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28회 <무간 스님 1>
Symphony in C minor ‘Fate’

무간 스님 1

곽 판사: 검사는 피고인 김준하에 대한 신문을 계속해 주십시오.

자지러지는 꽹과리 소리.

김용훈 검사(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피고인은 19××.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및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하 통칭하여 ‘국보법위반 사건’이라 한다)으로 기소된 적이 있지요?
답 : 예.
문 : 그때 국보법위반 사건으로 피고인은 징역 3년의 처벌을 받은 일이 있지요?
답 : 처벌받은 일이 없습니다. 다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3년 동안 교도소에 갇혀있다 나온 사실은 있습니다.

문 : 피고인의 지금 진술은 국보법위반 사건에서도 피고인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말인가요?
답 : 그렇게 판단하셔도 좋습니다.
문 : 국보법위반 사건과 관련하여 피고인은 당시 학생시위를 주동한 사실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답 : 주동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주동자라고 했습니다.

문 : 피고인이 말하는 ‘그들’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답 : 그때 나를 취조한 검사와 수사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 : (이때 19××. 국보법위반 사건 수사기록 중 공소장 부분을 제시하고) 이 공소장에 적시된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보면, 당시 피고인은 북한에서 남파된 김형태라는 사람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남한의 사회불안을 조성할 목적으로 학생시위를 주도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답 : 그 기록에 나와 있는 김형태라는 사람은 지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때 수사검사가 고안한 가공인물입니다.
문 : 그렇다면 이 공소장에 기재된 범죄 사실은 모두 조작된 것이란 말인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당시 피고인은 그러한 사실을 주장하지 않았나요?
답 : 물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항변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에게 거짓자백을 받아내기 위하여 고문을 했습니다.
문 : 어떤 고문을 하였나요?
답 : 그것은 그때 그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문 : 피고인, 당시에 있었던 상황을 피고인으로부터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시 검사나 수사관들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하여 피고인에게 어떤 고문을 가했나요?

이때 기영 일어선다.
― 이의 있습니다.

울리는 징소리.

박기영 : 지금 검사의 질문은 이 사건과 관계없습니다. 지금 검사는 피고인이 생각조차하기 싫은 끔찍한 고문의 기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때 피고인이 당했던 고문은 지금도 피고인에게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신문은 피고인에 대한 또 다른 정신적 학대입니다.

김용훈 :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신문은 김인환을 살해한 피고인의 범행 동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박기영 :‘김인환을 살해한 피고인’이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본 변호인은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공소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김인환을 살해하였다는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검사는 계속하여 ‘김인환을 살해한 피고인’이라고 하여 피고인을 살인자로 예단하게끔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 법정에서도 무죄추정의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곽 판사 : 변호인, 검사 모두 진정하십시오. 먼저 검사에게 요청합니다. 변호인의 말처럼 이 법정에서도 피고인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은 적용됩니다. 공소사실을 단정하는 신문은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검사의 말처럼 지금 신문은 피고인의 범행 동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검사는 신문을 계속하여 주십시오.
 

문 : 다시 묻겠습니다. 피고인은 당시 국보법위반 사건에서 고문을 당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 예.
문 : 어떤 고문을 당했나요?
답 : 그들은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인권마저 유린해 버렸습니다.

문 :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십시오.
답 : 그들은 밀폐된 지하실 방에서 제 옷을 모두 벗기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잠을 못 자게 했습니다. 매달린 채 잠깐이라도 잠들면 주전자로 코에 물을 부어 깨어나게 했습니다. 화장실 변기통 물에 얼굴을 처박아 까무러지기까지 물고문을 한 적도 있습니다.

