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향곡, 연재 제5회 <진실의 파수꾼>
Symphony in C minor ‘Fate’
 

진실의 파수꾼


같은 날, 저녁 무렵, KNB방송 보도부

― 정 기자, 정말 멋진 한방이었어. 특종 축하로 내 오늘 저녁 한 끼 사지.
막 퇴근하려는 정시영에게 보도부장 유철주가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멋진 한방’이란 정시영이 김인환 피살 사건을 사건현장에서 직접 생중계로 보도한 것을 말했다. 이 말은 특종이라고 할 만한 보도에 대하여 유철주가 평소 즐겨 쓰는 말이었다. 유철주는 기자란 항상 열린 공간에서 대중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유철주가 말하는 열린 공간이란 곧 사건현장을 의미했다.

유철주는 보도부장으로 직장 상사이기도 했지만, 정시영의 대학 7년 선배였다. 방송국내에서 이제 겨우 신출내기 기자의 때를 벗은 정시영을 누구보다 더 살뜰하게 챙겼다. 정시영은 이런 유철주로부터 기자의 윤리나 사명의식이 어떠해야하는지, 구체적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 사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등 기자의 역할이나 업무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정시영은 평소 유철주를 큰형처럼 가깝게 여기며 따랐다. 그런 유철주가 특종 기념으로 한잔 사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송국을 나와 자갈치시장 활어센터로 갔다. 두 사람은 막 퇴근시간을 맞아 왁자지껄한 활어센터에서 생선회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저녁을 먹었다.
― 그런데 말야? 정 기자? 김인환이 그 호텔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던 거야?

두 사람이 소주 두 병을 비웠을 때, 그제야 생각난 듯 유철주가 물었다. 그 물음은 그때까지 술기운이 아련하게 번져가고 있던 정시영에게 ‘첫 번째 정보, 마린시티호텔 804호실’이라는 음성메시지를 떠올리게 했다. 정시영은 그 음성메시지를 받고 호텔에 가게 되었지만, 정작 그 자신도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메시지를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음성메시지의 주인공, 이 정보원에 대하여 말을 할까? 그러나 정시영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그에게만 정보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 주인공은 분명 두 사람 사이에서만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야, 이거 섭섭하지만 기분 좋은 말인데. 아끼는 후배가 이제 선배에게도 숨겨야 하는 비밀이 생겼다는 것 아닌가. 그래, 내게도 비밀로 해야만 할 특별한 취재원이 있단 말이지. 그래, 잘해 봐. 그건 그렇고 정말 멋진 한방이었어.

유철주는 다시 한 번 멋진 한방이라는 말을 하고는 정시영이 마린시티호텔에 가게 되었던 경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시영이 굳이 취재원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마당에 이를 추궁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유철주는 평소 사석에서도 언제나 정시영을 같은 기자로서 동등하게 대우했고 선배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선후배 사이지만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이러한 점이 정시영이 유철주를 존경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두 사람이 자갈치시장을 나왔을 때는 아홉시가 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얼큰하게 취하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들이 자주 들리는 단골 카페 《소피아SOPHIA》를 찾았다. 카페 소피아는 자갈치시장이 내려다보이는 남포동 해안가 부광빌딩 20층에 있었다.

카페 여주인 손양이 반갑게 인사하며 안쪽에 특별히 칸막이를 지어 구별한 작은 룸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함께 일하는 유양이 양주 한 병과 맥주에 곁들여 과일안주를 내왔다. 손양이 유철주 옆에 앉고 유양이 정시영 옆에 앉았다. 카페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유철주를 따라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였다. 유철주는 이 카페의 오랜 단골인 성싶었다. 그때도 두 사람은 꽤 취한 상태에 있었다. 그때 정시영은 이 두 여자를 처음 만났다. 유양은 가름한 얼굴에 피부가 하얗고 활달한 아가씨였고, 손양은 유난히 긴 목을 타고 어깨를 지나 등허리까지 흘러내린 생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손양은 지금도 그때처럼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정시영도 자연스레 카페 소피아의 단골이 되었다.

― 어머, 부장님, 이른 시간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취하셨어요?
애교 섞인 활달한 유양의 목소리가 유철주의 어깨 위에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 그래, 그래, 오늘 취할 일이 좀 있었지. 너희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 오늘 회사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가 봐요? 그렇죠?
손양이 입에 웃음을 머금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 야, 너희들은 TV도 안 보니? 어젯밤부터 오늘 하루 종일 정 기자가 홈런 치는 모습을 보지도 않았어? 오늘은 말이야. 정시영의 날이야. KNB방송 창사 이래 최고 홈런을 친 정시영의 날이야. 자, 정시영의 날을 위하여!

