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15회 <추격>
Symphony in C minor ‘Fate’

추격

토요일
07시 30분

여자가 운전하는 박형기의 승용차가 김해공항 출발게이트 앞 공항도로에 멈췄다. 박형기가 조수석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여행용 캐리어를 꺼내어 혼자 게이트로 들어갔다. 여자는 다시 차를 출발시켜 공항을 빠져나왔다. 강변도로를 달려 부산으로 향하던 여자가 버스승강장 옆 갓길에 주차를 하고 핸드백을 들고 강둑으로 올라갔다. 여자가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 여덟시 비행기로 김포공항으로 갔어요. 오후 한시 삼십분 LA행 대한항공 여객기를 탈겁니다.
(― ………….)
― 예, 비행기 안에서 잡아야 합니다. 오후 한시에 정해현이 돈을 입금하기로 했어요. 그 전에 체포된 사실이 알려지면 돈을 입금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 ………….)

*

08시 20분

박경일은 출근하기 위해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호주머니에 든 휴대전화가 울렸다. 홍익문화연구소에 다녀온 다음날부터 박형기를 전담하여 감시하고 있던 홍 형사였다.
― 박형기가 드디어 움직인 것 같습니다.
― 그래……?

순간 박경일의 머릿속에 김용훈 검사가 했던 말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최수환과 함께 홍익문화연구소에서 김준하와 박형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김용훈 검사가 전화를 하여 검찰청 자기 방으로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

― 특히 박형기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분명 뭔가 감추고 있었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압수수색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차하면 바로 잡아들이겠습니다.
최수환이 홍익문화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최수환은 흥분해 있었다.

― 아닙니다. 그동안 김준하와 정해현, 최경호, 박형기에 대하여 많은 자료를 찾아 검토해 봤습니다. 지금 압수수색을 하더라도 증거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김용훈 검사가 안경을 벗어들고 핏발 선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김용훈 검사의 책상에는 김준하의 과거 수사기록 등 자료가 몇 겹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책상 옆 바닥에도 김준하와 고 홍한일 박사의 저서로 보이는 책이 20권도 더 넘게 쌓여 있었다. 김용훈 검사는 그 많은 자료와 책까지 고시공부 하듯 빠짐없이 살펴본 것 같았다.

― 그 사이에 도망가 버리면요?
최수환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시 말했다.
― 바로 그겁니다. 김준하는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박형기는 반드시 도주하려고 움직일 겁니다. 그때를 포착해야 합니다. 그때 박형기를 잡으면 순순히 자백할 겁니다. 내일부터 당장 박형기를 전담하여 감시할 사람을 붙여주십시오. 철저하게 감시하되 박형기가 어떤 일을 하던 그대로 놔두어야 합니다.

김용훈 검사는 그 많은 자료를 통하여 프로파일러처럼 각자의 특성과 심리상태까지도 모두 분석한 것 같았다. 김용훈 검사의 지시에 따라 그동안 박형기를 전담하여 감시하고 있던 홍 형사가 전화를 해 온 것이다.

― 어젯밤 열시 쯤 박형기의 집에 가보았는데 없었습니다. 새벽에도 없었습니다. 박형기가 아침에 출근했는지 알아보려고 지금 홍익문화연구소로 가는 길입니다.
― 그래, 일단 알았어. 출근하지 않았다면 박형기가 갈만한 곳은 어디라도 찾아봐. 꼭 찾아야 해. 

*

8시 40분

출근하기 위해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차에 올라 막 시동을 건 정시영의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정시영은 차를 출발시키려다가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폴더를 열었다.

박형기, 오늘 13시 30분 김포공항 출발 LA행 대한항공 탑승 예정.
비행기에서 체포할 것.

박형기? 순간 정시영은 화들짝 놀랐다. 박형기는 최경호, 김준하와 더불어 김용훈 검사가 준 사건기록 속에 나오는 인물이다. 누가, 왜 이런 문자를 보냈을까? 그렇다. 이 문자메시지의 주인공은 지난번 음성메시지의 주인공과 같은 사람이다. 비행기에서 체포하라고? 박형기가 미국으로 도주하고 있다. 문자는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13시 30분 LA행 대한항공, 정시영은 시계를 보았다. 8시 40분, 아직 시간은 있다. LA행 항공기가 이륙하기 전에 박형기를 잡아야 한다. 정시영은 곧바로 박경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

같은 시간, 08시 40분

― 김포공항? LA행? 확실해?
― 그래. 방금 문자를 받았어. 지난번 음성메시지의 주인공이 보냈어.
차안에서 정시영의 전화를 받은 박경일은 생각했다. LA행이라면? 김용훈 검사의 말대로 박형기가 드디어 움직였다. 박형기가 미국으로 도주하고 있다. 잡아야 한다.

