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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교향곡, 연재 제21회 <진눈깨비 1>
김영미안  |  anteaj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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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1  07: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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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교향곡, 연재 제21회 <진눈깨비 1>
Symphony in C minor ‘Fate’

   
 

진눈깨비 1

곽 판사 : 피고인들은 각 개의 물음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이익이 되는 사실을 진술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 김준하, 지금 검사가 진술한 공소사실을 들었지요?
김준하 : 예.
곽 판사 : 피고인은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는가요?
김준하 : 그 부분에 대하여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준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곽 판사. 그러나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

곽 판사 : 피고인 김준하, 피고인은 지금 이 법정의 재판을 거부하는 것인가요? 분명하게 대답해 주세요.
김준하 : 방금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곽 판사가 다시 한 번 준하를 매섭게 쏘아본다. 모멸감을 느낀 듯 곽 판사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다. 그러나 여전히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

곽 판사 : 피고인 박형기.
박형기 : 예.
곽 판사 : 지금 검사가 진술한 공소사실을 들었지요?
박형기 : 예.
곽 판사 : 피고인은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는가요?
박형기 : 제가 살인을 방조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살인은 김준하 혼자서 한 일입니다.

곽 판사 : 피고인 김준하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피고인의 불손한 태도는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 김준하의 변호인께 묻겠습니다. 피고인 김준하의 공소사실에 대한 변호인의 입장은 어떠한 것인가요?

   
▲ 사진 제공 임재수 사진작가(이하 같음)

기영은 일어섰다. 드디어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왔다. 기영은 준하를 보았다. 그러나 준하는 아무런 내색도 없다.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준하는 왜 곽 판사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진술을 거부할까? 무엇 때문에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조차 대답을 회피할까?

준하는 말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심판할 수 없다고. 이제부터는 내가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그렇다. 공소사실의 인정여부에 대하여 준하 스스로 어떤 의사표시를 하는 순간, 이러한 준하의 공언은 지켜질 수 없다. 그것은 심판을 받겠다는 의사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준하가 재판의 실질적인 시작을 의미하는 공소사실의 인정여부에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심판할 수 없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침묵으로 나타내는 부인의 의사표시이다. 아니, 그보다 더 강한 저항의 의사표시이다.

준하를 대신하여 변호인으로서 공소사실을 인정할 것인가. 그렇다면 준하가 유치장에서 말한 굿판은 깨어질 것이다. 굿판을 깨고 단지 구명을 호소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준하에게는 오히려 더 큰 치욕이 될 것이다. 그렇다. 준하는 제 입으로 말하는 대신 변호인인 기영의 입을 빌려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싶은 것이다.

― 피고인 김준하에 대한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합니다.

기영은 목소리를 높여 또박또박 말하고는 다시 준하를 보았다. 준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역시 기영의 판단이 옳았다. 이것이다. 준하가 장단을 맞춰달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곽 판사 : 검사는 피고인을 신문해 주십시오.

김용훈 검사(피고인 박형기에게)

문 : 200×. 4. ××. 23:00경 무렵, 부산 00구 00동에 있는 피고인의 집으로 상피고인 김준하(이하 ‘김준하’라고 한다)가 찾아왔지요?
답 : 예.
문 : (이때 김용훈 검사가 김준하를 지목하며) 그때 피고인을 찾아온 사람이 지금 피고인 옆에 있는 김준하인가요?
답 : 예.
문 : 그때 김준하가 피고인을 찾아와 무슨 말을 했나요?
답 : 함께 가 볼 데가 있다면서 자기 차에 타라고 했습니다.

문 : 그때 김준하가 어디에 간다고 하던가요?
답 : 어디라고 특정한 장소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와 함께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문 : 밤이 늦은 시간인데, 피고인은 어디에 간다는 목적지도 알지 못하고 김준하를 따라 나섰다는 말인가요?
답 : 예.

문 : 평소에도 김준하가 밤늦게 찾아온 적이 있었나요?
답 : 없었습니다. 그날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문 : 그런데도 피고인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김준하를 따라 나섰다는 것인가요?
답 : 무슨 문제가 있나보구나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문 : 피고인은 김준하의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목적지를 물어보지 않았나요?
답 : 궁금했지만, 표정이 심각해보여 감히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문 :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없었나요?
답 : 시내 어느 곳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공중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했습니다.
문 : 누가요? 김준하가 말입니까?
답 : 예.
문 : 그 후 김준하가 간 곳은 어디였나요?
답 :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차가 도착한 곳은 마린시티호텔이었습니다.