유철주를 따라 모두 잔을 들었다. 잔을 비운 정시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 아이고, 선배님, 이제 비행기 그만 태우십시오. 아무리 그러셔도 선배님의 명성에 비하면 전 아직 풋내기가 아닙니까.
정시영이 자기를 너무 치켜세우는 유철주의 말이 부담스러워 농담조로 우스개 삼아 한 말이었다. 유철주가 갑자기 정색한 얼굴로 정시영을 바라보았다.

명성? 아차! 하지 않아야 할 말이 나오고 말았다. 옆에 앉은 두 여자도 순간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오랜 단골이라 이들도 유철주의 ‘명성’이라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유철주에게 명성을 안겨 준 그 사건은 아직도 ‘잠입취재의 새로운 지평’으로 평가받는 KNB방송의 전설이었다. 그 사건은 현직 국회의원이 룸살롱에서 교복을 입은 어린 여학생과 함께 마약을 투약한 채 반나체로 성추행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직접 중계한 사건이었다.

당시 신출내기 기자였던 유철주가 그 국회의원이 마약파티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룸살롱 근처에서 현장목격을 위하여 무려 6개월 동안이나 잠복근무한 끝에 보도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 보도로 인하여 정치가 등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도덕성이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권력층의 사생활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취재성공으로 유철주에게는 속칭 ‘잠입보도의 대가’라는 명성이 붙게 되었다. 6개월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잠복 취재한 끈질긴 기자정신에 대하여 ‘집념의 보도정신, 잠입보도의 새로운 지평’이라는 전설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보도로 인하여 구속된 그 국회의원이 수의를 찢어 교도소 창틀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게 되자, 유철주는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철주는 마치 자기가 그 국회의원을 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날마다 술을 마시며 자학했다. 이런 날이 계속되자 방송국기자는 물론 어느 누구도 유철주의 그 명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이후 유철주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이 사건은 유철주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기자들 모두가 금기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정시영이 술김에, 그리고 사건취재 성공으로 흥분한 상태라 엉겁결에 선배님의 ‘명성’이라는 말을 해버림으로써 유철주의 그 죄책감을 일깨워 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시영이 이를 생각하고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 명성? 명성이라? 그래, 유철주의 명성이지.
유철주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시니컬하게 말했다.
―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정시영이 황급히 사과를 했다.
― 괜찮아, 괜찮아.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명성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유철주가 과장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말끝에는 이미 힘이 빠지고 우울해져 있었다.
― 어머, 분위기가 이상해졌어요. 아이! 부장님, 제가 폭탄주 한 잔씩 돌릴게요.
얼굴이 하얗게 굳어있던 유양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나섰다.
― 그래요, 부장님. 한 잔씩 들고 다른 이야기해요.
손양도 평소답지 않게 애교 띤 목소리로 거들었다.

유양이 맥주잔에 맥주를 2/3 정도 따르고 양주 한 잔을 탔다. 휴지를 컵 위에 얹어 손바닥으로 막고 탁하고 바닥에 내려치자 잔속에서 회오리가 일며 거품이 일었다. 유양이 회오리폭탄주를 먼저 유철주에게 권했다.
― 그래, 그래, 마시자. 아직도 내 속에서 꺼지지 않는 저주의 불씨를 위하여!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내 본성의 소리를 위하여! 아무리 삭이려 해도 더 크게 자라나는 내 가슴속 회한을 위하여!
입술을 비틀고 처연한 웃음까지 띠며 웅변조로 비장하게 말을 마친 유철주가 유양이 내미는 폭탄주 잔을 받아들고 목에서 꿀떡꿀떡 소리가 들리도록 마셨다. 유철주가 탁, 하고 잔을 놓고 다시 말했다.

― 과연 기자란 무엇인가. 과연 기자들이 이 세상의 진실을 참되게 전하고 있을까?
유철주의 이 독백 같은 말에 두 여자는 다시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 그래, 정 기자, 정 기자는 어떻게 생각해?
유철주가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정시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저는 선배님께서 항상 하셨던 말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기자란 진실의 파수꾼이라고.
― 그래, 맞아. 진실의 파수꾼! 그것이 기자의 사명이야. 어떠한 보도라도 진실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면 그 보도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도 있고, 독약이 될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진실은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 단지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진실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철주가 목이 타는지 유리컵에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는 정시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 눈빛이 진지했다. 정시영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유철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철주가 말했다.

