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 연재 제7회 <미행>
Symphony in C minor ‘Fate’
 

미행

최경호는 피살자와 정적 관계에 있는 정해현의 보좌관이라는 점에서 유력한 용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범행 시간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그가 호텔에 있었고,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가다 접촉사고를 냈다는 사실을 곧바로 살인 사건과 결부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만약 최경호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그것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다른 증거를 찾아야 했다.

박경일은 먼저 사고를 냈다는 최경호의 차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신경민은 호텔에서 사고가 났을 때 최경호의 차도 뒷범퍼 오른쪽 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고 했다. 사고를 낸 차가 최경호의 차라면 그 차 오른쪽 범퍼에 사고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뒤로 미룬다면 그 흔적을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박경일은 소형카메라를 가지고 정해현의 선거사무실이 있는 거성빌딩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먼저 지하 1층에 주차된 차들 중에서 최경호의 4897 그랜저를 찾아보았으나 그런 차는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이용하여 다시 지하 2층 주차장으로 갔다.

지하 2층 계단 입구 쪽에 주차된 차를 살펴보고 있는데, 마침 엘리베이터문이 열리며 검정색 양복남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른손에 검은 사각형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박경일은 사고 당시 최경호가 장발이었고 왼쪽 볼에 큰 점이 있었다는 신경민의 말을 떠올렸다.

박경일은 방금 주차하고 내리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그 남자가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왼쪽 볼에 난 뚜렷한 점, 긴 머리카락, 신경민이 말하는 인상착의에 비추어 그 남자는 최경호가 틀림없었다. 최경호가 주차되어 있는 한 승용차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검은색그랜저 4897, 신경민이 말한 차 번호였다. 최경호의 뒤를 따라가 보면 뭔가 단서가 잡힐지도 모른다.

최경호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모습을 보고, 박경일은 급히 제 차를 주차해 둔 지하 1층으로 뛰었다.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올라 막 차 시동을 걸었을 때, 지하 2층에서 올라온 최경호의 차가 출구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박경일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도로로 접어들어 신호등에 걸려 놓치지 않도록 일정한 차간거리를 유지하며 최경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십분 정도 달렸을 때, 최경호가 부산은행 간판이 붙은 도로변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주차장 입구에는 ‘부산은행 고객전용’이라는 안내표지가 붙어 있었다. 은행 고객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운 것으로 보아 은행에 용무가 있는 것 같았다. 박경일은 뒤따라 들어갈까 생각하다가 최경호가 미행을 눈치 챌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은행 건물 앞 갓길 주차금지 구역에 차를 세웠다.
 

박경일은 최경호보다 먼저 은행에 들어가 고객소파에 앉아 비치된 여성잡지를 뒤적이며 최경호를 기다렸다. 주차장 쪽 후문 출입문을 통하여 들어온 최경호가 마침 박경일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왔다. 소파 앞에 입출금 전표를 넣어둔 키 큰 원형탁자가 있었다.

최경호는 서류가방을 원형탁자 위에 놓고 유리판 아래 칸막이 서랍에 비치된 예금청구서를 꺼내어 작성하고 도장을 날인했다. 출금창구로 간 최경호가 예금청구서와 통장을 은행창구 여직원에게 주었다.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청구서를 받아든 창구 여직원의 말에 최경호가 돌아서 마침 박경일이 앉아 있는 소파로 와서 곁에 앉았다.

박경일은 누드사진 같은 여성속옷모델 칼라화보가 가득한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최경호도 검은 안경을 쓴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것을 함께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늘씬하게 쭉쭉 빠진 반나체 여성모델 사진에 갑자기 아랫도리가 슬며시 일어나며 괜히 민망해졌다. 박경일은 책으로 아랫도리를 슬쩍 가리며 최경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최경호도 따라 실없이 씩 웃었다.