홍 형사의 말처럼 어젯밤 10시에 박형기가 집에 없었다면? 그는 어젯밤 서울로 출발했거나 지금 이 시간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13시 30분 이전에 김포공항에 먼저 도착하여 개찰구나 비행기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해야 한다. 박경일은 홍 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 홍 형사, 홍익문화연구소에는 갈 필요 없어. 지금 즉시 김해공항에 전화해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과 좌석을 알아봐 줘.
― 갑자기 공항은 왜요?
― 군말 말고. 설명할 시간 없어. 급해. 곧바로 알아보고 전화 줘.

박경일은 다시 경찰서로 전화를 했다. 일찍 출근해 있던 이 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 이 형사, 지금 즉시 김포공항에 연락해 오늘 13시 30분 LA행 대한항공 탑승객 명단에 박형기가 있는지 알아봐.

― 김포공항 비행기 좌석은 오후 한시 항공편 밖에 없습니다.
홍 형사가 다시 전화를 해 왔다. 오후 한시라면? 너무 늦다.
― 예, 맞습니다. 13시 30분 대한항공 탑승객 명단에 박형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 형사가 연락을 해왔다. 박형기가 도주하고 있다. 체포해야 한다. 13시 30분이라면……?
― 최수환에게 곧바로 연락해.

*

08시 50분

박경일이 서둘러 차를 운전하여 경찰서로 들어서고 있을 때, 이미 정문 앞에 순찰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던 최수환이 열린 차창으로 소리쳤다.
―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타.
순찰차 곁에 이 형사가 서 있었다. 박경일은 시동도 끄지 않고 차에서 내려 이 형사에게 제 차를 맡기고는 순찰차에 올랐다. 최수환이 요란스럽게 사이렌을 울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 시간 내에 먼저 도착할 수 있을까? 안 될 것 같으면 서울에 협조 요청하자.
― 생고생은 우리가 다 하고 공은 그놈들이 차지하라고. 잡을 수 있어. 군말 말고 한숨 푹 자고 있어.
성미 급한 최수환이 적색 신호등을 무시하고 사이렌을 울리며 차를 몰아가며 소리쳤다.

*

12시 정각

김포공항 국제청사 안 어느 커피숍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는 박형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 오억 원이 입금되었어.
여자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 그래, 알았어.
박형기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전화를 끊은 박형기는 커피숍을 나와 대합실 내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그의 휴대전화에 정해현과의 통화기록을 남기지 않아야 했다. 동전을 넣고 정해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정해현이 그에게 특별히 가르쳐 준 비밀전화번호였다.
― 방금 선금은 입금했어.

박형기의 전화인 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정해현의 갈라진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먼저 나왔다. 박형기는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손바닥으로 입과 송화기를 감싸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 김인환 살해범은 홍익문화연구소 소장 김준하입니다. 범행에 사용된 칼은 홍익문화연구소 단군상 아래 연못 속에 있습니다. 한 시간 후, 나머지 돈을 입금하시기 바랍니다.

박형기는 공중전화 부스를 나와 다시 커피숍으로 갔다. 대합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혹시라도 그를 추적하는 경찰의 눈에 띌 수도 있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LA행 항공기가 이륙하기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다. 새벽에 호텔을 나오면서부터 특별히 조심했지만, 경찰이 그의 출국시도를 포착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

13시 정각

박형기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 정말 또 오억 원이 입금되었어.
여자의 목소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 알았어. LA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박형기가 커피숍을 나와 개찰구로 걸어갔다. 이미 개찰은 시작되어 있었다.

*

13시 15분

박형기는 트랩을 올라 비행기에 탑승했다. 캐리어를 선반에 넣고 통로 쪽 지정좌석에 앉은 박형기는 그때서야 긴장을 풀고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이제 15분만 지나면 그는 어두웠던 과거를 뒤로 한 채 신세계로 날아갈 것이다. 이륙준비를 하는 기체의 진동음이 귓속으로 상쾌하게 파고들었다.

