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20회 <첫사랑 2>
Symphony in C minor ‘Fate’
 

첫사랑 2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하늘가로 고추잠자리가 날고 있는 가을 들녘, 소년이 자전거를 달리고 있었다. 들국화 향기가 바람에 묻어왔다. 자전거 뒤쪽에서 부르릉거리는 차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이제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 소리가 버스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소년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면서 버스가 지나갈 수 있도록 자전거를 오른쪽 갓길로 붙였다. 지나치는 버스 안에서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소년은 자갈도로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피해 잠깐 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엉덩이를 치켜세우고 버스 꽁무니를 따라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그러나 결국 버스는 점점 멀어져 낮은 산모퉁이 신작로 굽이를 돌아갔다.

소년이 쉬지 않고 자전거를 달려 버스가 지나간 신작로 굽이를 돌았을 때, 다른 때 같으면 벌써 고갯마루를 넘어가 보이지 않을 버스가 도로변에 멈춰 서 있었다. 무슨 일일까? 소년은 더욱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소년이 다가갈 때까지도 버스는 여전히 멈추어 서 있었다.

버스 승객으로 보이는 남자 일행 몇 명이 가로수 아래 풀밭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전거에서 내려 핸들을 잡고 끌면서 걸어서 버스로 다가갔다. 그때 버스 밑에서 운전기사 아저씨가 등배로 기어 나오더니 다시 버스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버스는 몇 번 부르릉거리다가 다시 소리를 멈추고 말았다. 버스가 고장 난 모양이었다.

소년은 강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녀도 버스에서 내려 강둑 위에 올라서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작로에 연이어 쌓은 강둑 위로 오르는 나지막한 경사진 언덕배기 둔덕에는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어 바람에 하늘거렸다. 소녀는 둔덕에서 꺾은 붉은 코스모스 한 묶음을 들고 서 있었다.

소년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소년도 무엇에 이끌리듯 자전거를 길옆에 세워두고 강둑 위로 걸어 올라갔다. 강물은 늦가을 짧은 오후 햇살을 받아 붉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흘렀다.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볼이 손에 든 붉은 코스모스 꽃잎과 반짝이는 붉은 은빛 강물에 물들어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소녀는 소년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여전히 강물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등 뒤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때서야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 엄마야!

깜짝 놀란 소녀가 낮게 외쳤다. 그 소리에 소년도 흠칫 놀라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모자를 벗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씩 웃었다. 소녀도 오히려 미안했던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소년이 가장 가까이에서 본 소녀의 해말간 웃음이었다.

― 내 자양구(자전거) 타고 가자.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소년이 길옆에 세워 둔 자전거를 가리키며 불쑥 말했다.
― 아니, 괜찮아.
소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 버스가 고장 난 것 같은데, 언제 고쳐지겠노?
소년이 제 주장을 강요하듯 다분히 볼멘소리로 크게 말했다.
― 자전거는 한 번도 안 타봤어. 겁이 나서…….
― 꼭 잡고 있으면 괘안타. 어영(얼른) 안가면 해지겠다.

― 그래라. 차가 언제 고쳐질지 모르겠다.
강둑 위 소년과 소녀의 실랑이를 들었는지 다시 버스에서 내리던 운전기사가 손짓을 하며 큰 소리로 소년의 편을 들었다.

― 봐라. 아저씨도 그래라 안 카나?
― 그래도 넘어지면……?
― 꼭 잡고 있으면 괘안타 안 카나. 해지면 니 혼자 집에 우째 갈끼고?

소년이 재촉했다. 소녀가 소년과 함께 강둑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소녀는 말없이 혼자 버스에 올라탔다. 어, 소년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잠시 후 소녀가 책가방을 갖고 다시 버스에서 내렸다.

소녀가 생긋 웃으며 소년에게 책가방을 내밀었다. 소년이 책가방을 받아들며 밝게 웃었다. 소년이 뒤쪽 짐칸에 싣고 있던 책가방을 풀어 자전거의 한 쪽 핸들에 걸고, 소녀의 책가방을 다른 한쪽 핸들에 걸었다. 소녀가 뒤쪽 짐칸에 앉았다.