박경일은 자연스럽게 최경호를 옆 눈으로 쳐다봤다. 사각형 얼굴에 턱까지 이어진 구레나룻 면도자국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박경일은 슬며시 책장을 다음 페이지로 넘기며 시선을 다시 잡지로 향했다.

은행창구에서 ‘박영애 고객님’하는 마이크 음성이 흘러나왔다. 최경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출금창구로 갔다.
― 박영애 고객님. 현금으로 찾으시죠?
은행창구 여직원이 최경호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최경호가 창구직원이 건네는 현금다발을 서류봉투에 담고 있었다.

박경일은 멀찌감치 뒤에서 바라보며 현금다발 개수를 헤아려보았다. 만 원권 묶음 열 개였다. 최경호가 만 원권 묶음 다섯 개씩을 서류봉투 두 개에 나누어 넣고, 그 봉투를 다시 서류가방에 넣었다. 박경일은 수첩을 꺼내어 ‘최경호 2000. 4. ××. 10:45 박영애 명의의 통장에서 천만 원 인출, 부산은행 00지점’이라고 적었다.

최경호가 서류가방을 들고 다시 주차장 쪽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박경일은 정면 출입문을 통해 먼저 은행을 나와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으니, 전면 차창 블라인더 사이에서 주차위반 딱지가 꾸벅 인사를 했다. 이런 제기랄! 박경일은 다시 차에서 내려 딱지를 뽑아 북북 구겨 도로변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최경호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와 박경일의 차를 지나치고 있었다. 박경일은 다시 최경호의 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5분쯤 달렸을 때 사거리 넓은 교차로가 나타났다. 최경호의 차는 이미 교차로를 진입하였다. 박경일이 막 교차로로 진입하려는 순간 적색신호등이 들어 왔다.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진입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박경일은 별수 없이 차를 멈춘 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최경호의 차는 이미 교차로를 지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제발 멀리 가지는 않았어야 할 텐데. 신호가 바뀌는 황색등이 들어 왔을 때 박경일은 이미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최경호가 나아간 방향으로 3분쯤 달렸을 때 다행히 앞 신호에 걸려 정차 중인 최경호의 차가 보였다.

박경일의 차가 접근할 무렵 신호가 다시 바뀌면서 최경호의 차가 다시 출발했다. 잠시 후 최경호의 차가 우측으로 방향을 틀더니 왕복 2차선 이면도로로 접어들었다. 바짝 붙어 따라가면 미행을 눈치 챌 수도 있을 것이다. 박경일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어 최경호의 차가 이면도로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 이면도로로 진입하였다.

이면도로에는 차량통행이 많지 않았다. 갓길에 불법 주차된 차들이 많아 도로는 마치 주차장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최경호가 도로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박경일도 50미터 정도 떨어진 뒤쪽 갓길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최경호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서류가방을 들고 인도와 접하여 있는 삼층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박경일은 카메라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최경호가 없는 틈을 타 그의 차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때 반대차선 갓길 도로변에 자주색 마티즈 한 대가 멈추고 한 남자가 내렸다. 아니, 저 친구는? 저 친구가 여기에 왜 왔을까?

자주색 마티즈에서 내린 사람은 의외로 마린시티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던 신경민이었다. 신경민이 손에 가방하나를 들고 왕복 2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하여 조금 전 최경호가 들어간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건물 2층 벽에 가로로 《까뮈》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찻집과 주점을 겸하는 카페였다.

신경민이 여기에 왜 왔을까? 분명 최경호를 만나러 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건물로 들어간 사이에 박경일은 도로변에 세워둔 최경호의 차를 살펴보았다. 앞범퍼는 몇 군데 칠이 벗겨지고 낡은 것이지만, 뒷범퍼는 깨끗하고 광채가 났다. 뒷범퍼는 최근에 새것으로 교체된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박경일은 먼저 차 전체 모습을 찍고, 다시 뒷범퍼가 새것으로 교체된 것임을 알 수 있도록 앞범퍼와 뒷범퍼를 비교하여 사진을 찍었다. 신경민의 차도 촬영해 둘 필요가 있었다. 도로를 건너가 신경민이 타고 왔던 마티즈 전경을 촬영하고, 두 사람이 들어간 《까뮈》라는 카페 간판과 최경호의 차가 한꺼번에 나올 수 있도록 다시 사진을 찍었다.

