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한 이름

                                                  배 혜 경

지상의 꽃이란 꽃이 다 모인 걸까. 영국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나선 길에 발걸음 닿는 곳마다 꽃들이 먼저 반겨주었다. 만난 적 있던 꽃, 비슷하지만 다른 꽃들이 색색의 얼굴로 방랑자를 맞아주었다.

이른 유월 이국땅에서 그 꽃을 만나게 될 줄이야! 함께 보았던 순간의 기쁨이 방울방울 맺혀 있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반가울 리가... 마치 그날 본 그 꽃잎이 머금고 있던 물방울처럼 명확하게.

진초록 치마에 샛노란 미소를 심장처럼 달고 순백색 블라우스를 곱게 입은 한 다발의 너는 한낮의 케임브리지 마켓 한구석에 소담하게 피어 있었어. 그 옆으로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갖가지 빵과 스페인 화가 고야에 관한 책이 한눈에 들어오던 손수레 헌책방이 이어져 있었지. 12파운드라는 가격표를 이름표처럼 달고 그날 이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되었던 네가 그렇게 오도카니 앉아 있었어.

그날, 가랑비 그친 후 가까운 숲길을 걸어보기로 했지. 해거름을 앞둔 늦은 오후였어. 길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가끔 보였지만 맑고 호젓한 분위기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어.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로도 들어가 보았어.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와 이름 모를 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서로 이름을 묻기도 하며 가슴이 초록으로 물들어갔지. 마냥 싱그러워졌지. 사는 게 시들하다고 느낄 때쯤이면 꼭 이런 시간이 선물로 와. 아직은 너 자신에게 백기 들지 말라고 누군가가 말해주는 듯 말이야.

너무 깊이 들어가기엔 어둑발 내리기 전에 나오지 못할 것 같았어. 다시 큰 길로 나와 완만한 오르막을 올랐지.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어. 등산복 차림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찰나처럼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지. 시화(詩畵)가 소나무에 군데군데 걸려 있더군. 발걸음을 멈추고 읽어 보았어. 자신의 목소리를 이해받지 못할 때 우리는 외로워지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누군가에게 삶의 이유가 될 만할까.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었어.

지역 시인들의 어설프나 진솔한 언어가 빨랫줄에 걸린 바람 한 자락처럼 가볍기도 무겁기도 하더군. 뭔가 표현하고는 싶은데 진부한 발상에다 어긋난 맞춤법, 통속적인 시어(詩語)밖에 생각나지 않는 막막함 같은 게 읽혀 서글퍼졌어. 나무에 꽃처럼 매달린 그 이름과 언어가 대책 없이 가여워졌어. 벗어놓은 낡은 속옷처럼 내어걸린 이름과 허름한 언어들로 버티고 있는 후줄근한 자존심 따위가 말이야. 살아가는 일도 그처럼 헙수룩할 것인데 아닌 척하며 턱을 쳐들고 눈을 내리깔며 애매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건 아닐까. 속울음 울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코웃음 치며 자세히 읽지도 않고 스쳐지나갈 건데, 그럼에도 부단히 쓰고 내어걸고, 이렇게 쓸모없는 일을 하며 사는 글쟁이들이란 말이야. 어떻게 살든 사는 일은 다 서글픈 거지. 불쌍한 거지. 헛웃음도 아니고 쓴웃음도 아닌 어떤 웃음이 파열음으로 삐져나오더군.

동행자는 나무의자에 잠시 앉았지만 나는 앉지 못하고 서성였어. 나무의자 옆의 한 그루 소나무에 매달린 시화에서 또 맞지 않는 퍼즐 조각 같은 언어들이 보였어. 어긋난 생의 한 모퉁이를 보는 듯해 안절부절 뭐 마려운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지.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어. 내려오는 길 오른쪽 길섶에 네가 배웅이라도 하듯 피어 있었지. 올라갈 땐 분명 보지 못했는데 말이야. 순간, 아웃포커싱으로 너만 환해지고 커다래졌어. 이름을 알 듯 말 듯 하여 얼른 꽃 검색 앱 화면을 너의 얼굴 가까이 들이댔어.

마거리트! 그래 맞아, 마거리트! 이름이 어쩜 그리 마거리트다울까. 나는 나다울까? 나답지 않게 살고 싶은데 말이지. 사람들은 나를 나로 알까. 그들이 규정하고 요구하는 나 말고 창과 방패 같은 진짜 나 말이야. 아이 같고 누이 같고 폭군 같은 나 말이야. 포루투갈 시인 페르디난도 페소아처럼 이명(異名)을 수십 개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잠깐, 너는 더없이 자명한 이름으로 내 심장에 자리했어. 샛노란 가슴 주위로 동그랗게 퍼진 가녀린 순백의 꽃잎들, 절대 잊히지 않을, 다시는 아리송해 하지 않을 이름으로 말이야.

진실한 사랑, 비밀의 사랑은 너의 꽃말이더군.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했지. 왜 그런 문장을 썼을까, 이름이 두 개였던 천재시인 이상, 김해경은 말야.

배혜경 수필가는 부산문인협회 회원으로 수필집 『앵두를 찾아라』(2015)와 영화에세이 『고마워 영화』(2017)를 발간하였다. 전국 수필잡지와 온라인 공간을 통해 꾸준히 집필하고 있으며, 2017년 부산수필문인협회 제8회 올해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 수필가 배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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