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김 정 숙

언제나 얼음으로 가득했다
쉴 새 없이 발버둥 치며 돌려온 세월만큼
차가움은 두터워졌으리라
따뜻함 만들지 못한 그 긴 세월 동안
찬 기운만으로 버텼으니 무척이나 힘들었을

어릴 적 옆집 홀로된 선희 엄마는
사흘이 멀다 하고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욕지거리 섞어 열세 살 딸에게 꾸지람을 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물독에 물 채워놓지 않았다고
저녁이 늦었다고
밥사발 깨뜨렸다고

시장바닥 세파에 휩쓸리며 생긴
상처투성이 쓰라릴 때
애먼 딸에게 사흘거리로 그렇게
꾸지람 아닌 화풀이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방법을 몰랐던
선희 엄마!
얼음 가득 채워진 가슴 얼마나 아렸을까

얼마 전부터 낡아 얼음이 얼지 않는
우리 집 냉장고처럼 삭고 늙는다는 것은
응어리진 얼음 내려놓고
천천히 따스해지는 일이다

*작가 노트

▲ 김정숙 시인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냉장고처럼 언제나 찬 얼음만 얼리는 고된 일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인생이 차갑다는 것은 그만큼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쉴 새 없이 동력이 필요한 것인데, 아무 방법을 찾지 못한 그 시절 선희 엄마, 그것이 자기 안의 열을 식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 나이 들어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선희가 받았을 상처를 그 엄마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 세대만 아는 어려웠던 시절, (지금도 그늘진 곳에서는 더 한 일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 차갑게 응고된 가슴을 녹일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면 한결 따스하고 부드러운 삶이 될 수도 있었을 선희 엄마가 냉장고와 대비되는 것은, 지금 참하게 늙어가면서 가족과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 온화한 내 친구 선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나이 들어 힘없어질 때야 응어리진 가슴의 얼음 내려놓고 천천히 따스워지는 것이지 싶다.

김정숙 시인은 공무원으로 정년퇴임을 하였고, 계간『청옥문학』 시 부문으로 등단하였다. 새부산시인협회에서 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부산문학인아카데미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신작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의 신작시를 시인이 쓴 작가 노트와 함께 발표하는 지면입니다.