최경호와 신경민이 이곳에서 만난 사실을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신경민과 최경호의 차, 그리고 《까뮈》라는 간판이 한 화면에 나타나도록 원거리 사진을 찍었다. 그때 건물에서 최경호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원거리 촬영을 위해 뒤쪽으로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최경호의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박경일은 카메라 줌을 당겨 건물에서 나오는 최경호의 모습도 찍었다.

최경호의 차가 떠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최경호를 미행할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는 신경민을 추궁하여 최경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신경민은 건물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박경일은 신경민의 차가 있는 반대편 도로로 건너갔다. 마침 신경민의 차 옆 도로변에 담배와 일용품을 파는 조그만 마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시간은 벌써 정오가 다 되어 있었다. 아침을 먹지 않아 허기가 졌다. 마트로 가서 우유 한 팩을 사서 마시고 있는데, 신경민이 가방을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들어갈 때보다 가방이 불룩하고 아래로 축 쳐져 있었다. 최경호가 가져간 돈이 들었구나. 직감이었다.

그때 신경민의 차 뒤쪽 30미터쯤 갓길에 회색 소나타승용차 한 대가 멈추고 있었다. 박경일도 신경민도 그 차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신경민이 다시 도로를 무단 횡단하여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순간 박경일이 달려 나가 조수석문을 열고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신경민이 들고 왔던 가방이 박경일의 엉덩이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신경민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 아니, 누구……?
― 자식아. 머리에 피똥도 마르지 않은 놈이 벌써부터 공갈이나 치고 다녀.
박경일이 대뜸 왼손바닥으로 신경민의 뒤통수를 올려 부치며 윽박질렀다.

― 공갈이라니요? 아니, 민주경찰이 남에 차에 함부로 올라타 막무가내로 사람을 구타해도 되는 겁니까?
신경민이 이내 박경일을 알아보고 언성을 높였다.
― 민주경찰? 자식아. 나 민주경찰 아니거든. 뭐, 구타?
박경일이 이번에는 신경민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세게 먹이면서 말했다.

― 아야! 아, 씨~, 정말 왜 이래요?
신경민이 큰소리로 대들었다.
― 이 자식이. 가만있어, 인마. 어디 보자. 다섯 개, 이것도 다섯 개, 야, 이거 천만 원이나 되네. 이 자식 이거 간덩이가 부어도 보통 부은 게 아니군.
박경일이 엉덩이 밑에 깔린 가방을 무릎에 올려 지퍼를 열고 봉투 두개에 든 돈다발을 세어보고 말했다.

― 왜 남의 돈을 가지고 그러세요?
― 야, 이 자식아. 이게 네 돈이야? 공갈쳐서 뺏은 장물이지.
― 공갈을 치기는 누가 공갈을 쳤다는 거예요?
― 야, 이 자식아. 최경호 보좌관이 네놈이 협박을 한다고 신고를 했어. 이래도 딴소리 할 거야?
최경호라는 이름에 신경민이 단박에 수그러들었다.

