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14회 <검은 거래>
Symphony in C minor ‘Fate’

검은 거래

이제 법정선거운동 기간도 이미 반을 넘어섰다. 그러나 정해현은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김인환이 없어져 버린 재선거에서 그의 당선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최경호의 긴급체포라는 돌발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체 여론조사에서 그는 다른 후보를 압도적인 포인트로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데 법정선거운동 기간을 바로 코앞에 둔 시점에서 최경호의 긴급체포라는 악재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선거운동이 막 시작된 직후의 자체 여론조사는 오히려 오차범위 내에서 그가 제1야당 후보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돌발 악재에도 불구하고 최경호가 석방됨으로서 판세는 곧 호전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정해현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다. 법정선거운동 기간의 반을 넘어선 현재 자체 여론조사 결과 제1야당 후보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져 있었다. 선거초반 오차범위 내의 열세에서 무려 10% 포인트나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여론은 이미 김인환의 피살에 정해현이 개입된 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이것은 야당후보가 줄기차게 제기한 김인환의 피살을 호재로 삼은 흑색선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국면을 반전시킬 마땅한 대책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김인환을 살해한 진범이 잡힌다면 또 몰라도. 이런 상태에서 선거에서 이길 방법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런데 한줄기 서광이 비쳤다. 오늘 오후에 있었던 재래시장 방문 유세에서 상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한 표를 호소하는 그의 손을 잡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세모꼴 작은 뱀눈, 4년 전, 그가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을 도왔던 얼굴이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인 대학시절에 그의 음모에 가담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4년 전 당선되고 난 후 정해현은 그 얼굴을 버렸다. 배신자는 또 다시 배신하는 법, 곁에 오래두면 반드시 배신할 인간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최경호도 버릴 참이었다. 지금 그가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최경호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야당후보의 주장과 같이 최경호가 실제로 김인환을 살해했을 수도 있었다. 최경호를 곁에 두었다가는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다. 이제는 4년 전 그 얼굴을 버렸던 것처럼 최경호도 버릴 것이다.

그런데 버렸던 그 세모꼴 얼굴이 유권자를 가장하고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세모가 딱지처럼 접은 작은 메모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유세를 하다말고 시장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펼쳐본 메모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인환 살인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있음.
오늘 저녁 8시 광안리에 있는 일식집 ‘동경’에서 기다리겠음.
예약자 이름은 최경호, 반드시 혼자 나올 것.

*

형사가 홍익문화연구소를 다녀간 다음날부터 박형기는 서둘러야 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내심 그는 조바심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그동안 책상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여권과 미국 비자부터 먼저 챙겨보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급매물로 부동산중개업소에 내놓았다. 다행히 일주일 전에 매매계약이 체결되어 계약금을 받은 뒤였다. 중도금 없이 계약일로부터 15일 후에 받기로 한 매매잔대금은 새로 사귄 여자가 소유권이전등기 서류와 교환하기로 위임장을 써주었다.

분명 살인자는 김준하이다. 마린시티호텔 804호실, 그 충격적인 살인 현장에서 그가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최경호의 머리카락이 어떻게 김인환의 목에서 나오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수사의 손길이 최경호에게로 향하고 있어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체포된 최경호가 석방되었고, 이와 동시에 방향을 돌린 수사의 손길은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때 호텔에서 김준하가 내미는 칼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던 것이 치명적인 불찰이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더구나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김준하가 카메라로 촬영까지 하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김준하가 그때 찍은 사진을 경찰에 제출하면 그는 꼼짝없이 살인누명을 덮어써야 할 것이다.

최경호가 석방되었다고 하여 물론 그것이 끝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 화살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김준하의 마지막 화살은 분명 정해현을 향할 것이다. 세 사람은 이미 김준하가 정교하게 쳐놓은 복수의 그물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일,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한몫 단단히 챙겨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동안 은밀하게 미국으로 출국할 준비를 했고, 내일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제일 중요한 일을 해야 했다.

금요일, 당직근무를 자청했던 박형기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어두워지자 사무실을 비워두고 집으로 왔다. 마당 오른쪽 모퉁이에 서있는 목련나무는 무성하게 자란 푸른 잎사귀를 우산처럼 펼쳐 드리우고 있었다.

트레이닝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박형기는 마당으로 나와 삽으로 나무 아래 한 지점을 파기 시작했다. 30cm 정도 구덩이를 팠을 때 검은 비닐봉지를 테이프로 감아 밀봉한 물건 하나가 나왔다. 살인이 있었던 그날 밤, 김준하로부터 받은 칼을 비닐봉지에 넣어 묻어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박형기는 면장갑을 벗고 비닐장갑을 꼈다. 테이프로 감긴 비닐봉지를 가위로 잘랐다. 피가 말라붙은 칼은 수건에 엉켜 붙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수건을 펼치고 디지털카메라로 칼을 촬영했다. 칼을 다시 수건으로 감싸 새 비닐봉지에 넣고 테이프로 감아 단단히 밀봉했다. 그것을 카메라와 함께 작은 손가방에 넣었다.