문 : 다른 고문은 없었나요?
답 : 제 몸을 새우처럼 구부려 스펀지로 둘둘 말아 플라스틱 원형드럼통 속에 집어넣고 마치 축구공처럼 차고 굴렸습니다. 계속하여 빙글빙글 돈 나머지 너무 어지러워 토하고 배설을 하면 그 배설물을 먹게 했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그런 고문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했나요?
답 : 아닙니다. 나는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문 : 거짓자백을 받아내기 위하여 또 다른 고문을 했다는 말인가요?
답 : 그렇습니다. 그런 고문에도 내가 굴복하지 않자 그들은 고문기술자까지 동원했습니다.
문 : 뭐라고요? 고문기술자라고요?

답 : 예, 그 사람은 특별한 훈련을 받은 고문기술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벌거벗은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내 배를 스펀지 방망이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때리는 방법이 특별했습니다. 그 고문기술자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이었습니다.

문 : 독특한 방법이라고요? 어떻게 때렸나요?
답 : 예, 세게 때리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툭툭 치는 것 같았는데, 그 충격은 장 내부에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그렇게 때리면 부드러운 스펀지 때문에 멍 자국 같은 외상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뱃속 장기에만 내부충격이 가서 결국에는 장세포가 파열되어 죽게 된다고 했습니다.

문 : 그런 특별한 고문의 효과는 정말 그랬나요? 정말 뱃속 장기만 아팠습니까?
답 : 예. 그 사람이 때리자 정말 뱃속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못 이겨 수없이 기절하고 깨어나고를 반복했습니다. 그 고문은 단순하게 매를 맞는 것에 비할 수 없는 극도의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문 : 그렇다면 피고인은 최소한의 인권마저 유린해버린 그런 지독한 고문을 가한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었겠군요?
답 : 그렇습니다. 당연히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문 : 피고인, 없는 범죄사실을 만들어 내고, 그 사실에 대한 거짓자백을 받아내기 위하여 그런 지독한 고문을 하라고 지시한 사람이 바로 이번에 살해된 김인환이었고, 피고인은 이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답 : 예, 그렇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그 복수로 김인환을 살해하였나요?
답 : 그 부분에 대하여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상입니다.

꽹과리 소리가 멈췄다. 이젠 징을 울릴 차례다. 아픈 가슴으로, 분노의 가슴으로, 징을 울려야 한다. 그러나 사랑을 잃지 말자. 분노의 가슴에 사랑을 담아내자.

박기영(피고인 김준하에게)

문 : 피고인의 직업은 학교법인 홍익재단에서 설립 운영하는 홍익문화연구소의 소장이지요?
답 : 그렇습니다.
문 : 홍익문화연구소는 어떤 곳인가요?
답 :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인 홍익인간의 양성을 통하여 우리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올바르게 복원시키고자 하는 취지로 설립된 학술단체입니다.

문 : 피고인이 말하는 홍익인간의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답 : 널리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를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무간 스님께서 처음 주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저의 정신적 스승이신 고 홍한일 박사님의 신실증주의新實證主義 사학이론史學理論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때 용훈 일어선다.
― 이의 있습니다.

징소리에 끼어드는 꽹과리 소리.

김용훈 : 지금 변호인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사실에 대한 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법정이지 학술단체의 세미나 장소가 아닙니다.

박기영 : 그렇지 않습니다. 피고인이 당한 과거 고문 사실을 살인 동기로 삼으려는 검사의 신문에 대응하여, 피고인에게 살인동기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신문입니다.

시계를 보는 곽 판사.

곽 판사 :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길어질 것 같으니 오전 공판을 여기에서 마치고, 오후 2시에 공판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부가 퇴정했다. 기영은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소녀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그 소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

겨울 방학이 되었다. 소년은 헌신문지로 벽지를 바른 고향집 외양간 황토벽 골방에 갇혀 있었다. 마당 오른쪽에 소외양간을 겸하여 별채로 지어진 움막 같은 초가집 골방이었다. 습기가 많은 날은 외양간 거름냄새가 풍기는 그 작은 골방에서 소년은 두터운 민법 교과서에 코를 박고 있었다.