   
 

문 : 마린시티호텔 어디였나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답 : 호텔 지하주차장이었습니다.
문 : 그곳에서 김준하가 어떤 행동을 하였나요?
답 : 운전석 사물함을 열고 곱슬머리 장발가발을 꺼내어 썼습니다.
문 : 가발이라고요? 평소 김준하가 그런 가발을 착용한 적이 있었나요?
답 : 없습니다. 평소에 가발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문 : 그렇다면 그때 피고인은 김준하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답 :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려고 하는 참에 김준하가 먼저 얘기를 했습니다.
문 : 어떤 얘기를 했나요?
답 : 국회의원 당선축하 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샴페인을 터트릴 때 옆에서 박수를 쳐 달라고 했습니다.

문 : 국회의원 당선축하 인사를 하러 왔다는 사람이 평소와 다르게 가발을 쓴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나요?
답 : 이상하긴 했지만, 물어볼 겨를도 없이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객실로 올라갔습니다.
문 : 선물바구니를 들고 올라간 사람은 피고인이었지요?
답 : 예.

문 : 왜 피고인이 선물바구니를 들고 올라갔나요? 피고인이 선물바구니를 들고 간 것은 김준하와 사전에 살인을 위한 역할분담이 되어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답 :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김준하가 저에게 선물바구니를 들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단지 김준하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문 : 두 사람이 간 호텔 객실은 804호실이었나요?
답 : 예.

문 : 당시 피고인은 마린시티호텔 804호실에 김인환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답 : 아니, 몰랐습니다. 저는 다만 영문도 모른 채 따라 갔을 뿐입니다.
문 : 호텔 객실 804호실에 갈 때까지 엘리베이터나 다른 곳에서 누군가를 만난 사실이 있나요?
답 : 밤이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문 : 피고인과 김준하는 호텔 객실 804호실에 어떻게 들어갔나요?
답 : 김준하가 노크를 하고 손잡이를 돌리자, 출입문은 미리 열려 있었습니다.
문 : 김준하가 먼저 들어가고 그 뒤에 피고인이 들어갔나요?
답 : 예.
문 : 문을 열고 들어간 김준하는 어떤 행동을 했나요?
답 : 호텔 지배인이라고 하면서 선거사무장님으로부터 제일 먼저 샴페인을 대령해 드리라는 연락을 받고 왔다고 했습니다.
문 : 그런 거짓말을 하는 김준하가 이상하지 않았나요?
답 : 이상하긴 했습니다.

문 : 그런데도 피고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 처음부터 이상했지만, 김준하의 말이 사실인 줄 알았습니다. 얼떨결에 따라온 뒤라서 경황이 없었습니다.
문 : 그 뒤에 김준하는 어떤 행동을 했나요?
답 : 당선을 축하드린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자기가 샴페인을 터트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들고 있는 꽃바구니에서 샴페인병을 꺼내들고 흔들었습니다.

문 : 피고인이 샴페인병을 꺼내어 김준하에게 건넨 것이 아닌가요?
답 :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문 : 김준하가 샴페인병을 들고 흔들고 있을 때, 피고인은 그대로 있었나요?
답 : 저는 그때 김준하가 박수를 쳐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꽃바구니를 바닥에 놓고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준하가 샴페인병으로 김인환의 머리를 때려 쓰러뜨렸습니다.

