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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교향곡, 연재 제17회 <그해 겨울 1>
김영미안  |  anteaj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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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1  07: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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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교향곡, 연재 제17회 <그해 겨울 1>
Symphony in C minor ‘Fate’
 
   
 

살인 교향곡, 연재 제17회 <그해 겨울 1>
Symphony in C minor ‘Fate’

제2악장
Andante con moto 3/4 박자

   
 ▲ 사진제공 임재수 사진작가

태양이 완전히 중천에 떠올랐다.
태양은 더욱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초원의 그 어디에도
물이 있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도 가끔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행 중의 하나가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저 멀리 앞을 바라보았다.
어른거리는 더운 열기 속에
푸른 나무숲이 보였다.

숲이다.
그는 힘차게 앞발을 들어 올렸다.
이제 그들의 생명을 구해줄 물을 찾았다.
저 푸른 나무숲이 있는 곳에 가면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을 축여줄 물이 있을 것이다.
뜨거운 태양광선에 그을린 등을 식혀줄
푸른 물이 넘실대는 늪이 있을 것이다.

숲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저기 갈증에 지쳐 쓰러져 죽은
동물들의 시신이 눈에 띄었다.
애써 외면하고 지나쳤다.

드디어 숲에 도달했다.
햇볕에 탄 등허리를 나무그늘에 적시고
가쁜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늪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지난 우기동안 내내
푸른 물로 가득 차 있던 그 늪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채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늪가에 무성하던 풀들도 모두
바싹 메말라 있었다.

   
 

그해 겨울 1

기영은 315호 형사법정으로 들어섰다. 거의 매일 드나드는 법정인데도 법정분위기는 항상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영은 변호인대기석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양손을 아랫배 단전에 가볍게 붙여 마치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눈을 감았다.

개정 십 분전.
기영은 개정이 임박하기까지 여전히 준하에 대한 변론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단지 관대한 처벌을 구하고 구명을 호소할 것인가. 아니면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오로지 무죄로 항변할 것인가. 머릿속에는 이젠 거의 암기하다시피 되어버린 두꺼운 수사기록의 단면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기영이 변론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공소사실에 대하여 준하가 어떠한 진술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영은 단지 수사기록을 통하여 범죄사실을 추론할 수밖에 없었고, 기록에 나타난 범죄사실에 대하여 준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기영이 변호사로서 경험한 바로는 범죄사실에 대한 수사기록상의 증거가 명확한데도 이를 부인하여 무죄를 항변한다는 것은 전혀 승산이 없었다. 수사기록만 보면 준하의 범죄사실에 대한 무죄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희박해 보였다.

그렇다고 검찰의 공소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은 준하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내면의식과 자존심에 비추어, 굴복하느니 차라리 부인하다가 중형을 선고받는 것을 택할 것이다. 준하는 분명 그럴 것이다. 현실과 관념의 괴리, 기영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는 가장 큰 이유였다.

“괜한 마음을 쓰고 있구나. 어느 누구도 나를 심판하지 못해. 예전에는 그들이 나를 심판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부터는 내가 그들을 심판할 테니까.”

유치장으로 접견을 갔을 때 준하가 한 말이었다. 그들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재판을 받아야 할 피고인이 오히려 누군가를 심판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래. 분명 준하는 자신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검사나 재판부가 정하는 공판절차에 단지 수동적으로 응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준하는 지금도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일은 이미 진행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공판을 앞둔 지금에서야, 기영은 그 말이 단순히 흘려 넘기기에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하게 하시는 겁니까?
언제 왔는지 선배변호사인 강성모 변호사가 옆에 앉아 있었다. 그 말투에는 혼자 생각에 잠겨 인사조차 하지 않은 기영의 태도에 대한 은근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강 변호사는 준하와 함께 기소된 박형기의 변호인이었다.

―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법관출입문을 통하여 재판부가 입정했다. 재판장 곽형일 부장판사와 좌우 배석판사였다. 기영은 일어서서 낯익은 세 판사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등받이가 높은 판사석 중앙에 앉은 곽 판사의 안경에 반사된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셨다.

― 앉아주십시오.
기영은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공소사실의 인정여부는 피고인인 준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재판상 피고인의 고유한 권리이다. 이것은 변호인인 기영이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영은 애써 자위하며 가슴속 무력감과 조바심을 지워버리고 가방에서 준하에 대한 수사기록을 꺼냈다.

― 200×고합1279 피고인 김준하, 박형기.
강성모 변호사가 먼저 일어나 변호인석으로 갔고, 기영이 강 변호사를 따라 그 옆에 앉았다.