소년이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혼자 탈 때 보다 처음에는 다소 힘들었다. 그러나 이윽고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소녀를 태우고도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자전거를 달릴 수 있었다. 점점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자갈길에 덜컹거리기도 했다. 겁이 난 소녀가 엉겁결에 소년의 등허리를 꽉 껴안았다.

소년의 등에 봉긋하게 솟기 시작하는 소녀의 젖가슴의 감촉이 뭉클 전해지며 코끝으로 아카시아향기 같은 소녀의 체취가 풍겨왔다. 소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소년은 숨이 멎는 것 같은 아찔한 황홀감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과 황홀감에 페달을 밟는 다리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구름 위를 둥둥 떠가는 것 같았다.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난 파란 가을하늘아래 고추잠자리도 함께 날았다. 소년은 힘차게 페달을 밟아 나갔다. 귓가를 스쳐가는 들바람이 상쾌했다. 고추잠자리들이 날개로 손뼉을 치며 소년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페달을 밟아가면서도 힘든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행여 소녀가 자전거에서 내리려고 할까봐 가빠오는 숨소리조차 감추었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 혼자라면 쉽게 넘어가는 길이었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가속도를 붙여 페달을 밟으면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등허리를 껴안고 있는 소녀 때문에 엉덩이를 들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자전거를 세우고 소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나지막하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자전거에서 먼저 내린 소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엉덩이를 만졌다. 소녀가 앉은 뒤쪽 짐칸이 딱딱한 철망 구조라 덜컹거리는 자갈길에 부딪힌 엉덩이가 아팠던 모양이었다.

소년은 괜히 미안했다. 이마에서 다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소년이 오른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왼손으로 모자를 벗어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미안한 눈빛으로 숨 가쁘게 물었다.
― 마이 아푸나?
― 아니, 조금.
소녀도 이제는 얼굴빛이 상기돼 있었다.

― 땀 닦아.
소녀가 호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소년에게 내밀며 말했다.
― 괘않다 마.
소년은 연신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치면서도 선뜻 손수건을 받지 못했다. 하얀 손수건이 너무 깨끗해 내밀던 손을 다시 움츠리고 말았다.

― 나 땜에 더 힘들어 놓고.
소녀가 다가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한 번 닦아주고는 손수건을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의 입가에 생긋 웃음기가 배어들었다. 소년은 못이기는 척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오르막 고갯길을 자전거를 끌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무와 배추를 가득 실은 군용 트럭 두 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갯길을 천천히 올라갔고, 버스 한 대가 왔던 길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내려갔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소녀가 먼지를 피해 멀찌감치 갓길을 벗어나 고개를 돌리고 손사래를 쳤다. 소년도 자전거를 잡은 채로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려 잠시 숨을 멈추고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소년의 이마에서 계속 땀이 흘렀다. 소년은 손수건으로 다시 땀을 닦았다. 소년은 손수건을 슬며시 제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나가는 트럭과 버스 먼지를 뒤집어 쓴 탓인지, 단지 두 번 땀을 닦았을 뿐인데도 손수건이 너무 많이 더러워져 있었다. 먼지와 땀내 배인 손수건을 그대로 돌려주기도 민망하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그 손수건을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오빠, 매일 자전거로 학교 다니는 게 힘들지 않아?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걷고 있던 소녀는 손수건은 잊어버렸는지 천연덕스럽게 오빠, 라고 부르며 물었다. 소년은 오빠, 라는 말에 다시 가슴이 뛰었다.

― 으응? 괘않다. 비가 오거나 너무 추울 때는 좀 그렇지만…….
(― 오늘처럼 맨날 니를 태우고 같이 댕기서면 얼매나 좋겠노. 그라모 진짜 신날 것 같다.)
소년은 속으로 말하며 혼자 웃었다.