그때 좌측 통로 쪽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감고 있는 눈꺼풀 위에 얼핏 누군가의 시선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눈을 떴다. 푸른 유니폼을 입은 남자승무원 뒤에서 점퍼를 입은 젊은 남자 두 사람이 그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

13시 20분

― 안됩니다. 개찰은 이미 끝났습니다.
개찰구 앞에서 공항직원이 말했다.
― 비행기 안에 살인용의자가 타고 있다니까. 체포해야 해.
최수환이 고함치듯 말했다.
― 그래도 안 됩니다. 지금 들어가 봤자 이미 비행기문이 닫혔을 시간입니다.

― 지금 바로 비행기에 연락이 안 됩니까? 기장에게 전화로 연락하면 되잖아요.
박경일도 큰소리로 직원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 안 됩니다. 이륙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늦출 수는 없습니다.
― 와! 이거 정말 돌아버리겠네. 야! 비행기에 살인범이 타고 있어. 아니, 아니, 테러범이 타고 있어. 기장에게 바로 연락해 비행기 멈추라고 해.
성미 급한 최수환이 노발대발 직원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 살인범에다 테러범에다, 하 참, 아무리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개찰구 옆에 서서 처음부터 공항직원과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늙수그레한 점퍼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입가에 웃음을 띠고 반말조로 말했다. 최수환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고 머리도 거의 반백이었다.

― 당신은 뭐요? 에이, 씨~! 비켜요.
순간 최수환이 공항직원을 옆으로 밀치며 막무가내로 개찰구 안으로 뛰어들려 했다.
― 어허! 이 사람이 왜 이래?
그러나 점퍼남자가 재빨리 팔을 뻗어 최수환의 어깨를 낚아채며 훈계조로 말했다.

― 당신 뭐야? 이것 놔!
최수환이 어깨를 튕기면서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꽤 덩치가 크고 완력이 있는 최수환인데도 나이든 점퍼남자의 아귀손은 더 억셌다.
― 뭡니까?
그때 공항경찰 두 사람이 달려와 막무가내로 최수환의 양팔을 하나씩 잡고 뒤로 제켜 수갑을 채우려고 했다.

―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경찰입니다.
박경일이 당황하여 공항경찰에게 신분증을 내보이며 말했다.
― 지금 뛰어들어 가봤자 어느 비행기에 타고 있는지 알기나 해? 잠깐 기다려 봐.
나이든 점퍼남자가 반말로 최수환을 달래듯 말했다.
― 예?
박경일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점퍼남자를 바라보았다.

― 저기 나오네.
점퍼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개찰구 안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박경일과 최수환이 동시에 개찰구 안쪽을 바라보았다. 점퍼를 입은 젊은 두 남자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박형기의 팔을 양쪽에서 호위하듯 잡고 나오고 있었다.
― 서울경찰청 폭수대 남 과장이야.
점퍼남자가 최수환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말했다.

― 예?
박경일과 최수환이 동시에 말했다.
― 부산 해운대경찰서 박경일, 최수환 경위 맞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제 발로 걸어들어 오는 놈 잡으면 될 일을 뭘 그렇게 불알에 요령소리 나도록 목숨 걸고 쫓아다니나. 부산지검 김용훈 검사가 아침에 전화를 했어. 비행기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박형기를 체포해서 두 사람에게 바로 신병 인계하라고.

― 예?
두 사람이 어안이 벙벙해져 다시 남 과장을 바라보았다.
― 그렇게 무리하다가 진짜 놓쳐버렸으면 어떡할 뻔 했어.
남 과장이 질책하듯 두 사람에게 다시 말했다.
― 처음부터 뻔히 보고 있었으면서……, 에이, 씨~. 진작 말할 일이지……!
박경일이 골난 목소리로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 말할 틈이나 줬어?
남 과장이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박경일에게 툭 쏘듯 핀잔을 줬다. 그때 박형기와 두 젊은 남자가 개찰구로 나왔다. 최수환이 박형기 앞에 서서 말했다.
― 박형기 씨, 당신을 김인환의 살인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 아, 미란다아가씨 소개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해줬습니다.
박형기의 오른팔을 잡고 있던 젊은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 강 형사, 부산 해운대경찰서 박경일, 최수환 경위야. 신병 인계해.
― 예. 반장님.
박형기의 왼팔을 잡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 반장님이라고요? 조금 전엔 과장님……?
박경일이 남 과장을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으로 말했다.