곽 판사 : 피고인 김준하.
감정이 절제된 사무적이고 조용한 음성.
김준하 : 예.
그에 못지않게 감정을 배제한 단호한 짧은 음성.
곽 판사 : 주민등록번호, 주거, 직업을 말해 주세요.

곽 판사의 인정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기영은 준하를 바라보았다. 기영의 눈길과 마주친 준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가벼운 웃음까지 보였다. 준하는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법정분위기에 압도당해 나타내는 두려움이나 초조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양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으고, 그러나 결코 비굴하지 앉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로 피고인석에 우뚝 서 있었다.

준하의 그 모습이 너무 당당해서, 그를 재판하기 위하여 검은 법복을 입고 높은 판사석에 앉아있는 세 판사나, 그의 범죄사실에 대한 공소유지를 위하여 검사석에 서있는 김용훈 검사의 모습이 오히려 더 위축되어 보였다. 그 어떤 두려움이나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이 마치 흔들리지 않는 거목처럼 보였다.

그랬다. 그는 항상 그랬다.

김준하.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기록공부상 19××. 매서운 추위가 휘몰아치던 어느 겨울날 새벽, 경상남도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 

유난히도 눈이 많았던 그해 겨울.
그날도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동네 초가지붕들과 마을을 둘러싼 산과 들판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이제 막 피어나는 아침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집 앞 개울 얼음구멍에서 고양이세수를 하고 꽁꽁 언 시린 손을 겨드랑이 밑에 넣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사립문 마당을 막 들어섰다.

   
 ▲ 사진제공 김청수 시인

 탕, 탕탕탕!

그때 갑자기 온 동네를 무너뜨릴 것만 같은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놀란 마을 개들이 덩달아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다. 이제 막 새벽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조용한 산골 마을이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처럼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골목을 따라 줄지어 선 사립문들이 일제히 열리면서 마을 사람들이 동구 밖 넓은 공터마당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소년도 뒤돌아서 발뒤꿈치 부분이 닳아 덜렁거리는 검정고무신을 다시 한 번 꿰차고 동구 밖 공터마당으로 달려갔다. 마당에는 이미 마을 사람들 예닐곱 명이 모여 마을로 이어지는 눈 덮인 신작로를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눈길을 따라 국방색 미군지프 한 대와 군용 트럭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마당은 어제 낮에 녹은 눈이 밤새 다시 얼어붙어 얼음판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당 한 귀퉁이에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 하나가 나뭇가지 수염을 달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마당으로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차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트럭꽁무니에서 기름 냄새를 품은 배기가스가 하얀 입김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차양 지붕을 걷은 지프조수석에서 흑인병사 하나가 일어나 총구를 하늘로 향하고 총을 치켜드는 모습이 보였다. 탕, 하는 굉음이 다시 한 번 마을을 뒤흔들었다.

― 올해도 또 오는구먼.
마을 사람 하나가 말했다. 소년은 차를 타고 오는 군인들이 매년 겨울 이맘때가 되면 노루를 사냥하러 오는 양코쟁이 미군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 년을 통 털어도 자동차라고는 거의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첩첩 두메산골이었다. 이런 산골 마을에 겨울이 되면 사냥을 하러 오는 미군 군용차가 가끔 나타나곤 했다.

고개 두 개를 넘어 이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 나가야 읍내가 나오고, 그 읍내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자동차가 마을에 나타난다는 것은 소년과 같은 동네 아이들에겐 경이로운 일이었다. 어느 새 몰려나온 동네 꼬마들도 호기심어린 눈을 반짝이며 부르릉거리며 다가오는 차를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차가 마당에 이르러 시동을 멈추었다. 지프운전석에는 하얀 얼굴 피부에 붉은 솜털 수염이 보송보송한 앳된 백인운전병이 국방색 모자를 눌러쓰고 앉아 있었다. 반면 그 옆 조수석에는 유난히도 피부가 새까만 흑인병사 한 명이 총구를 세워 들고 앉아 있었다. 아까 차에서 일어나 허공을 향해 총을 쏜 병사였다.

운전석 뒤에는 두툼한 목털점퍼를 입은 한국인 한 사람이 앉아 있고, 그 옆 좌석에 백인장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노랑머리에다 얼굴 면적의 삼분의 일은 족히 될 것 같은 우뚝 솟은 매부리 콧날이 인상적이었다. 국방색 점퍼 어깨에는 쇠똥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뒷좌석 목털점퍼 한국 사람이 먼저 내렸다. 땅딸막한 키에 배가 툭 튀어나와 마치 가분수 오뚝이처럼 보였다. 다소 크게 보이는 검정구두를 신고 구겨진 양복바지가 짧아 양말을 신은 발목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이어 백인운전병 옆에 앉아 있던 흑인병사가 붉은 잇몸을 드러내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내렸다. 전봇대처럼 키가 컸다. 새까만 얼굴 피부에 대비되는 하얀 이빨이 시린 겨울 아침햇살을 받아 금속 빛깔로 번쩍거렸다.