천천히 걸어 고갯마루에 다다랐다. 고갯마루에서 멀리 바라본 강변 평야에는 억새꽃이 야위어가는 오후햇살에 하얀 눈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가까운 억새 숲에서 작은 새 떼가 둘의 기척을 들었는지 파드닥 날개를 퍼덕이며 무리지어 날아올랐다. 

오른쪽 갓길을 벗어나 가까운 고갯마루 언덕 위에 고인돌처럼 생긴 편평한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강변을 따라 펼쳐진 들판과 꾸불꾸불 굽이치며 흐르는 강줄기를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 소년 혼자 몇 차례 올라가 본 적이 있는 시야가 확 트인 곳이었다. 소녀에게도 구경시켜 주고 싶었다.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소년이 먼저 바위에 올랐다. 소년이 손을 내밀어 소녀의 손을 잡아 끌어올리는 순간, 바로 발아래 지척 억새밭에서 꿩, 하는 소리와 함께 꿩 두 마리가 푸드덕 날개를 치며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아올랐다.

― 엄마야!

소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얼떨결에 소년의 팔에 매달렸다. 꿩 소리보다 소녀의 짧은 비명에 소년도 덩달아 흠칫 놀랐다. 그러나 소녀처럼 놀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꿩 소리에 놀란 소녀의 표정이 더 예뻐 보였다. 팔에 매달린 소녀의 어깨를 그냥 덥석 보듬어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순간 소년은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일어난 충동을 소녀가 알아채기라도 하면……. 소년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소녀의 팔을 슬며시 떼어내었다. 대신 발아래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소년은 꿩이 날아간 먼 숲을 향하여 힘차게 돌팔매질을 하며 소리쳤다.

― 야, 이 꽁 새끼야!

바위에 서서 왔던 길을 내려다보니 멀리 고장 난 버스가 그대로 서 있고, 버스 승객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이 신작로 자갈길을 나란히 줄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강물은 꿈꾸듯 꾸물거리며 붉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흘렀다.

소년의 이마에 다시 땀이 흐르고, 소녀의 콧잔등에도 땀방울이 송송했다. 소녀는 또 다른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소년은 속으로 놀랐다. 여자애들은 손수건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다니는구나.

소년은 괜히 부끄러웠다. 손수건 하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촌놈이라니. 소년은 바지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소녀의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은 후 다시 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오빠, 오빠 집은 얼마나 멀어?
소녀가 물었다.
― 좀 멀어. 우체국에서도 한 이십분쯤 더 가야해.
― 자전거로?
― 응, 그러나 우리 동네 경치는 참 좋아. 봄에는 앞산이 참꽃으로 빨갛게 물들어.

― 참꽃이 뭔데?
― 응? 진달래 말이야. 우리 동네에서는 진달래를 참꽃이라 불러.
― 정말? 한번 가보고 싶어. 봄에 진달래가 활짝 핀 오빠 동네 경치가 얼마나 좋은지 보고 싶어.

소년은 가슴이 설레었다. 소녀가 우리 동네에 온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여길까? 벌써 여학생을 사귄다고 수군거리지는 않을까? 아무래도 소녀 같은 계집애를 데리고 동네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그런 상상이 소년은 싫지 않았다.

이미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저녁 해가 강가에 붉은 노을을 드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은 갑자기 한 생각을 하고 일어섰다. 소년은 교복 윗도리를 벗어 반듯하게 네모로 접어 자전거 짐칸에 얹었다.

― 이래하모 좀 안 아프겠제. 어영 가자. 곧 해가 지겠다.