겨울 방학이 되면서 새로 산 두터운 민법 교과서 제본에서 나는 고무본드 냄새는 황토벽 흙냄새에 묻혀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사립문 옆 왼쪽 마당가에 돌담을 등지고 서있는 늙은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남겨진 반시 홍시 몇 개가 겨울 내내 떨어지지 않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겨울새들이 거의 다 파먹고 이제는 꼭지부분에 메마른 빨간 껍질이 조금 붙어있었다.

겨울은 그 가지 끝에 매달려있는 홍시꼭지만큼이나 끈질겼다. 겨울이 깊어 갈수록 소년의 마음도 집 앞 개울에 언 두꺼운 얼음만큼이나 단단하게 얼어갔다. 소년은 뇌를 마비시킬 것 같은 깊은 고립감과 상실감을 메우기 위해 오직 책에 파묻혔다. 책을 안고 잠들고 책 속에서 깨어났다.

점심을 먹을 시간, 소년은 책을 덮고 잠시 방에서 나왔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매달려 있었는데, 지난 밤 겨울바람에 결국 떨어져버렸는지 가지 끝에 매달려있던 홍시꼭지는 보이지 않았다. 돌담 옆 늙은 감나무는 지치고 야윈 앙상한 가지만을 파란 겨울하늘 아래 드리우고 있었다.

소년은 마당으로 나와 웅크려 있던 어깨를 펴고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닫혀 있던 폐 속으로 깊숙하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날씨는 아직 차가웠다. 그러나 겨울은 이제 봄기운에 밀려 게으른 걸음으로 느릿느릿 물러나고 있었다. 마당에 서서 가볍게 맨손체조를 하고 어깨를 추스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집에 있었구나.
― 오빠.

뒤를 돌아본 순간, 소년은 깜짝 놀랐다. 의외로 대장과 소녀가 사립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로 대장 어머니도 있었다. 소녀까지 함께 오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엷은 겨울햇살에 비친 소녀의 맑고 하얀 얼굴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대장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 오빠, 우리 모두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되었어.
소녀가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 정말? 둘 다 합격했구나!

소녀가 소년이 다니는 B대학 국문학과에 응시하였고, 대장 또한 같은 대학의 정치외교학과에 응시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토벽 골방에 갇혀 있는 동안 두 사람의 합격자 발표 날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소녀와 대장에게 미안했다. 겨울 내내 지독한 고립감과 상실감에 외로워하면서도, 정작 소년 자신이 해야 할 두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 정말 미안해. 함께 발표장에 가서 축하해 줘야 했는데.
― 괜찮아. 넌 공부해야 하잖아.
대장이 소년의 어깨를 툭 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때 마침 부엌에서 점심상을 차려 들고 나오던 어머니도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팽개치듯 상을 마루 위에 놓고 뛰어나와 대장 어머니를 얼싸안다시피 손을 부여잡고 재회의 정을 나누었다. 노루사냥이 있었던 그해 겨울, 마을을 떠난 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이에 훌쩍 자라난 대장의 등을 연신 토닥이며 어머니가 대견해했다.

어머니의 손길이 더욱 바빠져 점심상이 새로 차려지고 모두가 안방에 모여 앉은뱅이 상을 가운데에 두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대장 어머니가 대장이 대학에 합격하여 오랜만에 아버지의 묘소에 성묘를 하러 왔다고 했다. 소녀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졸라 함께 왔다고 했다.

*

대장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마을 뒷산 계곡 건너편 응달진 곳에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었다. 산비탈 아래 계곡에는 눈 녹은 물이 겨우내 얼어붙은 응달진 바위틈 고드름을 녹이고 있었다.

고갯마루로 향하는 산길 숲속 굴참나무 등 낙엽송에는 아직 새움이 돋지 않았다. 그러나 계곡 남향 바위틈에는 이미 봄 냄새를 맡은 버들강아지가 보슬보슬 털 달린 꼬리를 키워가고 있었다. 산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에서 먼저 봄기운이 스며들었다.