박형기는 양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미리 꾸려 놓은 여행용 캐리어와 손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캐리어는 공항에서 따로 화물로 부칠 필요가 없이 손에 들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는 작은 것이었다. 대문 앞 골목에 세워둔 차 트렁크에 캐리어와 손가방을 실었다. 운전석에 오른 박형기는 차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박형기가 도착한 곳은 홍익문화연구소였다. 사무실은 저녁에 나갈 때 소등을 했기 때문에 깜깜했다. 단군상이 있는 인공연못 둘레에 세워진 키 작은 보안등이 연못 주위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트렁크에 든 손가방에서 칼을 넣고 밀봉한 비닐봉지를 꺼냈다. 연못가로 걸어가 손에 든 비닐봉지를 단군상 아래 물속에 던져 넣었다. 다시 차에 오른 박형기는 광안리로 차를 몰았다.

*

정해현은 다른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택시를 타고 광안리에 있는 일식집 ‘동경’으로 가고 있었다. 물론 예약자는 최경호의 이름을 빙자했을 것이다. 정해현이 음식점으로 들어서 예약자 최경호를 찾자 여종업원이 구석진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방안에 낮에 보았던 세모꼴 얼굴이 음식상 앞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박형기였다.

―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정해현이 박형기와 악수를 하는 대신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 그래 중요한 정보라는 게 뭐야?
여종업원이 음식을 세팅해 놓고 나가자마자 정해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그것보다도 이번 선거에서 많이 고전하고 있다고요.
박형기가 말했다. 입가에 빈정대는 웃음이 묻어났다.

― 누가 그래? 나는 지지 않아.
정해현이 날카로운 눈으로 박형기를 째려보며 말했다.
― 그렇다면 내가 가진 정보는 소용이 없겠군요. 필요 없는 정보를 돈을 주고 사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럼 나는 가보겠습니다.
박형기가 일어섰다. 그는 정말 가버릴 듯이 문을 열고 있었다.

― 잠깐 앉아봐. 김인환 살인 사건에 대한 정보라고?
― 내가 김인환을 살해한 진범을 알고 있다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 그걸 어떻게 믿어?
― 먼저 이것을 한 번 보시죠?
박형기가 손가방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꺼내어 전원을 켜고 창을 열었다. 화면에는 피 묻은 등산용 칼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 이게 뭔가?
― 보시다시피 피 묻은 칼을 찍은 사진이지요.
― 이것이 뭐 어떻다는 건가?
― 그 칼이 김인환의 살해에 사용된 범행도구라면 효용가치가 있겠습니까? 그 칼로 김인환을 살해한 진범을 알고 있다면 더 큰 효용가치가 있겠죠.

― 그래? 물론 공짜는 아닐 테고, 조건은 뭔가?
― 십억, 내일 정오까지 현금으로 내가 지정하는 계좌에 입금시켜 주십시오. 입금 즉시 내가 가진 정보와 증거를 모두 주겠습니다.
― 뭐라고? 너 지금 누굴 놀리나.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는 사진 하나를 보고 십억을 내라고? 그리고 당장 어디서 그 많은 현금을 구해.
― 금배지 값이 겨우 십억이라면 싸지 않습니까. 비자금으로 쌓아둔 현금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 뭐라고? 이런 사기극 나한텐 안 통해. 지금 당장 경찰을 불러 널 잡아가게 할 수도 있어.
― 그럼 어디 한번 불러보시죠. 경찰에 가는 순간 나는 이 사진 속의 칼이 최경호에게서 나왔고, 최경호가 당신의 지시를 받아 김인환을 살해했다고 진술할 겁니다. 물론 지금 내 제안에 응하지 않는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그보다 언론에 먼저 알려야겠지요.

― 이 자식! 너,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 내 말이 협박으로 들리십니까? 나는 도우려고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이 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물론 김인환을 살해한 진범도 알고 있고요.
― 정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 믿고 안 믿고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내일 정오까지 돈을 입금시키면 나는 이 칼이 어디에 있고, 또 김인환을 살해한 진범이 누군지 알려주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최경호의 혐의도 완전히 벗겨지고, 선거도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내일 정오까지입니다. 이것은 입금계좌입니다. 반드시 현금으로 입금해야 합니다.