문 : 샴페인병으로 김인환의 머리를 때릴 때나, 또는 쓰러진 김인환이 반항을 하지는 않았나요?
답 : 너무나 순식간에 가격을 당해 김인환은 반항할 틈이 없었습니다.
문 : 그런 김준하의 행동을 피고인은 왜 제지하지 않았나요?
답 :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저도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문 : 그 이후에 김준하가 어떤 행동을 했나요?
답 :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들어 들고 쓰러진 김인환의 배를 발로 눌렀습니다. 그러자 잠시 실신했던 김인환이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칼을 보고서 너무 놀라서인지 반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 : 김준하가 살인을 하려고 칼을 꺼내들고, 발로 김인환의 배를 누르고, 김인환이 의식을 되찾기까지, 그런 일련의 동작이 계속 진행되는 도중에도 피고인은 그냥 그대로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 그때 너무 놀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문 : 그때 김준하가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나요?
답 : 무슨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가발을 벗으면서 자기를 알아보겠느냐고 김인환에게 물었습니다.
문 : 그때 김인환이 김준하를 알아보았나요?
답 :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가 잠시 후에 알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문 : 그런데도 김준하는 김인환을 살해하였다는 것인가요?
답 : 예. 김인환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김준하가 이제야 비로소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의원 노릇은 하늘나라에 가서 하라는 말을 하면서 칼로 목을 베었습니다.
문 : 그때까지도 피고인은 김준하의 행동을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 김준하의 행동이 너무 뜻밖이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너무 당황했고, 겁도 났습니다.

문 : (이때 김용훈 검사가 수사기록 중의 깨진 샴페인병과 칼을 촬영한 사진을 피고인에게 제시하며) 당시 김준하가 김인환을 가격한 샴페인병은 이것이고, 당시의 칼은 이 사진속의 칼이 맞나요?
답 : 예.
문 : 피고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도 왜 이제까지 경찰에 자수하거나 신고하지 않았나요?
답 : 그동안 너무도 겁이 났습니다. 신고를 하면 같은 공범이 되어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신고를 못했습니다.

김용훈 검사 : 이상입니다.

곽 판사 : 피고인 박형기의 변호인은 반대신문을 해주십시오.

강성모 변호사(피고인 박형기에게)

문 : 김준하가 피고인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미리 전화를 하고 왔던가요?
답 : 아닙니다. 그 시간에 찾아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문 : 그렇다면 김준하가 피고인을 찾아 온 목적이 김인환을 살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피고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겠네요?
답 : 예, 저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문 : 김준하가 샴페인병을 들고 흔들 때, 피고인이 박수를 친 것은 실제로 김준하가 축하 샴페인을 터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박수를 쳤던 것이지요?
답 : 예.
문 : 김준하가 샴페인병으로 김인환을 가격하여 쓰러뜨린 후 곧바로 칼을 빼어 들었나요?
답 : 예, 쓰러지자마자 곧바로 칼을 꺼내 들고 배 위에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김인환이 반항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문 : 만약 당시에 피고인이 김준하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였다면 김준하는 피고인도 해칠 태도를 보였나요?
답 : 예, 그랬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문 : 그래서 피고인은 신체에 대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김준하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답 : 예, 그렇습니다.

문 : 당시 김준하의 그런 행동을 피고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답 : 예, 그때 김준하의 행동은 너무도 돌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너무 무서워서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준하가 칼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저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문 : 차 안에 선물바구니가 있어 피고인은 김준하가 실제로 선물바구니를 전달하러 가는 줄 알았지요?
답 : 예, 선물바구니를 들고 정말 축하를 하러 가는 줄 알았습니다. 설마 살인을 하러 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문 : 김준하가 이 사건이 있기 이전에 김인환에게 원한을 가진 사실을 피고인은 알고 있었는가요?
답 :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문 : 김준하가 피고인에게 자기의 범행 계획을 사전에 말한 적이 있는가요?
답 :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조금만큼의 낌새라도 느꼈다면, 저는 그날 김준하를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성모 변호사 : 이상입니다.

곽 판사 : 피고인 김준하의 변호인은 피고인 박형기에게 신문할 사항이 있는가요?

기영은 일어섰다.

박기영 : 피고인 박형기에 대한 반대신문과 김준하에 대한 주신문은 차회 공판기일에 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보다 먼저 피고인 김준하에 대한 변론준비를 위하여 검사에게 이 사건과 관련한 공소외 최경호에 대한 수사기록을 제출하여 줄 것을 신청합니다. 그리고 피고인 김준하의 전과기록에 나타난 소년보호 사건 및 국가보안법위반 사건기록에 대한 문서송부촉탁을 신청합니다.

김용훈 : 최경호에 대한 수사기록은 이 사건 피고인의 범죄사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박기영 :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살해된 김인환의 목에서 최경호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경호가 긴급체포 되었다가 석방된 사실은 이미 공지의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누가 진범인가를 판단하는데 있어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곽 판사 : 변호인의 문서제출명령 및 문서송부촉탁 신청을 채택합니다. 검사는 최경호의 수사기록을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공판기일은 200×. ×. ×. 14:00 로 정하겠습니다.