― 진실이 배제된, 단지 사건의 껍데기만을 보도하는 기자는 진실의 파수꾼이라는 가면을 쓴 흡혈귀와 다름없어. 그런데 문제는 거의 모든 기자들이 사건의 외형만 바라보고 있다는 거야. 특종이라는 사건의 외형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기자는 항상 피에 굶주려 있는 거야. 일정기간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흡혈귀처럼……. 어떠한 사소한 일이라도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어.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 속에서 나타난 결과의 구체적 형태가 사건이라는 외형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렇다면 기자가 정작 찾아다녀야 할 것은 결과라는 외형에는 드러나지 않는 원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유철주가 자문하듯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두 여자도 유철주의 진지한 표정과 말에 얼굴이 굳어져 가만히 있었다. 유철주가 다시 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말했다.

― 하기야 보도의 신속성이라는 점에서 언제 그 원인을 찾아다니고 있겠나. 원인을 찾아야 할 사람은 법률가지 기자가 아닐지도 모르지. 그러나 결과로 드러난 형태와 그 형태를 있게 한 원인을 함께 찾았더라면 보도 내용이 달라졌을 것이고, 그 내용이 지향하는 목표가 달라졌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사건의 외형에 매달려 보도를 하게 된 결과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면……. 이럴 때에 그 외형을 보도한 기자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보도의 신속성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그 정당성을 변호한다고 하여 그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일까? 법적인 책임은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도덕적인, 인간적인 책임은 져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기자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쉽게 그 원인과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특종을 잡겠다는 공명심에 빠져 사건의 외형만을 바라보고 보도를 해버린 경우에 말이야.

길게 말을 하는 동안 유철주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말을 마친 유철주는 가슴이 답답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시영은 유철주가 하는 말이 단순히 기자라는 직업에서의 일반적인 경향을 성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시영이 불쑥 말했다.
― 선배님, 저도 한 잔 하겠습니다.
정시영이 맥주잔을 유양에게 내밀었다. 유양이 유철주에게 한 것처럼 폭탄주 한 잔을 타서 정시영에게 내밀었다. 정시영이 그 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정시영이 잔을 놓고 유철주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 선배님, 오늘 제가 보도한 사건 얘기를 하시는 거지요?
― 응……? 과거 내 얘기일수도 있고, 오늘 정 기자가 터트린 특종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 내가 장담하지만 앞으로 정 기자는 오늘 사건과 관련하여 계속 특종을 터트리게 될 거야. 그러나 이것만은 명심해. 사건의 외형에 나타난 것이 그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는 거야.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사건은 기자가 발굴하는 것이 아니야. 사건이란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야. 그리고 사건을 만든 자가 기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해. 

사건의 실체와 원인에 접근하라.

정시영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라는 유철주의 말이 김인환 피살 사건을 보도하여 우쭐해진 그의 공명심에 대한 경계의 말로 들렸다. 유철주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오늘 사건 보도에 대한 그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일부러 하는 완곡한 충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라.

그러고 보니 그가 김인환 피살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보낸 음성메시지 때문이었다. 이 특종은 그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의 배후에 있는 누군가의 제보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제보의 이면에는 김인환을 살해한 범인이거나, 아니면 그 배후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음모의 표적이 적어도 정시영 자신은 아닐지라도 그를 음모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유철주의 말대로 그가 터트린 특종은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그자가 기자인 그를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특종을 터트렸다는 자만심에 빠져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 대하여 유철주가 경각심을 가지도록 일깨워 주고 있었다. 정시영은 술도 취해가고 있었지만 점점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 정 기자님, 오늘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손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럴 거야. 어제 초저녁부터 지금까지 눈 한번 제대로 못 붙였을 테니까.
유철주가 고개를 숙인 정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정 기자님, 오늘은 그만 일어나세요. 제가 바래다드릴게요.
정시영 곁에 앉은 유양이 일어서 팔을 끌었다.
― 부장님, 아니 선배님,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정시영이 일어나 유철주에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유철주 곁에 앉은 손양도 정시영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일어섰다.
― 그래. 정 기자, 먼저 나가 봐. 나는 잠시 더 있다 계산하고 갈 테니까. 집에 가서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유철주가 앉은 채로 말했다. 유양이 정시영을 부축하다시피 팔을 잡고 출입문을 나갔다. 손양이 그 뒤를 따랐다.