소녀가 하얀 앞니를 드러내고 방긋 웃었다. 고갯마루 능선에서 내려오는 내리막길은 힘들지 않았다. 소년이 한 번도 쉬지 않고 자전거를 달려 간이우체국 앞에 도착했을 때, 해는 완전히 기울어 강변 서쪽 하늘가에 노을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소녀가 내리막길 빠른 속도에 무서워 꼭 껴안고 있던 소년의 허리를 풀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소녀가 소년이 건네는 책가방을 받아들고 우체국 출입문 계단까지 걸어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 고마워, 오빠. 잘 가. 내일 봐.
웃음 띤 소녀의 상기된 볼과 눈동자에도 석양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

그날 이후, 소년은 소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보다 아래 학년인 소녀가 먼저 수업을 마치고 소년을 기다리는 때가 더 많았다. 소년은 소녀를 위해 자그마한 방석을 하나 만들어 딱딱한 철제 짐칸에 덧대두고 있었다. 비가 오거나 특별히 날씨가 굳은 날은 소년도 우체국 앞에서 소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토요일같이 학교 수업을 일찍 마치는 날은 일부러 강둑이나 고갯마루에서 노을이 질 때까지 함께 얘기하며 놀다오기도 했다. 소녀도 노을빛을 좋아했다. 어떤 날은 반짝이며 흐르는 강변까지 내려가 강물에 발을 담그고 하얀 모래밭에 숨은 조개를 잡기도 했다.

버드나무 가로수가 잎을 떨어뜨리고, 기러기 떼가 강변 하늘을 줄지어 날아가는 겨울이 왔다. 소녀를 만날 수 없는 겨울 방학은 길고 지루했다.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소녀가 너무 보고 싶어 일부러 자전거를 타고 간이우체국이 있는 장터까지 가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체국에 소녀는 없었다. 아니, 소년은 소녀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지 소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체국 앞을 서성거렸을 뿐이었다. 겨울 방학이 되면 소녀는 부산에 가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혹시나 소녀가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체국 앞으로 가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소년은 더욱 짙은 그리움만 가득 안고 돌아와야 했다.

여전히 추운 겨울 2월 초, 드디어 겨울 방학이 끝났을 때 소년은 소녀를 볼 수 있다는 크나큰 기대감으로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소녀의 모습은 우체국에도 학교에도 보이지 않았다. 2월이 가고, 3월이 오고, 소년은 이제 3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소녀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소년은 걱정으로 점차 말을 잃어 갔다.

아직도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중순, 소년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작은 소포꾸러미 하나를 받았다. 부산에서 소녀가 보낸 것이었다. 편지와 함께 하모니카 하나가 들어있었다. 가슴을 설레며 편지지를 꺼냈다.

편지지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소녀의 체취가 그대로 배어있는 것 같았다. 편지에는 소녀가 다시 부산으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갔다고 했다. 소년이 열심히 공부하여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소년은 소녀가 그리울 때마다 하모니카를 불었다. 소년의 가방에는 끝내 돌려주지 않았던 소녀의 손수건으로 곱게 싸인 하모니카가 항상 들어 있었다. 하모니카는 소녀의 손수건과 함께 소년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 되었다.

하모니카에 소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고, 하모니카 소리에 소녀의 음성이 녹아 있었다. 하모니카 선율을 타고 소녀의 체취가 풍겨 났다. 소년은 공부에 열중했다. 소녀의 말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반드시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소녀를 꼭 만나겠다는 생각이 소년을 더욱 공부에 몰입하게 했다.

신작로를 따라 흐르는 강에 새로운 강물이 흐르고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노을은 소년이 부는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짙어지고, 강물도 소년의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흘렀다. 소년은 여전히 그 신작로를 따라 자전거를 달렸지만, 이제는 혼자였다. 그러나 소년은 외롭지 않았다.

신작로를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 가지에 다시 움이 트고, 들판에 새싹들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소년은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부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Y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소년의 가슴에는 소녀를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꽉 차 있었다.

*

3월, 토요일 오후, Y고등학교 교문 옆 담장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에 따스한 봄 햇살이 내려쬐고 있었다. 돌담에 촘촘하게 실뿌리를 내린 아주 오래된 담쟁이덩굴은 담벼락에 무성하게 자라난 턱수염 같았다.