지프 뒤에 멈춘 트럭에 타고 있던 나머지 병사들도 알아듣지 못할 꼬부랑 소리를 지껄이며 우르르 차에서 내렸다. 소년은 난생 처음 보는 이국병사들의 생경한 모습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 사진제공 김청수 시인

 *

한국인 양복바지가 마을 사람들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은 양코들의 말을 통역하기 위하여 따라온 읍네 사람이었다. 양복바지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무슨 실랑이 같은 말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소년과 아이들의 관심은 낯선 이국병사들에게 가 있었다. 아이들은 먼 발치께에 올망졸망 모여서서 병사들이 제각각 킬킬거리는 모습을 두려움반호기심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차에서 제일 먼저 내린 흑인병사가 질겅대던 껌을 퉤, 하고 뱉고는 두툼한 군용파카 호주머니에서 건빵봉지 하나를 꺼냈다. 이빨로 봉지를 북 찢어 개봉한 흑인병사는 큼지막한 손바닥에 건빵을 수북하게 부어 볼이 볼록하도록 입에 털어 넣고 우둑우둑 씹기 시작했다.

흑인병사가 봉지를 아이들에게 흔들어 보이며 안에 든 건빵을 나눠 줄 것처럼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흑인병사에게 살금살금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몇 발자국 앞까지 바짝 다가갔을 때, 흑인병사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빨간 플라스틱 탄피 하나를 꺼내어 입술에 갖다 대고 삑, 하고 휘슬을 불었다. 귀청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아이들이 깜짝 놀라 후다닥 흩어졌다.

흑인병사가 붉은 잇몸을 드러내고 허리를 잡고 킬킬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다른 병사들도 모두 따라서 웃었다. 이번에는 흑인병사가 손바닥 위에 건빵을 수북하게 부어놓고 살살 흔들면서 아이들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아이들이 멈칫멈칫 하면서도 다시 살금살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때 흑인병사가 손바닥 위에 부어놓은 건빵을 아이들 발치께에 흩뿌렸다. 그 모습은 마치 닭 모이를 주는 것처럼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아이들이 모이를 쫒아 달려드는 병아리처럼 흩어진 건빵을 서로 먼저 줍기 위해 엉덩이를 치켜들고 땅바닥에 엉켜 붙어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뒤에 서있던 다른 흑인병사 하나가 껌 봉지 하나를 풀어 아이들을 향하여 흩뿌렸다. 아이들이 껌을 줍기 위해 서로 박치기를 하며 얼어붙은 땅바닥에 뒤엉켜들었다. 다른 병사들은 아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킬킬거리며 웃었다.

― 야! 이 빙시이(병신) 새끼들아. 너거가 껄배이(걸인) 새끼들이가.

병사들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뚫고 분노로 가득 찬 날카로운 음성이 차가운 새벽하늘을 찢으면서 달려 왔다. 건빵과 껌을 줍고 있는 아이들의 틈에 끼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어른들의 얘기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저만치 떨어져 서있던 소년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장이었다. 눈 쌓인 골목 돌담길 굽이를 돌아 한 손에 대막대기를 든 대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잔뜩 골난 표정에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대장을 본 아이들이 일순 동작을 멈추고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 야, 이 빙시이 새끼들아. 너거가 무슨 껄배이(걸인) 새끼들이가. 양코놈들이 떤지주는(던져주는) 간빵이나 주우 먹구로!

대장이 땅바닥에서 일어선 아이들의 배를 대막대기 끝으로 쿡쿡 찌르며 소리쳤다. 대장은 아이들이 미처 줍지 못해 땅바닥에 널려 있는 껌이며 건빵을 검정고무신 신발로 쓱쓱 문질러버렸다. 대장이 대막대기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고 건빵을 흩뿌린 흑인병사 앞으로 또박또박 걸어갔다.

― 이리 도고.

대장이 대막대기를 왼손으로 바꿔쥐고 오른손바닥을 불쑥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대장의 키는 흑인병사의 허리춤에 겨우 닿을까 말까했다. 흑인병사가 양손바닥을 옆으로 쩍 벌리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장을 내려다보았다.

대장이 고개를 발딱 젖히고 흑인병사의 피부색만큼이나 시꺼멓게 때가 낀 손을 아래위로 흔들며 한층 더 볼멘소리로 당돌하게 소리쳤다.

― 간빵 이인도고 마!

화가 난 흑인병사가 건방진 대장을 그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긴장감으로 소년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 헤이, 베이비!

