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한 상 권 

눈 오는 날 호텔 뒷길을 걸어도
나는 은근히 국숫집 먼저 살펴보네.
눈 내리는 범어네거리 큰 간판 집에서
대명동 계대 미대 건너편 골목길까지
나는 가끔씩 국수가 있는 삶을 음미하네

하늘에서 뽀얗게 눈발처럼 내려와도
국수는 높고 아름다운 것을 뽐내지 않네.
그저 눈발과 나는 시원한 국물 동맹,
육수는 가슴에 품었던 모든 것을 녹여 이루는 것
명동칼국수에서부터 안동누름국수까지,
완강하면서도 구수한 기호가 목을 감다보면
국시꼬랑대기처럼 엇갈린 길도 풀어지는 시간

지난여름 비 오던 날 우산 없이 들어갔던
나리꽃 핀 국숫집도 생각나네.
나의 직관이 눈의 높이에서 길을 잃어도
어디에서나 누군가와 가장 편안하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수 끓는 시간

* 작가 노트

▲ 한상권 시인

지난 가을, 큰 누이가 ‘당신의 한 끼’라는 지방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1시간 가깝게 누이의 삶과 누이가 좋아하는 국수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우리 형제들도 고향집 앞마당에 소환돼 가난해서 더 가까웠던 국수에 대해 흠뻑 젖었다. 우리 전통 가곡인 정가(正歌)를 부르는 누이는 늘 국수처럼 맑고 따뜻했다. 그러고 보니 국수는 내 삶의 어디에서나 존재했다. 어릴 때부터 콩가루가 살짝 녹아든 면발과 고급 간식 국수꼬랑대기까지 국수를 둘러싼 모든 호흡이 좋았다. 그래서 은연중에 이 시가 내게 왔나보다. 겨울이다.

한상권 시인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강원도 속초에서 성장기의 한 때를 보냈다. 1993년《문화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단디』(2015)와 2018 올해의 청소년교양도서와 2018 세종도서(문학나눔도서)로 선정된 청소년시집 『그 아이에게 물었다』(2018)가 있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의 신작시를 시인이 쓴 작가 노트와 함께 발표하는 지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