― 잠깐, 이렇게 하도록 하지. 내일 정오까지 선금 오억을 입금시키고, 네 말이 사실이라고 확인되면 나머지 오억을 입금시키겠어. 그래야 서로 믿을 수 있는 흥정이 되지 않겠나?

― 좋습니다. 내일 정오 선금 입금이 확인되는 즉시 이 칼의 소재지와 진범의 정체를 전화로 알려주겠습니다.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겠죠. 내일은 토요일, 오후 한시 은행마감 직전까지 나머지 오억을 같은 계좌로 입금하십시오. 만약 약속을 어기면 그 칼은 최경호에게서 나올 겁니다. 그러면 최경호는 김인환의 살인범이 될 것이고, 당신은 그 살인을 지시한 공범이 되겠지요. 그 이후의 결과는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

박형기는 음식점을 나와 교통이 혼잡한 서면 쪽으로 차를 몰았다. 수시로 백미러로 뒤를 관찰하면서 뒤따르는 차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형사가 사무실로 찾아왔던 다음날부터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때부터 생긴 불안과 초조였다.

서면에서 사상터미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포에서 강변도로를 타고 하단을 지나 광복동으로 갈 참이었다. 일부러 차를 빙빙 돌리는 것은 혹시라도 있을 미행을 의식해서였다. 하단으로 향하는 강변도로로 접어들자 차량 통행이 뜸해졌다. 이런 한적한 도로라면 미행하는 차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차는 없었다.

박형기는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손바닥도 흥건히 젖어 있었다. 대학 때 정해현이 주는 돈을 받고 그 음모에 가담한 때부터 정해현은 보스였고, 그는 하인과 진배없는 속칭 똘마니였다. 특히 4년 전,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해현은 단순한 주종관계를 넘어 가히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관계가 이렇게 역전될 줄이야. 정해현과 흥정을 하면서 일부러 하대를 하듯이 ‘나’라고 하고, ‘의원님’이라는 존칭 대신 ‘당신’이라고 말할 때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통쾌했다. 4년 전, 버림받은 것에 대한 복수를 이렇게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했던 말일까? 그날 호텔에서 “그 칼 잘 보관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라고 하던 김준하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내일 돈만 입금되면 앞으로 두 사람을 볼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그는 이 땅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박형기는 광복동 프린스호텔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바로 23층으로 올라갔다. 2306호실 앞에 멈추고 세 번 노크를 했다.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객실 문이 안에서 열렸다. 박형기의 손에는 이미 바지에서 빼어든 가죽벨트가 들려 있었다. 여자는 회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 어떻게 됐어요?

여자가 첫마디로 물었다. 박형기는 대답 대신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워 거칠게 침대로 몰아붙였다. 여자가 베드에 두 손을 짚고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박형기가 손에 든 벨트로 여자의 등을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 아아! 더 세게, 더 세게요.
여자가 말하면서 티셔츠와 브래지어를 벗었다.

― 잘 되었어요? 그래요?
여자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다시 물었다.
― 그럼, 내가 누군데.
짝, 짝, 박형기의 가죽벨트가 여자의 등에 다시 작열했다. 아, 아,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박형기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 내일 정오에 오억 원이 먼저 입금될 거야.
― 정말요? 아아, 좋아요. 더 세게, 더 세게 때려줘요.

여자가 청바지와 팬티를 벗고 완전나신으로 베드에 배를 깔고 엎드리며 말했다. 박형기가 여자의 등허리에 채찍처럼 벨트를 휘둘렀다. 아아, 여자가 신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짝, 짝, 내려치는 벨트소리에 이어지는 아, 아, 비명소리, 드디어 여자의 등에서 살갗이 터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박형기가 벨트를 던지고 서둘러 옷을 벗었다. 완전나신이 된 박형기가 침대로 올라가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 여자의 등에서 흐르는 피를 혀로 핥기 시작했다. 박형기가 입술에 피를 묻히고 말했다.
― 사랑해. 이제 너 없이는 살수 없어.
― 나도 그래요. 아아, 나도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여자가 말하면서 일어나 박형기를 반듯하게 뉘었다. 그새 박형기의 페니스는 단단하게 팽창해 있었다. 여자가 무릎을 접고 박형기의 골반에 걸터앉은 자세로 오른손으로 페니스를 잡아 질 속에 삽입했다. 여자가 엉덩이를 오르내리며 상하운동을 시작했다. 박형기도 페니스를 아래위로 움직여 여자의 동작에 보조를 맞추며 말했다.

― 그리고 한시에 다시 오억 원이 입금될 거야.
― 정말요? 정말이죠? 그럼 모두 십억!
여자의 상하운동이 점점 빨라지고 격렬해졌다.
― 그래, 네 계좌로 입금될 거야. 내일 미리 은행에 가 있다가 돈이 입금된 것을 확인하는 즉시 바로 내게 알려 줘야해.
― 그럴게요. 그럴게요. 아아, 너무 좋아요.