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높이 20미터 정도의 폭포가 나오고, 그 폭포가 있는 산중턱 지점에서 계곡은 좌우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이 두 계곡 사이 펑퍼짐한 구릉지에 작은 암자 하나가 서 있었다. 무간암無間庵이라고 이름 붙여진 암자였다.

성묘를 마치고 함께 따라온 소년 어머니와 함께 대장 어머니는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 그동안 밀린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장과 소년, 소녀 세 사람은 무간암에 가기 위해 계곡 옆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대장이 그곳의 주지 스님인 무간 스님을 꼭 뵈어야 한다면서 절구경도 할 겸 함께 가자고 했다. 그 절 요사에서 하룻밤 자고 올 거라고 했다. 소년의 집에서 손님 세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잠잘 방도 마땅찮았다.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암자가 있었던 자리에 애초에는 제법 규모가 큰 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잔당들이 이 절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절은 모두 불타버렸다고 했다. 그 후 그곳에는 굴참나무 등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 그곳이 절터였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30여 년 전, 어느 날부터인가 이 절터 위에 먼저 작은 움막집 하나가 세워졌고, 그 움막에 스님 한 분과 도복처럼 보이는 한복을 입은 한 남자가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스님이 산을 내려와 마을을 거쳐 어디론가 떠나갔다가 바랑을 메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일 외에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산 속 움막에서 거주한 지 삼 년쯤 지났을 때, 그들이 거주하던 움막은 어느 새 절의 형태를 갖춘 작은 암자가 되어 있었다. 스님과 남자가 직접 터를 고르고 근처 나무를 베어다 날라 기둥을 세우고 돌과 흙벽을 쌓아 대웅전 법당과 법당 뒤 작은 산신각까지 갖춘 어엿한 절집을 지었던 것이다.

암자로 올라가는 산길 계곡 초입에 ‘無間庵무간암’이라는 절 이름이 어른 키높이 만한 나무송판에 양각으로 새겨져 서 있었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 암자를 ‘무간암’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이 절에 가면, 스님이 몸소 나와 자기를 ‘無間무간’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스님을 ‘무간 스님’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다.

절이 세워진 후, 소년 어머니는 매달 한 번쯤은 기도를 하러 이 암자를 찾았다. 소년도 어릴 적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가끔씩 이 암자에 와 본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대장 아버지도 절에 있었다. 무간 스님과 함께 불타버린 절터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새 암자를 지었던 한복을 입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대장 아버지였다.

세 사람이 암자에 들렀을 때, 어릴 적부터 소년도 안면이 있는 보살 할머니가 나와 그들을 맞았다. 대장이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소년보다도 대장을 훨씬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마치 제 손자가 온 것처럼 반가워하며 훤칠하게 자라난 대장의 등과 어깨를 연신 쓰다듬었다.

무간 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일주일 전에 나가 어쩌면 오늘 저녁에 돌아오실지 모르겠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새소리와 암자를 둘러싸듯 흐르는 물소리만이 고즈넉했다. 대웅전 법당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나무 기둥은 비바람을 맞아 자주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법당 오른쪽 무간 스님의 거처 아래쪽에 예전에 없었던 요사 한 채가 별도로 세워져 있었다.

소년은 대장이 무간암을 찾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대장과 어머니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도 성묘를 다녀가는 모습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동안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고향에 와서 새삼스레 무간암을 찾다니…….

산 속에서의 겨울 해는 노을도 없이 바로 어둠을 몰고 왔다. 보살 할머니가 차려주는 이른 저녁 공양을 하고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무간 스님은 오지 않았다. 소년과 대장이 요사 아궁이에 참나무 장작을 넣고 군불을 지폈다. 참나무 장작개비 아래에서 탁탁 튀며 타오르는 청솔가지 불쏘시개에서 나는 연기가 메워 눈물이 났지만, 그 연기냄새에는 어릴 적 아련한 향수가 배어있었다.