― 과장보다 더 높은 왕반장님이시니까 억울해 할 것 없습니다. 하하, 자, 우리는 먼저 갑니다. 또 놓치지 말고 잘 모시고 가십시오.
강 형사가 웃으면서 박형기의 왼팔을 박경일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 너무 골내지 말고 잘 가라고…….
남 반장이 최수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두 형사와 함께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 아, 씨팔~. 이게 뭐야. 쫄다구에게 다 차이고, 서울까지 와서 완전히 쪽 다 팔았잖아.
박형기의 팔을 잡고 대합실을 걸어 나오며 최수환이 얼굴이 벌개져서 말했다.
― 야, 그래도 놓치지 않은 것이 어디야. 진짜 놓쳐버렸으면 어쩔 뻔 했어.
박경일과 최수환이 박형기의 신병을 인수하여 나올 때 공항대합실에 설치된 TV화면에 긴급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정해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 오늘 아침, 저는 김인환 피살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 하나를 제보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김인환 씨 살해범이 홍익문화연구소 김준하 소장이고, 그가 범행에 사용한 칼이 그 연구소 단군상 아래 연못에 은닉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자회견이 있기 방금 전, 저는 경찰로부터 살인범 김준하를 긴급체포하였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제보자가 말한 홍익문화연구소 단군상 아래 연못에서 범행에 사용된 칼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야당후보에게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김인환 피살 사건에 저와 최경호 보좌관이 연루되어 있다는 흑색선전을 즉각 중단하여 주십시오. 계속 흑색선전을 일삼는 경우, 저는 선거법위반으로 즉시 고소함은 물론 할 수 있는 모든 법적조치를 다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 저는 이렇게 엎드려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김인환 씨를 살해한 진범이 체포되었습니다. 부디 이제부터는 야당후보의 흑색선전에 현혹되지 마시고 희망찬 우리 지역구의 발전을 위한 봉사자로서 누가 가장 적임자인지 올바른 선택을 하여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정해현이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는 화면 아래에 ‘김인환 당선자 살해범 검거, 진범은 홍익문화연구소 김준하 소장’이라는 자막이 떴다. 잠시 멈춰 서서 정해현의 기자회견을 보고 있던 최수환이 박형기에게 화풀이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 박형기 씨, 시팔 저 새끼가 당신에게 시킨 일이지. 그렇지?

*

긴급체포 후 48시간 내에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했다. 박경일과 최수환은 홍익문화연구소에서 검거된 김준하를 박형기와 대질시켜 이틀 동안 밤새워 조사했다. 그러나 김준하는 인정신문에 응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취조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미리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하고는 일체의 신문에 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설득하고 윽박질러도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커다란 바위를 앞에 놓고 시름하는 형국이었다.

반면에 박형기는 잇속에 약삭빠른 탓인지, 아니면 미리 체념을 한 것인지 의외로 순순히 자백했다. 김용훈 검사의 예측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형기는 김준하와의 공범관계는 극구 부인했다. 범행이 있은 날 밤, 그는 집으로 찾아온 김준하의 차를 타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인현장에 갔을 뿐이며, 김준하의 살인에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국회의원 당선축하 인사를 하러 간다는 김준하의 말을 믿고 살인현장에 우연히 따라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단지 당선축하 박수를 치고 있었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애원했다. 김준하가 살인을 할 것이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책상에 이마를 박으며 자신은 무고하다고 누누이 강변했다.

최경호와의 공범관계를 실토하라는 최수환의 집요한 추궁에도 박형기는 끝까지 부인했다. 김준하 단독범행이고 최경호는 관계없다고 한사코 부인했다. 최경호의 머리카락이 어떻게 피살자의 목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박형기와 최경호의 공범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다른 증거는 없었다.

김용훈 검사는 김준하를 살인죄로, 박형기를 살인방조죄로 범죄사실을 특정하여 구속영장 신청을 했다. 박형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증거가 새로 나타나면 김준하와 살인공범으로 기소할 예정이라고 했다. 최경호나 박형기에 대한 정해현의 지시는 없었는지가 앞으로 더 중요한 수사쟁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준하와 박형기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잠시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어온 박경일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 2019. 1. 28.(월) 연재 제16회 <운명의 시계바늘>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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