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꽃

                                                이 서 린

꽃이 피었다
어시장 왁자한 어물전마다
커다란 고무통 찬물에 잠긴
다발다발 무수한 주홍빛 돌기

봄이다

어린 딸들은 마루 끝에 앉아 햇볕을 받고 어머닌 수돗가에서 멍게를 손질하였다 맨드라미 꽃씨를 심는 아버지의 손목에 선명한 힘줄 가장家長의 의지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작은 술상이 차려지고 아버지는 손을 비볐다 맛있는 것을 앞에 둔 아버지의 버릇이었다 투명한 유리컵에 소주가 반짝이고 알싸한 멍게향이 일요일 오후에 스몄다 딸내미 셋을 나란히 앉혀놓고 조금 붉은 낯빛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선창’을 불렀고 음치에 가까운 어머니의 ‘봄날은 간다’가 이어졌다 얘들아, 아버진 말이다 봄이 오면 멍게가 단연 좋더라 이 바다냄새가 참 좋더라 바다에서 피는 꽃 같지 않냐 초장에 찍은 멍게를 먹이려는 아버지와 한사코 싫다는 딸들의 실랑이가 오가는 이른 봄날

선창도 사라지고 봄날도 갔다 꽃보다 먼저 찾은 접시 가득 멍게도 손을 싹싹 비비며 침을 삼키던 아버지나 지아비 앞에 고운 여자였던 어머니나

오늘은 어시장에서 멍게 한 봉지를 샀다
울퉁불퉁 못생겨도 선명한 빛깔
아버지 생전에 꽃이라 했던
그러니까 입 안 가득 봄 바다다

* 작가노트

▲ 이서린 시인

아버지에게 멍게는 봄에 피는 꽃이었다. 마산 어시장에 멍게가 나오는 철이면 우리 집엔 어김없이 멍게가 피었다. 손질한 멍게 꼭지를 꼭꼭 씹으면 맛있다고 빨갛고 뾰족한 꼭지도 함께 드시던 아버지. 엄마가 만든 모든 반찬은 멋진 술안주라고 입맛을 다시던 아버지. 술과 노래와 지어미와 딸들을 사랑한 사내.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서둘러 세상을 떠난 그는 로맨티스트였다. 유랑극단을 따라다닌 적도 있고 기자, 성우도 했던 적이 있으며 마지막 직업으로 선생님을 선택하였다. 비로소 아내의 고민을 조금 덜어주나 했는데, 운명은 그를 너무 빨리 우리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 봄날, 4월이었다. 노래 잘 부르던 사내도, 그 사내를 사랑한 여인도 이젠, 없다.

이서린은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2007년 《김달진창원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저녁의 내부』가 2016년 <세종우수도서 문학 나눔>에 선정되었다. 주책밴드, 시문학연구회 하로동선 동인으로 현재 문학치료강사로 일하고 있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에서 활동하는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