준하의 말대로 이제 굿판은 벌어졌다. 지금부터 준하가 어떤 춤을 출 것인가. 용훈이 들고 칠 꽹과리는 어떤 소리를 낼까. 기영이 들고 칠 징은 또 어떤 장단을 맞추어야 하나.

준하가 정리에 이끌려 법정을 나가고, 방청석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법정을 나갔다. 기영은 다시 한 번 방청객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나 기영이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을 빙 둘러 늘어서 있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의 짙푸른 녹음이 칠월 하순 무더위를 그나마 식혀주었다. Y고등학교 전교생 모두가 각 학년 각 반별로 줄을 지어 운동장에 집합했다. 소년이 고등학교를 진학한 후 처음 맞는 여름 방학식, 1학기 성적 우수학생에 대한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1학년부터 전교 수석을 한 학생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순간 소년은 깜짝 놀랐다. 설마? 잘못 들었나? 아니, 동명이인이겠지. 그러나 아니었다. 호명을 받고 열에서 뛰어나와 시상대로 성큼성큼 오르는 학생의 모습, 소년은 제 눈을 의심했다.

고향 마을에서 항상 대막대기를 들고 아이들을 이끌던 대장, 그해 겨울, 노루사냥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 마을을 떠났던 바로 그 대장이 시상대로 오르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어깨가 더욱 벌어지고, 키도 훌쩍 자랐지만 분명 대장이었다.

두 번째로 소년이 알지 못하는 키가 작고 커다란 뿔테 안경을 낀 학생의 이름이 불려졌다. 세 번째로 소년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안경 낀 학생이 2등, 소년이 전교 3등을 했던 것이다. 세 사람이 상장을 받기 위하여 시상대에 나란히 섰다.

소년이 대장을 곁눈으로 보았다. 대장도 소년을 알아보았는지 일순 놀라운 기색과 함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소년은 상을 받는다는 뿌듯함보다도 더 큰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해 겨울, 고향을 떠난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대장도 소년과 같은 Y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

방학식이 끝나고 소년과 대장은 다시 만났다. 그동안의 지난 얘기를 하는 동안에 문득 바닷가에 가보자고 한 사람은 소년이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에서 살았던 소년은 바다를 볼 기회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부산에 온 후에도 학교와 시내를 벗어나 바다를 볼 수 있는 해변이나 해수욕장에 가 본적은 없었다.
 
   
 

소년보다 부산 지리를 잘 아는 대장이 다대포로 가자고 했다. 함께 자란 고향 마을의 강이 바다와 합쳐지는 곳이라고 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하늘만을 보면서 자란 소년에게 시선이 머물 곳조차 없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엄청난 경이로움이었다.

소년과 대장은 다대포해수욕장에서 몰운대공원 산책로로 이어지는 해변 바위에 앉아 강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강물은 을숙도를 감싸고 흘러 바닷물과 만나 은물결로 반짝였다. 그 강물은 소년의 고향 마을을 거쳐 흘러온 강물이었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다대포 강폭은 소년의 고향 마을 강보다도 훨씬 넓었다. 조그만 점같이 보이는 배들이 먼 바다 수평선 위에서 가물거렸다. 대장이 자갈돌 하나를 집어 먼 바다를 향해 던졌다. 가까운 바위 위에 모여 앉아있던 갈매기가 놀라 끼룩대며 무리지어 날아올랐다.

소년이 가방에서 하모니카를 꺼냈다. 소녀가 준 하모니카였다. 하모니카 소리가 여름 오후의 잔잔한 은빛 물결 파도 속으로 빨려들었다. 하모니카를 불던 소년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하여 소리를 멈추자, 대장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날 때마다 이곳에 오곤 했어. 네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떠오르네. 저 강물 속에서 아버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말을 하는 대장의 눈에 얼핏 눈물이 어렸다. 눈물로 글썽거리는 대장의 눈동자에 여름 오후 반짝이는 은빛 물결이 함께 일렁거렸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대장의 슬픔을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  연재 제22회 <진눈깨비 2>은 2019. 3. 18.(월) 에 게재됩니다.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20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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