*

잠시 후, 손양이 먼저 돌아와 유철주 맞은편에 앉았다.
― 엘리베이터까지 모셔다 드렸어요. 연아가 택시를 태워드리고 오겠다고 했어요. 가게 문은 일부러 닫았습니다.
― 예, 두 분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유철주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갑자기 존칭으로 바꾸어 말했다.
― 부장님, 저도 술 한 잔 할게요. 게임은 시작되었지만, 사실 너무 겁나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요.
손양이 말하고는 스스로 양주병을 들어 얼음을 채운 컵에 양주를 따랐다. 유철주가 얼음에 희석된 양주를 손양의 잔에 따르며 말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각자 맡은 역할만 잘 하면 됩니다.
손양이 양주잔을 들어 한 잔을 마셨다.

*

잠시 후, 정시영을 배웅하러 나갔던 유양도 돌아와 손양 곁에 앉았다.
― 택시를 태워 보내드렸어요.
― 예, 수고하셨습니다.
유철주가 역시 존칭으로 말했다.
― 저도 술 한 잔 할게요.
유양이 손양 앞에 놓인 얼음 컵에서 양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 어제 그 친구가 왔던가요?
유철주가 유양에게 물었다.
― 예, 새벽 4시 가까이 되어 제 오피스텔로 찾아왔어요.
― 다른 일은 없었고요?
―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어요. 다리를 후들거리며 떨고 있었어요.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돌변하여 다짜고짜 벨트를 풀어 저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이제 그 사람의 사디즘 증세는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우리가 의도한 대로 되어가고 있어요.

유양이 말을 마치고 이번에는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따라 연거푸 두 잔을 더 마셨다.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유양이 다시 말했다.
― 이걸로도 안 될 것 같아요. 말을 하려니 너무 창피해서. 저도 한 잔 할게요.
말을 마친 유양이 스스로 폭탄주 한 잔을 타더니 단숨에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유양이 다시 말했다.
― 부장님, 이걸 한 번 보세요.
유양이 입고 있는 회색 브라우스 단추를 위에서부터 풀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단추를 풀어 브래지어 가슴을 드러낸 유양이 등을 돌리고 모로 앉으며 브라우스를 내리고 어깨와 등을 드러내었다.

등과 어깨에 벌겋게 솟아오른 선명한 채찍 자국이 가득했다. 벨트를 채찍삼아 휘둘러 생긴 겹치고 겹친 멍과 피맺힌 생채기가 어깨와 등에 문신처럼 가득 새겨져 있었다. 어떤 곳은 피가 흘러 딱지가 앉은 곳도 있었다. 그 딱지가 벗겨져 생긴 흉터도 여러 군데 부풀어 올라 얼룩진 무늬로 퍼져 있었다. 

*

박형기는 얼떨결에 받아든 칼을 들고 여전히 덜덜 떨며 혼자 서 있었다. 칼을 든 손을 내려다보니 하얀 면장갑을 낀 손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당황한 와중에서도 우선 살인현장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실내 화장실로 갔다. 칼과 벗은 면장갑을 세면대에 올려놓고 손에 배어든 핏물을 씻었다.
 “그 칼 잘 보관해.”
먼저 방을 나가면서 김 소장이 했던 말이 귀에 생생했다.

박형기는 피 묻은 장갑을 벗어 흐르는 세면대 물에 씻어 꽉 비틀어 짜서 다시 꼈다. 욕실에 비치된 수건으로 피 묻은 칼을 집어 둘둘 말았다. 수건을 양복허리주머니에 넣으니 불룩 튀어나와 남의 눈에 띌 것 같았다. 양복안주머니에 수건을 넣었다. 가슴팍이 좀 불룩해 보이긴 하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욕실에서 나와 카펫에 흥건하게 고인 핏물을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구석으로 걸어 출입문을 나섰다.

박형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나왔다. 젖은 장갑을 벗어 바지호주머니에 넣었다. 호텔 프런트에는 젊은 남자직원 혼자 있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보여야 했다. 박형기는 태연하게 프런트로 걸어가서 직원에게 말했다.
― 콜택시 한 대 불러줄 수 있겠나?