여자의 상하운동이 달리는 자동차엔진의 피스톤처럼 더욱 빨라졌다. 박형기가 두 손으로 여자의 허벅지를 잡고 바짝 끌어당겨 페니스를 더욱 깊숙이 삽입시키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너는 내 거야. 내 여자야. 만약 날 떠나면 죽여 버릴 거야.
― 그래요. 난 당신 거예요. 아아, 좋아요. 너무 좋아요.

여자의 운동이 더더욱 빨라지고 허리가 뒤쪽으로 활처럼 휘어졌다. 아아아, 여자가 팔을 뒤로 뻗어 박형기의 발목을 잡고 하복부를 앞으로 바짝 내밀어 질을 압착시키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 박형기도 비명을 질렀다. 박형기는 치솟아 오르는 분수처럼 사정했다. 아아아, 절정으로 치달은 여자가 환희에 찬 비명을 지르고 털썩 엎어져 박형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한동안 엎드려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던 여자가 박형기의 몸에서 내려와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잠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요. 당신 먼저 미국에 가 계세요. 다음 주에 잔금을 받고 이삿짐도 정리한 후 뒤따라갈게요. 우리 미국에서 새 출발해요.
이제 여자는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엎드린 여자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잠시 후, 박형기는 침대에서 내려와 벌거벗은 몸으로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몇 번 더 여자를 유린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 공항으로 가야했다. 자칫 늦게 일어나 비행기를 놓쳐버리면 큰일이었다. 창밖으로 멀리 부산항 밤바다가 보였다. 바다 위에 떠있는 선박 불빛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일렁대고 있었다. 가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 땅과도 기약 없는 이별을 할 것이다. 그는 내일 아침 8시 김해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항공권을 예매해 두고 있었다. 미행을 의식하여 일부러 토요일 첫 비행기를 택했다. 그리고 오후 1시 30분이면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LA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있을 것이다.

내일 정오, 그는 정해현이 입금하는 오억 원을 김포공항에서 확인할 것이다. 입금이 확인되면 김인환을 살해한 범인이 김준하이고, 그 범행에 사용된 칼이 홍익문화연구소 단군상 아래 연못에 있다는 사실을 정해현에게 알려줄 것이다. 오후 한시, 정해현은 다시 오억 원을 입금시킬 것이다. 최경호 때문에 궁지에 몰려있는 정해현은 반드시 돈을 입금시킬 것이다.

물론 그가 정해현에게 건넨 계좌는 지금 침대에 잠들어 있는 여자 명의의 계좌였다. 돈을 받더라도 만에 하나 그의 계좌에 증거는 남기지 않아야 했다. 내일 정해현이 입금시킬 돈과 집 매매잔금을 받아 미국은행으로 송금하는 일, 집에 있는 짐을 정리하는 일, 차를 처분하는 일 등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여자는 국내에 남아 이 모든 일을 정리한 후 LA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일 그가 정해현에게 주는 정보에 의해 김준하는 김인환의 살인범으로 체포될 것이다. 체포된 김준하가 칼을 든 그의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고 자기는 살인범이 아니라고 우겨봐야 이미 게임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그는 미국은행에 입금된 돈을 찾아 라스베이거스 어느 슬롯머신 기계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

이 순간, 침대에서 잠든 척 하고 있었지만, 여자는 배를 깔고 엎드려 누워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박형기! 배신으로 얼룩진 비열한 인간! 너 같은 자식이 내 몸을 탐하고 능욕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 내 계좌로 입금될 돈과 집 매매잔금은 너에게 가지 않을 것이다. 이 돈은 그동안 나를 능욕한 대가이니 그리 알아라.

미국으로 간다고? 웃기는 소리! 너는 내일 미국으로 가는 대신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교도소에 가게 될 것이다. 돈 한 푼 없는 알거지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그동안 너에게 당한 이 지독한 능욕을 지금까지 참아내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를 위한 것이었다. 똑똑히 알아둬. 인과응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여자의 뇌리에 그동안 박형기를 꾀어 환심을 사고 믿음을 얻기 위해 견뎌내야만 했던 능욕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드디어 마무리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는 그 처참한 육체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여자는 엎드린 채 속으로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 2019. 1. 21.(월) 연재 제15회 <추격>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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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와의 짧은 소통

인천국제공항은 2001년 4월 준공되었다. 이 단락의 시간대는 2000년이다. 그래서 박형기의 LA행 항공기는 현재의 인천공항이 아닌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2000년 당시에는 주5일제 근무가 시행되지 않아 관공서 및 은행에서 토요일 오전 근무(13:00)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