제30회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서시 2>는 2019. 5. 20.(월) 에 게재됩니다.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29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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