*

호텔에서 집까지, 같은 택시를 오래 타면 택시기사가 그의 인상착의를 기억할 수 있었다. 수사가 시작되면 택시기사의 신고로 그가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었다. 박형기는 콜택시를 타고 호텔을 벗어나 가까운 해운대 해수욕장 앞 도로에 내렸다. 해수욕장은 자정이 지난 시간인데도 도로변 건물과 가게에 네온간판이 환하고 사람들로 꽤 붐볐다. 백사장 앞 도로에서 다시 빈 택시를 탔다.

일부러 한참 못 미쳐 골목 어귀에서 택시를 내렸다. 5분 정도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방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먼저 양복주머니에 넣고 온 칼을 감싼 수건을 꺼내어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테이프로 친친 감아 단단히 밀봉했다.
“그 칼 잘 보관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김 소장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나 살인증거를 집안에 둘 수는 없었다.

박형기의 집은 10평정도 되는 작은 정원이 딸린 오래된 단독주택이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재산이었다. 마당 오른쪽 모퉁이에 백목련 한 그루가 심겨져 있었다. 박형기가 어릴 때부터 있던 오래된 나무였다. 트레이닝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박형기는 마당으로 나와 목련나무 아래를 삽으로 팠다. 깊이 30cm정도 구덩이를 파고 칼을 감싼 비닐봉지를 그 안에 묻었다. 담장 밖 가로등 불빛에 비친 목련가지에는 금방이라도 터뜨릴 듯 하얀 꽃 봉우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다시 방안에 들어오니 갑자기 강열한 사디즘 충동이 일었다. 여자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호텔 살인현장에서 어처구니없이 누명을 뒤집어써버린 분풀이를 여자에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내는 벌써 1년 전에 집을 나가고 없었다. 두 번째 여자였다. 첫 번째 여자처럼 그 여자도 그의 사디즘 폭력을 1년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렸다. 집에는 그 혼자 살고 있었다.

6개월 전에 세 번째 사귄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전 두 여자와는 달랐다. 처음부터 그의 사디즘 폭력을 이해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학대를 점점 즐기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오히려 그에게 매달려 더 강한 자극을 요구했다. 이제 그 여자는 확실한 마조히스트가 되어 있었다. 앞선 두 여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모도 출중했다. 정말 굴러온 복덩어리에다 천생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는 지금 중앙동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따로 살고 있었다. 박형기는 다시 양복으로 갈아입고 골목에 세워둔 그의 차에 올랐다.

*

오피스텔 출입문 앞에 서서 인터폰을 누르기 직전 박형기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린시티호텔에 가서 이곳까지 오기까지 몇 시간 동안의 기억이 재생필름처럼 스쳐갔다. 호텔에서의 살인 장면이 떠올라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렸다.
“넌 이미 살인자가 되었어.”
조롱하듯 눈앞에 카메라를 흔들어 보이던 김 소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화가 치솟았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해소할 대상이 있어야 했다.

인터폰을 눌렀다. 여자가 출입문을 열었다. 안색까지 질려있는 그의 모습을 본 여자가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자다가 일어났는지 분홍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박형기는 거칠게 여자의 어깨를 잡고 등을 돌려세우고 팽개치듯 침대로 떠밀었다. 여자가 완력에 밀려 두 손을 짚고 침대에 엎어졌다. 박형기는 재빠르게 허리벨트를 풀어 여자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부딪히는 허리벨트 채찍소리에 아, 아, 아, 여자의 비명소리가 후렴처럼 울려 퍼졌다. 여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여자는 오히려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손을 뒤로 내려 짧은 분홍 잠옷 옷자락을 위로 걷어 올리고 팬티도 입지 않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이 박형기를 더 흥분시켰다. 박형기는 손에 든 벨트를 침대 위에 던지고 목뒤 끈이 달린 잠옷 옷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좌우로 거칠게 찢어발겼다. 여자는 브래지어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박형기의 거친 손길에 여자의 나신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벨트채찍에 맞은 여자의 등허리는 이미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피부가 터져 피가 내비친 곳도 있었다. 여자가 엎드린 채 손바닥으로 침대보를 내려치며 절박하게 소리쳤다.
― 아아, 멈추지 마. 왜 멈춰? 더 세게, 더 세게 때려 줘.

박형기가 있는 힘을 다해 다시 벨트를 휘둘렀다. 짝, 짝, 짝, 살갗에 부딪히는 채찍소리! 그래그래, 더 세게, 더 세게, 절박한 여자의 외침! 아, 아, 아, 여자의 비명소리! 힘 실린 채찍이 여자의 등허리에 폭풍처럼 몰아쳤다. 드디어 여자의 등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더 세게, 더 세게, 여자의 외침과 비명소리도 더욱 절박하게 고조되었다. 순간, 아아아! 박형기는 짐승처럼 부르짖으며 벨트를 집어던지고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었다. 박형기의 페니스는 극도의 흥분으로 단단하게 팽창되어 있었다.