뒤쪽에 서있던 다른 흑인병사 하나가 소리치며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곱슬머리 턱수염에 얼굴마저 험상 굳었다. 흑인병사가 눈을 부라리며 어깨에 멘 총을 내려 대장의 이마에다 총구를 갖다 대고 철컥, 노리쇠를 당겼다.

   
 ▲ 사진제공 김청수 시인

*

소년은 가슴이 철렁했다. 덜컥 숨이 막히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장은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대장은 오히려 쳇,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발딱 젖혀 흑인병사를 빤히 올려다보고는 이마에 겨눈 총구를 왼손에 든 대막대기로 탁 쳐서 밀쳐내며 외쳤다.

― 치아라 고마. 그란다고 누가 겁낼 줄 아나.

때 아닌 실랑이에 양복바지와 얘기를 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도 모두 대장과 흑인병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장난치지 말고 간빵이나 이인도고.

대장이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은 채로 볼멘소리로 재촉했다. 사태를 짐작한 양복바지가 나서서 꼬부랑말로 흑인병사에게 손짓을 섞어가며 얘기하자 흑인병사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흑인병사가 웃으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아니면 대견스럽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파카호주머니에서 건빵봉지 하나를 꺼내어 대장에게 건넸다. 그러나 대장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 이거 말고, 너거 차에 있는 거 통째로 달란 말이다.

대장이 대막대기로 트럭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흑인병사가 다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손바닥을 옆으로 쩍 벌리며 입술을 쑥 내밀었다. 양복바지가 그때까지도 지프에서 내리지 않고 있던 쇠똥계급장을 단 매부리코 백인장교에게 걸어가 꼬부랑말로 한참 얘기를 했다.

백인장교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양복바지가 트럭으로 가서 그때까지도 여전히 짐칸에 타고 있던 병사 하나로부터 커다란 종이상자 하나를 내려 받았다.

― 옜다. 이 녀석아.

양복바지가 웃음 띤 어조로 말하면서 두 손으로 든 상자를 대장의 품에 안겨주었다. 상자는 대장이 두 팔을 벌려 안기에도 벅차 보였다. 상자의 부피에 대장의 머리가 모두 가려지고 말았다.

상자를 받아 안은 대장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 게걸음으로 여전히 두려운 눈빛으로 숨을 죽이고 있던 아이들 앞으로 뒤뚱거리며 다가갔다. 대장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리쳤다.

― 모두 일렬로! 차렷!

구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나란히 줄지어 섰다. 대장이 사열을 하듯 아이들을 한번 죽 둘러보고는 상자 속에서 건빵봉지 하나씩을 꺼내 골고루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장은 전쟁노획물을 부하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사려 깊고 늠름한 지휘관이었다.
 

   
 ▲ 사진제공 김청수 시인

 *

그랬다. 동네 아이들에게 대장은 또래 아이들의 단순한 골목대장이 아니었다. 대장은 그보다 더 큰 경외의 대상이었다. 소년과 동네 아이들이 다니는 시골 초등학교는 마을에서 십 여리나 떨어져 있는 면소재지에 있었다. 소년과 아이들이 학교를 오가려면 도중에 몇 개의 다른 마을을 거쳐 지나야만 했다.

그런 마을 중에는 으레 텃세를 부려 다른 동네 아이들을 괴롭히는 고만고만한 왈패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런 왈패들도 소년의 동네 아이들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어쩌다 동네 아이들 중에서 혼자 그 마을 앞을 지나가다 봉변을 당하기라도 하면 대장의 대막대기가 그 마을에서 춤을 추었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대장은 인근 마을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이름이 나 있었다. 대장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대장이 항상 들고 다니는 대막대기는 동네 아이들을 지휘하는 지휘봉인 동시에 보호봉의 역할도 했다. 대막대기는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대장의 상징이었다.

아이들에게 건빵봉지 하나씩을 골고루 나눠준 대장이 줄을 서지도 않고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는 소년을 보았다. 상자 안에는 건빵봉지가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대장이 마지막 건빵봉지를 들고 와 소년에게 내밀었다.

비록 흑인병사가 흩뿌린 건빵과 껌을 줍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땅바닥에 뒤엉켜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용케 멀리 튕겨져 나온 껌 하나를 슬며시 주워 손에 쥐고 있던 소년은 부끄러웠다.

대장의 말대로 정말 거지같은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속으로는 대장이 내미는 건빵을 먹고 싶었지만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그때까지도 손바닥에 오므려 쥐고 있던 껌을 슬며시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 연재 제18회 <그해 겨울 2>은 2019. 2. 18.(월) 에 게재됩니다.
― 《다음 검색창》에서 『살인 교향곡』을 검색하시면, 지금까지 연재된 모든 연재물(연재 제1회부터 제18회까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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