― 넌 현행범으로 딱 걸렸어. 자, 좋은 말할 때 순순히 손목 내밀어.
박경일은 신경민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돈다발이 든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 아, 씨~, 그럼 내 차는 어떻게 하고요?
― 견인차가 끌고 가겠지. 나중에 그쪽에 가서 찾아가.
박경일이 도로를 무단 횡단하여 뒤쪽 갓길에 세워둔 자기 차로 신경민을 끌고 가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

박경일이 신경민을 차에 태워 떠나자 조금 전 신경민의 차 뒤에 주차했던 소나타승용차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둘이 내렸다. 나이 든 사내는 유난히 턱이 길었다. 주걱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젊은 사내가 담배를 꺼내 주걱턱에게 물리고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 아, 씨팔! 행님, 이런 걸 바로 닭 쫓던 개라 카지요?
― 그래, 새끼야. 니가 바로 그 개새끼다.
주걱턱이 젊은 사내의 뒤통수를 툭 치며 말하고는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 어이, 최 보좌관, 그 피라미새끼, 짭새가 먼저 낚아채 가버렸어.

*

― 똑바로 말해. 최경호가 네게 돈을 준 이유가 뭐야?
한 시간 후, 사무실로 돌아온 박경일은 신경민을 책상 앞에 앉히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되겠어요?
― 야, 신경민, 똑똑히 들어. 단지 차 사고를 신고하지 말라고 천만 원이나 주었다고? 야, 이 자식아.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너, 정말 끝까지 우길래? 최경호와 너 사이에 무슨 다른 일이 있었지? 그래서 돈을 주었을 게 아냐?

― 정말이에요.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전부 다예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 너, 호텔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지? 그 때문에 최경호가 돈을 주었을 거고? 그렇지 않아? 괜한 고생 말고 빨리 불어.
― 아이고, 정말 생사람 잡지 마세요. 제가 관련이 있다면 왜 제가 먼저 박 경위님께 알렸겠어요. 최 보좌관님은 모르지만 저는 정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 좋아, 자꾸 그렇게 우기니까 그렇다고 치자. 네 말대로라면 그러니까, 최경호가 네게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했다. 최경호를 만난 자리에서 네가 은근히 살인 사건을 내비치며 사고 사실을 경찰에 제보하겠다고 협박하며 큰 것 한 장을 요구했다. 그래서 오늘 최경호와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 돈을 받았다, 맞아?

― 아니, 제가 협박한 것이 아니고요. 제가 돈을 직접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냥 큰 것 한 장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슬쩍 넘겨짚어 봤던 것뿐이에요. 사실 최 보좌관님께서 응하지 않았다면 저는 부서진 범퍼 값만 받고 말 참이었단 말이에요.

― 야, 이 자식아! 네가 그냥 한 번 해 봤다는 그 말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에 최 보좌관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있느냐. 당신은 살인과 관련 있지 않느냐? 여차하면 당신이 살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경찰에 알리겠다. 그러니 알아서 큰 것 한 장쯤은 내 놔라. 그런 뜻으로 한 말이잖아. 그렇지?
― …….

― 야, 이 자식아! 그게 공갈협박이지. 공갈협박이 따로 있는 줄 알아?
― 아, 씨~, 왜 자꾸 이 자식아, 이 자식아 그래요. 제게도 인권이 있다고요.
― 뭐? 인권? 이 자식이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는 있어 가지고. 야, 인마. 그리고 네 말대로라도 그렇지. 범퍼 값은 네가 왜 받아? 부서진 차가 네 차야?
― 돈을 받아서 차 주인에게 주려고 했단 말이에요.
― 차 임자가 누군지 알고? 차 임자가 누군지 알아보기나 했어?
박경일이 다시 신경민의 이마에 꿀밤을 먹일 듯이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 …….
― 자, 지금부터는 내가 묻는 말에 예, 아니오, 라고 대답만 해. 조서 정리할 테니까.

박경일은 살인 사건에 대한 최경호의 연루사실이나 단서를 찾아보려고 무려 네 시간 동안이나 신경민을 윽박지르고, 으르고, 달래보았다. 그러나 신경민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신경민이 돈을 받기 전에 호텔에서 사고 사실을 먼저 그에게 제보한 점에 비추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경민의 갈취행위에 대한 조서를 작성하고 나니 이미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최경호는 신경민에게 천만 원을 주면서까지 사고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이것은 혐의를 가중시키는 중요한 단서였다. 박경일은 신경민의 갈취행위에 대한 신병처리와 용의자로 부각된 최경호에 대한 보고를 위하여 수사과장과 함께 검찰청 김용훈 검사의 방으로 갔다.