박형기가 빠른 동작으로 엎드린 여자의 배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허리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엉덩이를 뒤로 쑥 내민 채 두발로 선 자세로 양손을 침대 위에 짚어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박형기는 선 채로 단단하게 팽창된 페니스를 여자의 질 속으로 거칠게 삽입시켰다.

아!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박형기가 여자의 골반 허리를 뒤에서 잡고 엉덩이를 바짝 끌어당기며 깊게 삽입한 페니스로 여자의 질 속을 헤집었다. 아아! 여자가 엉덩이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
― 더 세게, 더 세게, 아! 자기야, 사랑해. 사랑해. 더 깊게! 더 깊게!
박형기는 여자의 질 속에서 솟아오르는 용암처럼 분출했다.

 *

― 미만해. 정말 미안해.
옆에 앉은 손양이 유양의 어깨와 머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손양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배어 있었다.
― 괜찮아요. 언니. 그들이 언니와 제게 한 짓을 생각하면 참아낼 수 있어요. 선생님께 한 짓을 생각하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견뎌낼 수 있어요.
손양의 품에서 빠져나와 허리까지 내려진 브라우스를 올리고 단추를 채우며 유양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울음이 배어 있었다.

유철주는 침통한 표정으로 두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말없이 생수병을 통째로 들고 마셨다. 유철주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참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지금보다 더 잔인한 사디스트로 만들어야 합니다. 절대 의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 예,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치욕스런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걸요. 그보다 제가 더 두려운 것은 제가 정말 학대받는 것을 즐기는 변태성욕자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점점 더 잔인한 사디스트로 변해갈수록 저는 점점 더 강한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가 되어 가는 것 같아요. 마치 송충이 같은 그 사람 물건이 내 속에 들어올 때 치욕으로 토할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제 육체가 쾌락으로 젖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요. 제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제 육체가, 제 감각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어요.
유양이 끝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미안해. 널 끌어들여서 정말 미안해. 그러나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 곧 끝날 거야.
손양이 다시 유양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오열했다.
― 그래요.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이 고통도 곧 끝나게 됩니다. 그때까지만 견뎌 주세요.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유철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일어섰다. 손양도 유양도 포옹을 풀고 함께 따라 일어섰다.
― 부장님!
유양이 말하며 출입문으로 발을 내딛는 유철주의 손을 잡았다. 유양이 무너지듯 유철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격렬하게 어깨가 들썩거렸다. 잠시 후, 유양이 유철주의 품에서 빠져나와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
― 부장님, 잘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견뎌낼 거예요. 참아낼 거예요.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낼 거예요.

유철주가 오른손을 내밀어 엄지손가락으로 유양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살짝 문질러 닦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 고마워요.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어요. 물러설 수 없는 외나무다리 게임입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게임입니다. 나오지 마세요. 가보겠습니다.
유철주가 유양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 등을 토닥여주고 출입문을 열고 카페를 나갔다.

2018. 11. 19.(월) 연재 제6회 <음모의 표적>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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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와의 짧은 소통

뇌과학 관점에서 대뇌 신피질의 작용인 인간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진실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진실의 영역은 생명현상과 잠재의식을 직접 관장하는 뇌간에 있다. 뇌간은 대뇌 신피질과 구피질을 통과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뇌의 중심체이다. 대뇌 신피질에서 뇌간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반 뼘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는 무한한 우주에 가깝다. 이 무한한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은 오직 신성神性의 원리이다.
 

▲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바라본 부산 남항대교

작중인물 유철주의 말처럼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 속에서 나타난 결과의 구체적 형태가 사건이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 속 M룸살롱에서의 최경호의 행위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카페 소피아에 등장한 네 사람의 대화는 결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사이에 진실이 존재한다.

완전한 진실과 그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는 신성의 빛이 인도하는 삶의 뿌리 쪽으로 향해야 한다. 이 소설 속의 진실, 그것은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원인으로 작용하는 M룸살롱의 위치와 결과로 이어지는 카페 소피아의 장소를 같은 부산 남포동으로 설정한 이유이다. 최경호의 환각적 성행위와 박형기의 사디즘 폭력도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행위상징적 요소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