새소리도 잦아들고 암자를 스치면서 지나가는 겨울바람에 법당 처마 끝 풍경이 울었다. 그사이 어느 새 보살 할머니와 친해진 소녀를 방에 남겨두고, 대장이 소년을 법당으로 이끌었다. 법당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운 대장이 법당 마루에 방석을 가져다 깔고 그 위에 서서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소년은 어릴 적에 어머니가 법당에서 불상 앞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만, 법당의 풍경은 여전히 낯설었다. 그것은 소녀를 따라 성당에 처음 갔을 때보다 더 낯설었다. 그러나 대장은 법당과 절이 아주 익숙한 듯 보였다.

불상을 향해 허리를 숙여 반절 경배를 마친 대장은 다시 똑바로 서서 천천히 두 팔을 좌우로 벌려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손을 머리 위로 뻗쳐 올려 마주쳤다. 이어 손을 모은 채로 다시 가슴 앞으로 내려 허리를 직각으로 꺾은 후 무릎을 꿇고는 합장한 두 손바닥을 바닥에 내려놓음과 동시에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그렇게 엎드린 자세에서 바닥에 짚은 손바닥을 위로 뒤집었다가 다시 손을 모아 무릎을 펴면서 일어섰다. 일어선 대장의 손은 처음 절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 앞에 합장한 자세였다. 팔을 머리위로 뻗쳐 올려 모으고 내려 바닥에 엎드렸다가 일어서는 일련의 동작이 한 번의 절을 하는 동작이었다.

대장이 하는 절 동작은 단순히 가슴에 합장을 하였다가 바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리는 일반 불교신자들이 하는 절과는 달랐다. 특히 처음 절을 시작하면서 두 팔을 크게 원을 그리듯이 위로 뻗쳐 올려 정수리 위 공중에서 손을 마주치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소년은 절을 하지 않았다. 절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년은 무엇 때문에 절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또한 소녀를 따라 성당에 나가고 있어 법당에서의 절이 막연하게 성당에서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신 소년은 법당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고 묵상에 들어갔다.

대장의 절은 계속되고 있었다. 대장은 한 동작을 끝낼 때마다 일 배, 이 배, 삼배하며 절하는 횟수를 세어 나가고 있었다. 대장이 백배를 마쳤을 무렵부터 꿇어앉은 무릎이 아파 왔다. 다리도 저렸다. 그러나 대장의 절은 계속되고 있었다. 대장이 절을 시작한 지 벌써 한 시간은 족히 넘은 것 같았다. 다리가 너무 저렸다.

“오백 배”라고 읊조리듯 말하는 대장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소년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다리를 펴서 주무르기 시작했다. 법당 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도 차가웠다. 댕그랑, 풍경소리가 들리고 소년은 온몸을 떨었다.

그러나 절을 하는 대장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바닥에 깔린 방석을 적시고 있었다. 땀에 젖었는지, 회색 털스웨터를 입고 있는 대장의 어깨에서 김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대장은 언제까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절을 할 것인가. 저렇게 하는 절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장의 절은 계속되고 있었다. 절을 하는 동안 대장은 아예 소년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이어지는 반복 동작에 무릎이나 허리가 아플 것도 같은데, 대장은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표정이 참 평온하게 보였다. 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팔을 올렸다가 머리 위에서 손을 모으고 합장한 후 엎드리는 절 동작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한참 동안이나 저린 다리를 주물러 푼 소년은 그만 일어나 법당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대장만을 혼자 남겨두고 나가는 것이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소년은 대장이 절을 마칠 때까지 함께 법당에 앉아 있기로 했다. 대장은 힘들게 절을 하는데, 소년은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소년의 머릿속에 대막대기를 든 어릴 적 대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체국 앞 신작로에서 버들피리를 불던 소녀의 모습도 떠올랐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악동을 비롯한 또 다른 녀석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단 한순간도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소년은 어느 한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구백 배” 하는 대장의 음성이 꿈결처럼 아늑하게 들렸다.