― 지금으로서는 최경호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그래서 오는 도중에 박 경위와 의논해 봤습니다. 검사님,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신경민의 갈취행위에 대한 피해자 진술조서를 받는다는 핑계로 최경호의 태도를 슬쩍 한 번 떠보는 것이……. 어차피 신경민의 신병처리를 위해서는 피해자인 최경호의 진술이 필요합니다.

― 그것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 합시다. 그 일은 박 경위님께서 직접 수고해 주십시오. 그리고 신경민은 석방하도록 합시다. 어차피 과장님의 말씀대로 피해자인 최경호의 진술이 없는 마당에 마냥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석방은 하되 혹시 도주하거나 최경호와 다시 접촉하지는 않는지 밀착 감시해 주십시오. 오늘 박 경위님께서 많은 일을 하셨네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려고 할 때, 김용훈 검사가 그때야 생각난 듯 다시 말했다.
― 아, 참! 깜빡할 뻔했네요. 피살자의 부검날짜가 정해졌습니다. 박 경위님과 최 경위님 두 분은 꼭 참여해 주십시오. 그리고 감식반과 피살자 유족 중에서 부검에 참여할 사람에게도 미리 연락해 주십시오.

박경일이 다시 경찰서로 돌아와 신경민을 석방하고 퇴근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언제 왔는지 정시영이 다가와 불쑥 말을 걸었다.
― 뭐, 새로운 소식은 없어?
― 없어.
― 야, 그러지 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네 밥 사주려고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리고 있었어.
정시영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저녁을 핑계로 어떤 정보라도 얻으려는 의도가 눈에 뻔히 보였다.
― 일 없어. 집에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어.

박경일은 졸졸 따라붙는 정시영을 뿌리치고 차에 올랐다. 이미 어두워진 도로에는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눈빛처럼 네온간판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저 불빛 속 어딘가에서 오늘도 누군가를 향한 음모와 범죄가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도시는 불길한 범죄의 냄새를 품고 불빛 속에 일렁이고 있었다. 박경일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빛의 물결 속으로 차를 몰아 나갔다.
 

*

이 시간, 최경호도 M룸살롱을 향하여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그는 오늘 신경민을 만나는 카페 앞 도로에 어제 차출한 주걱턱과 또 한 놈을 미리 배치해 두고 있었다. 그 둘에게 신경민의 차를 뒤따라가 덮쳐 앞으로 끽소리 못하게 밑간을 쳐주고 돈을 다시 찾아오라고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짭새 하나가 나타나 피라미새끼를 먼저 낚아채 가버린 것이다. 더구나 주걱턱은 그가 카페로 들어간 사이에 그 짭새가 갓길에 세워둔 그의 차 사진을 찍고 있더라는 말까지 했다. 두 사람을 직접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 같았다.

경찰의 수사손길은 그가 모르는 사이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경찰이 어떻게 알고 차 사진을 찍었고, 또 무엇 때문에 그 피라미새끼를 체포해갔을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피라미새끼가 돈을 그가 준 것이라고 불어버린다면? 이거야말로 정말 큰일이다.

음모를 비켜나기 위해 준 돈이 오히려 스스로를 옥죄는 더 큰 덫이 되고 말았다. 더 깊은 함정 속으로 제 발로 뛰어든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는 그물이 점점 더 조여들고 있다. 이 음모의 배후에는 도대체 누가 있는가? 최경호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징조가 저녁안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 2018. 12. 3.(월) 연재 제8회 <개구리와 빈대>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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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와의 짧은 소통
 

천불천탑을 이루기까지
이 땅의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화순 운주사 석불에서
이 땅에서 살다간 민중의 얼굴과
그들의 소망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