 덩굴은 겨울 내내 움츠려 있던 줄기를 펴고 하루라도 빨리 잎눈을 열고자 허기진 듯 햇볕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수업을 마친 소년이 막 교문을 나서 담쟁이덩굴 아래 담장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 오빠!

순간 소년은 감전이 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귀에 익은 음성, 가슴에서 일어난 파동이 물결을 치면서 갑자기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년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장 아래 모퉁이길, 소녀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담벼락을 뒤덮은 무성한 담쟁이덩굴에 반사된 햇살과 소녀의 미소가 한데 어우러져 엷은 아지랑이로 번져나고 있었다. 소년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애를 태우던 소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

*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부산에는 소년 혼자였다. 다른 일가친척은 하나도 없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소년은 겨우 몸을 뉠 좁은 단칸방을 세내어 자취생활을 하는 한편, 새벽 일찍 일어나 신문배달을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신문배달을 하는 일이 소년에게는 무척 힘들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배달을 하고 학교에 가면 피곤한 나머지 수업 중에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소년의 규칙적인 생활의 일부로 되어 갔다. 힘들고 외로웠지만, 소년에게는 일주일에 한번 맞는 커다란 기쁨이 있었다. 그것은 매주 토요일 오후에 소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어려운 집안 형편을 안 소녀 아버지가 소년에게 매주 토요일 오후 중학 1학년인 소녀의 남동생 과외 공부를 가르치도록 배려하였던 것이다. 소년에게는 그 대가로 받는 얼마간의 용돈도 고마웠지만, 무엇보다도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매주 토요일 오후, 소녀의 집을 찾아가면 언제나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소녀가 소년을 맞았다. 소녀의 집은 고향 간이우체국처럼 빨간 벽돌로 외벽을 쌓은 2층 양옥이었다. 시골에서만 자란 소년이 그때까지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커다랗고 깨끗한 집이었다.

소녀와 남동생의 방은 2층에 있었다. 남쪽과 서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키다리 탁자 의자에 앉아 동생을 가르치고 있을 때, 소녀가 과일이나 과자접시를 들고 방에 들어와 함께 먹었다. 서쪽 창문으로 비쳐드는 저녁햇살에 물든 소녀의 볼과 눈이 너무 예뻤다.

때로는 소녀가 소년 옆에 바짝 의자를 붙이고 앉아 모르는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소년은 아카시아 꽃향내 같은 소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겨나는 은은한 체취를 가슴깊이 들이마시며, 처음 소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빨간 석양에 물든 소녀의 볼과 눈동자를 떠올렸다.

저녁을 먹고 집을 나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골목길을 걸어 나올 때마다 소년은 왠지 모를 서러움을 느껴야 했다. 배웅을 나온 소녀와 헤어지기 싫어 일부러 천천히 걸었지만, 골목길은 항상 짧기만 했다.

― 잘 가, 오빠. 다음 주에 봐.

소년에게는 골목길 어귀에서 건네는 소녀의 작별인사가 너무도 아쉽고 허전했다. 어떤 날은 되돌아간 소녀가 다시 몸을 돌려 손을 흔들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골목길에 서 있기도 했다.

소년은 언제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텅 빈 자취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취방은 어둡고 습기 찬 방이었지만, 소년은 그 방에서 꿈을 꿀 수 있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소년은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해, 소년의 봄은 아름다웠다. 

― 연재 제21회 <진눈깨비 1>은 2019. 3. 11.(월) 에 게재됩니다.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21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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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와의 짧은 소통

<첫사랑 1, 2>에서의 배경과 상황묘사는 작가의 유년시절 고향에서의 직접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때 작가가 다니던 시골학교에 부산에서 전학을 왔던 어린 여학생, 아버지가 우체국장이었던 그 소녀의 이름과 얼굴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체국 계단 앞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 보았던 당시 시골소녀들과는 달랐던 그 소녀의 옷맵시는 유년의 기억 속에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빨간 벽돌 외벽이었던 시골우체국은 그때 있던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로 다시 새로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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