대장은 언제까지 절을 할 것인가. 소년은 눈을 뜨고 잠시 대장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장은 전혀 소년을 의식하지 않았다. 오직 절하는 동작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절을 하는 대장의 몸 전체를 둥그런 후광이 감싸고 있는 듯 했다. “천배”하는 대장의 목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대장이 절을 멈췄다.
 

그러나 대장은 법당을 나가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방석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때 법당 옆 출입문이 살며시 열리며 소녀가 까치발로 살금살금 다가와 스님이 오셨다고 말했다. 벌써 두 시간이 훨씬 넘었다고 했다. 대장은 그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힘들게 절을 한 셈이었다. 법당을 나오니 무간 스님이 거처하는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대장이 스님의 방 앞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 스님, 오셨습니까?
― 들어오너라.

대장이 방문을 열고 세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무간 스님과 대장은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방안에는 은은한 차 향내가 배어 있었다. 발이 세 개 달린 놋쇠 화로 위 주전자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장이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먼저 큰절을 했다. 뒤에서 소년과 소녀도 따라 큰절을 했다.

― 편히 앉거라.

스님의 말에 소년과 소녀는 꿇어앉은 무릎을 풀고 앉았다. 그러나 대장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대장이 스님에게 소년과 소녀를 소개했다. 스님은 화로 앞에 반가부좌를 하고 잔잔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온화했다. 스님이 몸소 찻잔을 놓고 세 사람에게 차를 따랐다.

― 법당에서 무엇을 하였느냐?
스님이 대장에게 물었다.
― 절을 하였습니다.
대장이 여전히 꿇어앉은 채로 말했다.

― 무슨 절을 하였느냐?
― 단배공丹拜功을 하였습니다.
― 단배공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해왔습니다.

― 몇 번을 하였느냐?
― 천 번을 하였습니다.
― 무엇 때문에 절을 하였느냐?
― 아버지를 찾고 싶었습니다.

― 그래, 아버지는 찾았느냐?
― 중간에 생각이 끊어져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지, 아버지의 아들인 저는 누구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 가르쳐 줄까?
― 예, 가르쳐 주십시오.

― 네 아비는 빨갱이였고, 넌 빨갱이 새끼니라.
― 그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 알고 있으면서도, 또 무엇을 알겠다는 것이냐?
― 빨갱이였던 아버지가 품었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 아버지의 생각을 알면 너도 아버지를 따라 빨갱이가 되겠다는 것이냐?
― 아버지의 길이 옳았다면, 같은 길을 가겠습니다.
― 빨갱이 자식답구나.

스님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 이것을 한 번 봐 주십시오.

대장이 말하면서 점퍼안주머니에서 한지로 만든 봉투 하나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스님에게 건네고는 이어 말했다.

― 얼마 전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머니께 물어보니, 어머니가 저를 임신하였을 때 아버지께서 지으신 시詩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를 보면 아버지는 단순한 빨갱이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이놈아, 빨갱이면 빨갱이지, 단순한 빨갱이는 무엇이고, 단순하지 않은 빨갱이는 또 무엇이냐?

스님이 갑자기 곁에 두고 있던 죽간을 들어 대장의 어깨를 철썩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대장은 잠시 어깨를 움칠했을 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방안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스님이 대장이 내민 봉투를 열어 호롱불 아래에서 종이를 펼쳐 들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한지에 붓글씨로 정성스레 쓴 한편의 시였다. 그러나 스님과 마주 앉은 소년이 그 내용을 읽어 볼 수는 없었다.

겨울밤 산사에 바람이 꽤 부는 것 같았다. 갈 곳을 잃은 밤바람이 문풍지를 울렸다. 절 마당에서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가는 소리가 들렸다. 댕그랑, 댕그랑, 법당 처마 끝 풍경이 숨 가쁘게 울었다.

― 연재 제29회 <무간 스님 2>은 2019. 5. 6.(월) 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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